#158
종종 아이리스의 예리한 감이 무서워지곤 했다. 이카로스를 단순한 손님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건만, 아이리스는 대번에 설원에서 만난 인연임을 눈치챘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은 마물이라는 정체를 유추하지는 못한 듯했다.
나를 바라보는 의심 가득한 눈에 대고 능청스럽게 변명했다.
“저분은 교수님의 지인이에요.”
“…그래? 지인이면, 귀족인가?”
“귀족…은 아니지만요.”
“흐음.”
믿어…주는 건가? 아이리스는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리며 이카로스를 흘겨보았다. 때마침 이카로스가 고개를 돌린 탓에 그들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차마 눈이 마주치고도 가뿐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아이리스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갑자기 들어와 죄송합니다.”
아이리스치고는 제법 정중한 인사였다. 하지만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카로스는 무덤덤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에 강렬한 눈썹 때문인지, 이카로스는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못 당황한 아이리스는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내 첫인상이 그렇게 별로냐?”
“…네?”
“대놓고 말이 씹힌 건 처음인데.”
“아, 그게 아니라….”
조용히 눈을 굴리다가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이국에서 오셔서 카르사어는 잘 모르세요.”
“오~”
감사합니다. 닉스 님. 말씀하신 대로 위기가 찾아왔네요.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요.
어쩌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닉스에게 내심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타국에서 왔다는 말에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던 아이리스의 눈동자는 어느덧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이국 어디?”
“위…쪽이었나.”
“위쪽이면 사르티안인가? 꽤 추운 곳에서 오셨네.”
“하하…. 그, 글쎄요? 실은 저도 교수님의 지인분이라 자세히는 몰라요.”
사르티안이 어디더라.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나라 이름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색함이 뚝뚝 묻어나는 반응을 곤란하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아이리스는 더 이상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뭐, 이상한 사람만 아니면 됐지. 난 또 전에 마주친 그놈인 줄 알았네.”
전에 마주친 그놈이라면, 시지프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소식을 전하려거든 라비린토스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굳이 걱정과 짐을 안겨 줄 필요는 없겠지. …응. 그게 좋겠다.
미련 없이 걸음을 돌린 아이리스는 스스로 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간다. 다음에 마저 얘기해 줘.”
“미안해요.”
그를 배웅하려 뒤따라 나가는데, 연구실 앞에서 예기치 못한 이들을 마주쳤다.
“태오!”
“형.”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진! 게다가 세잔까지….”
“역시 여기 있었네요. 저희 교수님께서 아스레인 교수님이 오늘 도착하신다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무의식중에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려다가 뒤늦게 이카로스가 떠올랐다. 연구실에 그만 남겨 두고 가기는 신경 쓰이고, 모두가 불편한 자리를 만들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날 보려고 찾아온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야만 했다.
적잖이 마음이 쓰여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혹시 급한 일이에요?”
“아, 그런 건 아니고 선물로 라즈베리 파이가 들어왔거든요. 괜찮으면 같이 먹을래요?”
“어….”
진이 들고 있던 박스를 내밀며 생글생글 웃었다. 리본으로 곱게 포장된 박스 틈으로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이걸 어쩌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세잔이 어깨 너머로 연구실을 들여다보곤 나지막이 말했다.
“손님이 계시는군요.”
“엥, 진짜요?”
환하게 웃고 있던 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비죽 내민 그는 소파에 앉은 이카로스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급기야 목소리까지 비장하게 낮추며 속삭였다.
“혹시 심각한 대화를 끊어 버린 건가요…?”
“아니에요. 교수님과 친한 지인이셔서 연구실에 계신 거예요.”
“어후, 놀랐네.”
반응을 보아하니 어느 높으신 분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쉰 진은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 계시니까 금방 가 볼게요.”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해요.”
“에이, 아니에요. 어차피 얼굴 보러 온 건데요. 아무튼 잘 다녀온 거죠?”
“그럼요! 걱정해 준 덕분에요.”
한껏 씩씩하게 웃으며 답했으나, 세잔은 쉬이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타르타로스 때처럼 또 피곤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닙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다 잘 끝났어요.”
미소가 어색하진 않겠지. 이젠 거짓말도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누구보다 나를 신뢰해 주는 그들이기에 괜스레 죄책감마저 느끼는 듯했다. 입가에 맴도는 씁쓸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그만 말을 줄이려고 했다.
그때 진이 내게 라즈베리 파이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맞다. 이건 손님이랑 같이 먹어요.”
“어, 그래도 돼요?”
“당연하죠. 애초에 태오 주려고 빼 온 거예요.”
나는 줄 게 없는데…. 성의를 에둘러 거절하기도, 그렇다고 빈손으로 냉큼 받기도 미안했다. 제자리에서 쭈뼛거리자 진은 자연스럽게 품 안에 박스를 안겨 주었다. 이내 주위를 흘끔 둘러보더니 한 걸음 다가와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실은 바인하르 교수님 앞으로 온 선물인데… 부인 분께 한 소리 들었는지, 당분간 디저트를 줄이신다고 하더라고요.”
“아….”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자 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가에 검지를 대었다. 쉿! 하고 짧게 말하는 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아이리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내 건 없어?”
“아이리스는 우리랑 먹으면 되지. 태오 귀찮게 하지 말고.”
“귀찮게 안 하거든? 나도 눈치는 있어.”
“어허, 눈치 있는 놈이 손님 있는 연구실에 버젓이 들어갔다 나와?”
진이 장난스럽게 헤드락을 걸자 아이리스는 투덜거리며 가슴께를 때렸다. 언제 둘이 이렇게 친해졌지? 심지어 세잔은 친형제 같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익숙한 듯 바라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끼어들기 힘든 느낌이 들어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새 많이 친해졌네요? 셋이.”
“그런가요? 매번 학교에서 마주쳐서 그런가 봐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진을 향해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댔다.
“맨날 기숙사 학교 기숙사 학교만 반복하는데, 안 마주칠 수가 있어야지.”
“에휴, 네가 대학원생 해 보면 안다.”
“안 할 건데?”
“…이 자식이.”
이번엔 좀 더 세게 헤드락을 걸었는지, 아이리스가 한껏 짜증을 냈다. 혹시라도 싸움이 날까 봐 말리려고 다가갔지만 세잔이 한 발 앞섰다. 너무도 능숙하게 그들을 떼어놓기에 허공에 올라갔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내 세잔은 진과 아이리스의 등을 툭툭 밀며 곤란한 듯 웃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형.”
“아…. 잘 가요.”
본관으로 향하는 내내 셋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다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쓸쓸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나란히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내가 낄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게.
언젠가는 저들에게서 내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대학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데, 예전처럼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날로 돌아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선택한 거잖아.”
그들과의 평범한 일상을 포기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그러니 감히 씁쓸한 감정을 느낄 권리조차 없다. 물론 이제 와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점차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태오.]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이카로스.”
계속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내가 걱정이 된 모양이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빛이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그 무뚝뚝한 이카로스에게 걱정을 사다니, 기뻐해야 할지 표정 관리 하나 못한다고 민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라. 그러고 보니 방금 이름으로 불러줬네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불러줘서.”
싱긋 웃으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박스를 내려놨다.
“파이를 선물 받았는데, 먹어 볼래요?”
우선 이카로스를 소파에 앉혀 놓고, 가끔 손님이 오면 내오는 접시와 포크를 꺼내다가 앞에 두었다. 그러곤 마치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열어 보듯 리본을 풀고 박스를 열었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윤기 흐르는 라즈베리 파이를 보니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와, 냄새 진짜 좋지 않아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카로스를 위해 파이를 잘라다가 먹기 좋게 접시에 덜어 주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는 어쩔 수 없이 접시를 받아들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빛내며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으려 하기에 다급히 팔을 붙잡았다.
“어어, 그게 아니라….”
[따로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이렇게 포크로 먹으면 돼요.”
직접 자그마한 포크를 들어 한 입 크기로 떠 주었다. 이카로스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포크를 받는 대신 고개를 숙여 파이를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파이를 음미하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어때요? 맛있어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때 먹은 감자 수프랑 비교하면요?”
[…그게 좀 더 낫습니다.]
“하하, 그래요?”
아무래도 채식은 입맛에 안 맞는 모양이다. 나도 한 조각 먹어 보려 케이크 나이프를 드는데, 이카로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저를 두고 가셔도 됩니다.]
“…네?”
[그리 오래 있을 건 아니지만, 혹시 몰라 하는 말입니다.]
역시 신경 쓰이게 했구나. 내가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난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파이를 잘라다가 접시에 덜어놓았다.
“어떻게 그래요. 이카로스는 제게 소중한 손님인데.”
[방금 그 인간들도 당신에겐 소중한 손님 아닙니까.]
허를 찌르는 말에 포크를 집는 손이 흠칫 떨렸다. 늘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카로스는 사람의 마음을 관철하는 데 타고난 것 같다. 이제 와 말을 돌릴 필요도 없어 보여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죠.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제게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도와주려고 하죠.”
이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지켜주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을 못하겠어요. 지금 제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지….”
깊은 사정을 들은 그들은 도망치기는커녕 나를 도우려 할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 아마 아스레인이 처음 나를 밀어낼 때 이런 마음이었겠지. 만약 그들이 나를 돕기 위해 일상을 포기하고자 한다면, 일부러 못된 소릴 해서라도 밀어낼 것 같다.
한참 동안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카로스가 담담한 투로 말했다.
[원래 대의를 선택한 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아스레인처럼요?”
[그분과 함께하는 길을 걷거든, 앞으로 훨씬 많은 걸 포기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각오한 일이에요.”
흑막을 파헤치는 길은 분명 험하고도 외로울 것이다. 감히 황제를 의심한 죄로 다신 안겔루스 대학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감싸려 위험을 무릅쓰겠지. 혹시 화가 튈지도 모르니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지금 당장?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전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퍼뜩 고개를 들자 이카로스가 자그마한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박스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네모나게 접힌 쪽지를 펼치자 둥글둥글한 글씨가 보였다.
‘태오. 이번엔 어떤 사정이 있는진 모르지만, 이거 먹고 힘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태오가 우리 마을을 도와준 것처럼 나도 꼭 도와주고 싶으니까. -늘 새로운 길을 떠날 때마다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는 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