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 (157/305)

#157

문득 내로라하는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주변 반응이 떠올랐다. 종종 반찬을 챙겨 주시던 옆집 아주머니는 대단하다고 축하해 주셨지만, 먼저 대학원을 졸업한 선배는 왜 굳이 고통을 이천만 원씩이나 주고 사냐고 했었다.

당시엔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막상 이카로스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말문이 턱 막혔다.

“…이카로스가 안겔루스 대학을요?”

[예.]

단호한 태도를 보니 더더욱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실은 이카로스도 아스레인을 닮아 학자의 피가 흐르는 거 아닐까. 자진해서 대학을 가겠다는 그를 냉큼 반겨야 할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라고 말려야 할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닉스마저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얹었다.

[인간이랑 대화도 못하면서 웬 학교?]

[그러는 당신은 가능합니까?]

[당연하지. 난 누구 씨랑은 달리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의식을 전하는 게 가능하거든.]

한껏 우쭐해진 닉스는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닉스만의 특권인지, 이카로스는 자못 심각해졌다. 어쩐지 시작하기도 전에 꿈을 짓밟아 버린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혹시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무슨….”

두 빛깔의 눈동자가 아스레인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잠시 그의 말뜻을 헤아리다가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구실에 두 번째 제자가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 이카로스는 안겔루스 대학에 입학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아스레인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예상이 시원하게 빗나가 버려 멋쩍게 웃어넘기는 한편,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학생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오로지 장난칠 생각으로 번뜩거리던 붉은 눈동자가 갑자기 따분해졌다. 닉스가 대놓고 싫증을 내자 이카로스는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마물이 인간의 학교에 왜 들어갑니까?]

[그러니까~ 웬일로 재밌는 짓을 하나 했지.]

[제가 당신인 줄 아십니까?]

그 순간 닉스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뚝 솟았다. 이윽고 소름 끼치는 미소를 머금은 핏빛 입술 새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동생, 말하는 꼴 좀 봐. 너무 오래 처박혀 있어서 누가 위인지 잊은 것 같네?]

[단 한 번도 당신의 아래였던 기억은 없습니다만.]

[괜찮아. 지금부터 기억나게 해 주면 되니까.]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도무지 닉스와 이카로스 사이로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슬그머니 빠졌다. 그나마 중재해 줄 법한 아스레인의 곁에 서서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정작 아스레인은 흔하디흔한 광경을 마주한 듯 둘의 갈등에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끌며 속삭였다.

“아스레인.”

“음?”

“저대로 둬도 괜찮은 거예요…?”

부디 집만 안 날아갔으면 좋겠는데. 나지막이 뒷말을 중얼거리니 그제야 아스레인은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과연 어떻게 살벌한 신경전을 멈출까 싶었는데, 그의 반응은 제법 담백했다.

“그럼.”

단 두 글자 만에 그들의 이목이 아스레인에게 향했다.

“며칠간만 연구실에 있는 걸로 괜찮나?”

[예. 방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굴더니만, 팽팽한 줄다리기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이카로스가 먼저 관심을 거두니 닉스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이내 닉스는 내 옆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적당히 과묵한 설정으로 지내면 되겠네.]

“설정이요?”

[연구실에서 누구라도 마주치면 어떡해. 변명거리로 써먹을 ‘설정’이라도 있어야지.]

생각해 보니 그러네. 아무리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이 아스레인을 찾아오니 반드시 누군가는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날개를 숨긴 인간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수상한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조용히 고민하고 있으니 닉스가 재차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타국에서 와서 말을 이해 못한다고 하든가.]

“역시 닉스 님은 남을 속이는 데 익숙하신 것 같네요….”

[후후, 철저하다고 해 줄래~?]

불현듯 타르타로스 앞에서 그에게 깜빡 속았던 경험이 떠올라 한동안 흐린 눈을 끔뻑거렸다. 별안간 거짓 설정을 가져야 돼서 고민에 잠긴 이카로스에게 말했다.

“아스레인의 손님이라고만 해도 웬만해서 말을 안 붙일 거예요. 아, 물론 아스레인은 매번 강의 때문에 자리를 비우니까 저랑 있어야 하겠지만요.”

[상관없습니다. 그 외에 달리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까?]

“어….”

이카로스의 정체를 들킬 확률은 극히 적다. 애초에 인간형을 묘사한 기록이 없고, 그를 마물이라 넘겨짚을 법한 단서도 없었다. 딱히 신경 쓸 것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새삼 그의 미모가 눈에 띄었다.

“외형… 정도일까요.”

나야 하도 아스레인이나 닉스를 자주 봐서 익숙해졌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얼굴이다. 이를테면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에다가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까지 합쳐져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이대로 학교를 돌아다녔다간 ‘저분은 어느 댁 자제냐’는 둥 괜한 소문만 사고 말 것이다.

“일단 왼쪽 눈은 가리는 게 좋겠네요.”

[보기 흉합니까?]

“아뇨. 그 반대예요. …되도록 기억에 덜 남는 편이 좋죠.”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자 이카로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지극히 평범한 겨울옷을 입고도 이리도 눈에 띄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이해시키기엔 한참 그른 듯하여 그냥 결론부터 말했다.

“기왕이면 마법으로 색을 바꿀까요? 아스레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아뇨. 이런 사소한 것에 그분께서 힘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광장에 있는 가게에서 안대를 사는 게 좋겠네요.”

그제야 이카로스는 머리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드디어 모두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슬슬 떠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닉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재밌겠다. 나도 학교로 갈까?]

“…예?”

인간 세계에는 내 마력만큼도 관심 없는 마물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닉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닉스에게 붙잡히기 전, 아스레인이 그의 팔을 가볍게 쳐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오가 헛소리를 일일이 받아 주니 정도를 모르는군.”

[자기가 받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뭔 상관이래?]

닉스는 히죽 올라간 입가를 어루만지며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설마 나랑 태오 사이를 질투하는 거야?]

“…….”

음. 아무래도 이대로 집이 날아가거든, 칼리온에게 거친 눈 폭풍이 왔었다고 둘러대야겠다.

***

이게 얼마 만에 돌아오는 학교인가. 딱히 장기 출장도 아니었는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외지라 그런지 학교가 더욱 그리웠었다. 온몸을 감싸는 따스한 공기를 담뿍 만끽하며 오랜만에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좋아. 이대로 연구실 청소부터 하고 밀린 서신을 정리하면 되겠다. 그 뒤에 그리운 얼굴들을 보러 가서 안부를 물으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활짝 여는 사이, 뒤에서는 딱딱한 대화가 오고 갔다.

“당분간 내 저택에서 지내지.”

[예.]

“태오를 귀찮게 하지 말고. …뭐, 자네는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유념하겠습니다.]

엄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콧노래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능숙하게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정리한 아스레인은 또다시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막 도착했으니 반나절은 쉴 법도 한데, 완벽한 그에겐 가당치 않은 모양이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필요한 서류만 간단하게 챙겨 문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연구실 벽에 걸린 재킷을 챙겨다가 뒤를 따라갔다.

“그럼 일단 회의를 다녀오겠네.”

“연구실로 온 서신은 제가 정리해 둘게요.”

“그래.”

서류를 든 팔에 재킷을 걸쳐 주니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 따라 나오니 어째 출근하는 애인을 배웅하는 것 같다. 아니, 이젠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빤히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잠깐.”

“네?”

그대로 아스레인이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아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아스레인이 보였다.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녹아 내릴 것만 같아 금세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그러….”

결국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으나, 하고 싶은 말은 숨소리로 흩어졌다. 아스레인은 마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덮쳐 왔다.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반쯤 감긴 눈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누구와 입을 맞추고 있는지 똑똑히 자각하라는 듯 느긋하고도 지긋한 키스였다.

“읏, 잠깐만….”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서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급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집요하게 입술을 파고드는 바람에 호흡이 가빠졌다. 반쯤 안긴 채로 거친 숨을 고르자 상기된 얼굴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흘끔 고개를 들자 아스레인은 내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다녀오마.”

“아…. 다녀오세요.”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가 연구실 밖으로 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쓸었다가 촉촉한 감촉이 느껴져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입술을 과실처럼 베어 물기에 그대로 삼켜지는 줄만 알았다.

홀로 멍하니 입술을 매만지다가 뒤늦게 소파에 앉아있는 이카로스를 발견했다.

“그, 그러니까 이카로스. 이건요….”

[딱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왠지 더 민망해졌다. 뒤이어지는 침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실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지껄였다.

“내일 수업이 끝나고 학생이 없을 때 학교 안을 안내해 줄게요. 부지가 넓어서 구경할 게 은근히 많거든요. 아, 아스레인이 수업하는 강의실도 궁금할 테니까 거기도 가고요.”

뭐라고 반응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탓에 손짓 발짓 전부 써 가며 말을 하던 차였다.

“그리고….”

[당신은.]

“네?”

[제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얼이 빠졌다. 조용히 눈만 끔뻑이다가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전 오히려 이카로스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영역에 허락 없이 들어온 쪽은 저입니다.]

“어….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딱히 영역이랄 게 없어서 그런가.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며 엷은 미소를 흘렸다.

“저는 연구실에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 것 같아서 좋아요. 그… 제가 가족이랄 게 없어서요. 실은 이카로스가 닉스나 아스레인이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 부럽기도 해요.”

[가족…말입니까?]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잖아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카로스는 선뜻 동조해 주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하, 그죠? 게다가 이카로스는 막내니까 가장 많이 사랑받았을 거 같아요.”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니 이카로스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사랑받았다는 표현에 의문을 가진 걸지도 모르겠다. 막 궁금증을 풀어 주려던 그때, 노크 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아, 잠시만요.”

누구지? 갑자기 아스레인의 손님이 온 거면 낭팬데. 설마… 칼리온은 아니겠지.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이리스!”

냉큼 이름을 부르자 회색 눈동자에 산뜻한 생기가 돌았다. 그것도 잠시, 아이리스는 금세 반가운 기색을 지우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설프게 감정을 숨기는 모습마저 반가워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보고 싶었어요.”

다짜고짜 끌어안으니 아이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진짜였네.”

“뭐가요?”

“방금 복도에서 누가 교수를 봤대서 설마 하고 왔거든.”

교수라는 단어에 일순 방금 전의 일이 떠올라 뜨끔했다. 어색하게 팔을 거두고 삐걱거리며 연구실 문을 닫았다. 다행히 아이리스는 이상한 행동을 느끼지 못했는지,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은 잘 끝낸 거냐?”

“네, 음. …그럭저럭.”

“그럭저럭? 또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그러지.”

“하하, 설마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아랑곳 않고 지금까지의 일을 차근차근 캐물었다.

“시지프는?”

“그게……”

“도움이 필요하다던 마물은 구했고?”

“그러니까….”

자꾸만 뒷말을 흐리자 아이리스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됐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네?”

“왜. 바빠?”

“아뇨. 그건 아닌데….”

안에 이카로스가 있다. 아직 다른 인간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도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은근슬쩍 아이리스의 팔을 잡아끌며 신경을 다른 곳으로 끌었다.

“그, 여기서 말하면 안 될까요?”

“굳이?”

“아직 연구실 안 청소가 덜 돼서요.”

“뭘 그런 걸 신경 쓰냐? 이 안에 마물이 있어도 안 놀랄 테니까 걱정 마라.”

아니, 진짜 마물이 있다니까요. 어정쩡하게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자 아이리스의 표정이 점점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설마 또 곤란한 놈이 찾아온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말려도 이미 늦었다. 벌컥 문을 연 아이리스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카로스를 보고 일순 굳어 버렸다. 다행히 눈치 빠른 이카로스가 갈색 천으로 된 안대를 쓰고 있었으나, 단지 그것만으로 아이리스의 충격을 줄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다급히 상황을 수습하려던 차, 아이리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네넵?”

“…대체 설원에서 뭘 주워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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