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156/305)

#156

괜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부 흘러가는 백일몽이라고. 혹시라도 잠에 빠지면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부서져 당장이라도 끝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스레인의 품에 안겨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길고도 긴 밤을 가만히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이리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나만의 특권이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으려나….”

어느덧 창밖으로 찬연한 아침이 밝아 왔다. 눈치 없는 햇빛이 눈가를 간질이는데도 아스레인은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시지프 때문에 힘을 쓴 데다가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무리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밤새 그의 안색을 세세하게 살폈다.

이따금씩 손을 뻗어 코 아래에 살짝 대어 보았으나, 역시나 숨은 쉬지 않았다. 맞닿은 몸에서 온기는 느껴지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단단한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두근, 두근…. 여느 사람보다 훨씬 느린 심장소리를 들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의 것.”

아직도 꿈만 같다. 아스레인이 나를 그리 불러 줄 줄은 몰랐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어제의 일을 곱씹고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그의 품을 파고들며 연신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대답이라도 하듯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응.”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헉, 제가 깨웠어요?”

슬쩍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만 저었다. 이제 일어나나 싶더니만, 웬일로 잠투정을 부리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절대로 놔주지 않을 기세로 다가오니, 요 며칠간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데면데면 지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슬그머니 팔을 뒤로 빼서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더 잘래요?”

“…벌써 아침인가?”

“해는 막 떴는데, 피곤하면 더 주무셔도 돼요.”

“그럴까….”

나른한 한숨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칼 같이 기상할 줄 알았던 사람이 잠에 취한 모습을 보니, 이미지가 깨기는커녕 귀엽게만 보였다. 콩깍지도 병이라면 이건 약도 없는 중증이다. 등허리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어루만지는데, 깊게 잠긴 목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자네는.”

“네?

“…잘 잤나?”

“그, 그으럼요.”

실은 밤새 깨어 있었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왔다고, 그 사이 긴 속눈썹 개수까지 일일이 셌다고 당사자한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입을 꾹 다물며 괜히 피곤한 척 너른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이대로 낮까지 여유를 즐기려했건만, 때 아닌 불청객이 찾아왔다.

[태오~]

이 목소리는… 닉스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로 방에 찾아온 거지? 물론 평소에 이 시간이면 깨긴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놀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닉스에게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들켰다가 앞으로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차라리 과대한테 CC를 들키는 게 낫지. 이건, 이건…!

[나 들어간다?]

“자, 잠깐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 봤자 이미 늦었다. 벌컥 문을 연 닉스는 아스레인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보자마자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내가… 뭔가 잘못 처먹었나?]

냉랭한 눈동자엔 초점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의 어깨에 창을 꽂은 사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살벌한 분위기였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아스레인의 팔은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안아 오는 탓에 옴짝달싹 못하고 고개만 돌렸다.

“그, 있죠. 닉스 님. 일단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왜 영감이 태오 방에 있어?]

“…그게….”

[설마 둘이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 거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애매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돌리자 닉스는 허, 하고 짧은 웃음을 뱉었다.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표정을 보니 무슨 상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아쉽지만 아무것도 안 했다고.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물론 아스레인이 자는 사이 몰래 입을 맞추긴 했지만, 그거 말고는 그냥 끌어안고만 잤다고…!

“그냥 잠만 같이 잔 거예요. 아스레인이 피곤해 보여서….”

[차라리 지나가는 님프를 속이지 그래.]

“정말이라니까요.”

믿어주지 않으니 억울함은 배로 불어났다. 닉스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아스레인이 말하면 믿어 주지 않을까 싶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스레인…! 일어나요. 닉스가 왔어요.”

닉스란 이름에 가지런한 미간이 살짝 움찔거렸다. 잠이 깨려는 틈을 타서 냉큼 말을 덧붙였다.

“닉스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아요.”

“…무슨 오해?”

“그러니까 저희가… 침대에서… 이것저것….”

대체 왜 내가 이걸 설명해야 하는 건데.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단어를 입에 담기 어려워 뒷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제야 눈을 뜬 아스레인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할 게 뭐 있나.”

“그죠? 그러니까 아스레인이 닉스한테….”

“사실인 것을.”

“…….”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발언은 백퍼센트 고의다. 불난 집을 멀리서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헬기로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아스레인은 눈 하나 깜짝 안했다.

“좋은 아침.”

심지어 차분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 위로 입을 맞추는 거 아닌가. 그 후에 품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등 뒤에서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하며 고개를 돌리자 닉스가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어떻게 나한테 말도 없이 그래?]

“네, 네?”

[나랑 꽤나 돈독한 사이였잖아. 헤메라.]

…그게 문제였던 거야? 닉스는 마치 불륜을 목격한 순애보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는지, 언제 울었냐는 듯 활짝 웃었다. 그가 저리도 환하게 웃을 때면 어떤 작정을 할지 몰라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문 밖으로 한걸음 물러선 닉스는 퍽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카로스!]

반짝반짝 거리는 새빨간 눈동자는 앞으로의 파국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이럴 거면 그냥 마을 광장에다가 광고문을 붙이지 그래. 아니면, 호랑이 생일잔치에 동물들을 전부 집합시키듯 마물을 전부 데려다 놓고 발표를 하던가.

목구멍까지 한탄이 올라왔다가 금세 나타난 이카로스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뭡니까?]

무심한 눈빛이 닉스를 향했다가 이내 이쪽을 흘겨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아스레인과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는 나.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 봐도 오해할 법했다.

닉스는 조금씩 표정이 미묘해지는 이카로스를 보더니 한 술 더 떴다.

[둘이 정분났대.]

“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닉스가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틀린 말 했어?]

“아, 뭐. …그건 아니지만….”

[하도 찬바람이 불길래 사이가 틀어진 줄 알았는데, 글쎄 연막이었나 봐~]

내가 어찌할 줄을 모를수록 닉스는 점점 더 즐거워했다. 한참동안 입을 가리고 쿡쿡 웃던 그는 이카로스의 어깨에 한쪽 팔을 기대며 물었다.

[어때? 너만의 그분이 빼앗긴 기분은.]

물론 이카로스가 내 마음을 알고 있긴 해도 관계가 깊어졌을 때의 반응을 생각지 못했다. 어제도 느꼈지만, 세계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스레인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맞다. 이카로스의 입장에서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일 게 확실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뭐?]

[오랜 고민 끝에 선택을 내리셨겠죠. 늘 그렇듯 저분의 결정에 착오는 없습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불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탓에 닉스는 완전히 흥이 깨져 버린 것 같았지만, 나로선 이카로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마를 짚으며 대놓고 한탄한 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저 사이를 반대하겠대?]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거 아니었습니까?]

[…하아, 더럽게 재미없는 놈.]

정신없는 폭풍이 잠잠해질 즈음,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가타부타 시끄럽군.”

이제야 잠에서 벗어난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테이블에 둔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는 손길은 평소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불과 몇 분 전만해도 나를 끌어안고 꿈속을 헤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부탁한 일은?”

두툼한 커튼을 열어젖힌 아스레인이 넌지시 묻자 닉스가 답했다.

[마법진으로 전부 데려가는 거까지 보고 왔어.]

“수고했네.”

[나한테는 일 시켜 놓고, 자기는 아끼다 못해 감싸고도는 인간이랑 꽁냥꽁냥거리는데 어련하시겠어.]

못마땅한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그 둘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굳이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살짝 손을 들었다.

“마법진이라뇨?”

“칼리온의 부대가 시지프와 그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네.”

“아, 태자궁의 진을 이용해서 황성까지 간 거군요.”

“그래. 지금쯤이면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겠지. 클라우스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니, 모쪼록 안심하게.”

시지프에게서 과연 얼마나 많은 단서를 얻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클라우스처럼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아스레인이 한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잊고 있던 존재가 뇌리를 스쳤다.

“혹시 테세스라는 사람도 같이 갔나요?”

“라비린토스에서 우리가 구한 사내 말인가.”

“네. …그자도 심문을 받게 되나 궁금해서요.”

비록 시지프에게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려 했으니 마음이 쓰였다. 슬쩍 반응을 떠보니 아스레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은. 하지만 죄를 전부 인정한 데다가 별 다른 짓을 하지 않았으니, 금방 풀려날 걸세.”

“…그렇군요.”

“안 그래도 자네에게 말을 전해 달라더군.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순례길에 오를 거라고.”

“순례요?”

사제가 되려는 목표는 진즉 포기한 줄 알았다. 그 사이 특별한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잠시 고민하던 중에 문득 설원에서의 기도가 떠올랐다. 설마… 그때 헤메라에게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찜찜한 기분을 떠안아 버렸다.

[근데 그 태자라는 놈, 믿어도 되는 거야?]

“네?”

[황제의 핏줄이잖아. 그리고 이번 일을 지시한 건, 바로 그 황제고.]

닉스의 말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태자 칼리온이 누구의 편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스레인을 특별히 여기는 것 같기는 한데, 언제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일 작자였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영생의 불’이 황제와 커다란 연관이 있는 건 맞는데….”

[역시 그렇지?]

현대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영생을 바라는 왕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건. 그래서 전설 속의 불로초를 찾기도 하고,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전부 허황된 노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혈안이 된 자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함께 생각에 빠져 있던 닉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생각할수록 수가 너무 얕은 것 같아. 황실 산하 기관에서 일하는 놈을 데려다가 이런 일을 시킨다? …자기가 흑막이라고 자랑하는 꼴이지.]

“그걸 숨길 만큼의 여유가 없어진 걸지도 모르죠. 아니면….”

다른 흑막이 있다…? 근데 황제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가 있나? 심지어 대륙을 다스리는 카르사 제국의 주인인데. 만약 그보다 위에 있으려거든 최소한 신은 되어야 했다.

“지금으로선 그분밖에 없어요.”

[좋아. 그 사람이 모든 일의 배후라고 쳐. 그럼 어떻게 끌어내릴 거야?]

“황권 교체는 간단해요. 황제가 죽으면 태자가 다음 황위에 오르게 되죠. 영생의 불이 존재하지 않는 한, 지금 황제는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하니 좋든 싫든 슬슬 물러설 거예요.”

벌써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황권 교체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그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칼리온도 서서히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노쇠한 황제는 물러서고 칼리온이 새로이 왕관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가 물러서기까지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거죠.”

영생이란 허황된 꿈을 꾸는 자가 인생의 기로에서 뭔들 못할까.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황제의 약점을 제대로 잡아 끌어내려야 한다. 지금으로선 황실이 모두 그의 것이기에 힘들겠지만.

[그래서 태오는 지금의 태자가 황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차분하게 결심을 다졌다.

“영생의 불. 그리고 황제…. 이 두 개가 숨겨진 문으로 인도해 줄 거예요.”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미궁의 내핵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미궁 안에 숨어 있는 자를 끌어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여전히 문 앞에 서있는 닉스에게 다가갔다.

“이제 닉스는 어떻게 할 거예요?”

[평소대로 돌아다녀야지.]

“이번에도 고마웠어요.”

[뭘. 전에도 말했잖아. 헤메라의 부탁이라면, 뭐든 좋다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따사로운 빛이 와 닿았다. 이내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짓궂은 표정과는 달리 한없이 섬세했다.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한 닉스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하아, 과보호가 얼마나 더 심해질지 안 봐도 훤하다.]

“하하….”

얌전히 애정을 받으며 마주 웃는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스레인이 내 팔을 잡아 뒤로 휙 끌어당겼다. 거의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서서 올려다보니 애써 평정을 유지한 얼굴이 보였다.

“그럼 우리도 이만 돌아가지.”

“아, 네!”

드디어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마주칠 얼굴이 떠올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졌다. 그대로 짐을 챙기려는데, 여태 가만히 있던 이카로스가 갑자기 폭탄을 던졌다.

[저도 그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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