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 (155/305)

#155

만약 인생에 결코 놓쳐선 안 되는 순간이 여럿 있다면, 그중 하나가 분명 지금일 것이다. 집요하단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로 짙게 물든 그를 결코 놓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어떻게든 이 대화가 끝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깊게 숨을 들이쉰 그때, 잔잔한 바다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

“처음이었네.”

그의 말은 마치 돌과 같았다.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싶단 생각이 든 건.”

오랜 시간 동안 고요하던 바다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키는 돌덩이.

“항상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 움직였지. 뿔이 잘렸을 때도, 마물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스스로 화를 다스려 왔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계획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지. …그게 나의 존재 의의니까.”

서서히 커져 가는 물결은 끝내 파도가 되어 내 발끝을 가볍게 적셨다. 더러는 그러다 파도에 휩쓸려 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가 발끝만이 아닌 온몸을 적셔 주길 원했다. 그래서 겁 없이 다가갔으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지프를, 그 일당을… 진심으로 살생하려고 했네.”

바다는 썰물이 되어 저만치 물러섰다.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듯 닿지 않을 만큼 멀어져 선뜻 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차마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그 자리에 있던 자네도 살의를 느꼈을 테니까.”

“하, 하지만 끝내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그래. …단 1초라도 늦었더라면 죽었겠지만.”

“아스레인.”

“내 말이 틀렸나?”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스스로를 향한 조소에 가슴 한구석이 가시로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자 아스레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단 시지프의 목숨만이 문제가 아니네.”

“…네?”

“이미 닉스에게 듣지 않았나. 나의 분노는 이 땅에 뿌리 내린 마물에게 쉽게 번진다는 걸.”

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을 지켜야만 하네. 그런데… 자네가 납치됐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수 초 만에 이성이 무너졌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니, 바닥에 쓰러진 자들과 다친 몸을 겨우 이끌어 나를 필사적으로 말리는 자네가 보였네.”

공허한 눈동자가 텅 빈 손바닥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시지프의 숨통을 틀어쥐었던 손이다. 이내 잘게 떨리는 손끝에선 그날에 대한 후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내 감정에 동조한 마물이 민가를 덮칠 뻔했지.”

“…….”

“균형을 수호하는 자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스레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퍽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반드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기겠지. 그리하여 자네를, …이 대륙을 파멸로 몰아가고 말 걸세.”

“아니에요. 아스레인. 당신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시지프의 정신은 신력 때문에….”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지.”

가차 없는 태도에 무어라 말을 얹을 수도 없었다.

불현듯 나를 싫어한다던 이카로스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세계의 균형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그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지 말라고 했던가. 그 경고 그대로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스레인이 이성을 잃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나 때문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자네에게도 상처를 주어 미안하군. …그리고 나를 말려 줘서 고맙네.”

이제야 아스레인이 내게 거리를 둔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어째서 이게 마지막 말처럼 느껴지는 걸까. 헤어지기 전의 인사처럼, 다신 얼굴을 마주할 일 없으리란 선고처럼 다가왔다. 역시나 아스레인은 자리를 떠나려고 상체를 살짝 틀었다.

“잠시만요.”

아직 그가 일어서기 전, 다급히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그때 약속했잖아요. …난제를 같이 풀어 가기로.”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거든 내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무리해서라도 아스레인의 곁에 있겠다고, 옆을 내어 달라고 부탁한 건 나였으니까. 메마른 땅에 비를 뿌리겠다고 억지를 부렸으니, 홍수가 났다면 그건 내 탓이었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문제를 혼자 떠안고 또다시 멀어지려 했다.

“왜 그동안 제게 말씀 안 하셨어요?”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번 일로 자네가 스스로를 탓할까 봐.”

“그건….”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번 사건은 자네의 탓이 아니네. …화를 다스리지 못한 내 잘못이지.”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말에 일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날 아스레인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히페리온과 오케아노스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온 대륙에 분노가 휩싸였다면…. 그리하여 아스레인이 나와의 만남을 후회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아마 아니겠지. 고작 며칠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리도 괴로웠는데.

“이번 일으로 깨달았네. 소중한 존재가 생겼을 때의 기쁨만큼, 그걸 잃었을 때의 두려움이 크다는 사실을.”

아스레인은 어깨를 붙잡은 내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지킬 수 있는 자가 곁에 있거든, 이대로 내가 멀어지는 편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했네.”

“…아스레인!”

안 돼.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그와 만나기 전으로, 다신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아스레인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거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마저 사라져 그의 옷자락만 붙잡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저, 저는 싫어요. 이대로 떨어지기는….”

패닉에 빠져 한 마디를 꺼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유치한 고집에 이어진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다.

“나도.”

“…네?”

고개를 휙 들어 올리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 얼굴이 보였다.

“더 이상 자네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조차 없네.”

이별을 고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던 건가? 불안을 감추려 꽉 쥔 주먹 위로 그의 손이 겹쳐졌다.

“멀어지기로 결심한 건 나인데, 문득 자네 곁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더군.”

“무슨….”

“꽤 예전부터 그랬지.”

이윽고 아스레인은 내 손을 들어 자신의 뺨 위에 갖다 대며 말했다.

“자네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내심 흡족했지. 또 자네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 미소가 남을 향하면 불쾌하기까지 하네. …우습지 않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엔 전에 없던 감정이 얼핏 스쳤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은 마치 스스로를 태우는 태양 같아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중력에 이끌리듯 천천히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자 밀담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압하고 싶지 않으나, 한편으로 품 안에만 가둬 두고 싶어.”

따뜻한 입술이 짧게 손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손을 거두려 하자 아스레인은 오히려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해 봤네.”

가시나무처럼 옭아매는 손길이 심장까지 쥐어 오듯 괴로웠다. 고작 닿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이 감정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지.”

독점욕이자 소유욕.

“자네를 내 것이라 착각했네.”

가히 사랑보다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두렵기는커녕 가슴이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누군가에게 소유당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 아마도 상대가 아스레인이기 때문이겠지. 모든 걸 내려놓은 존재가 유일하게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미칠 듯이 기뻤다.

“이런 내가 경악스럽겠지만….”

“아뇨. 아스레인. …정말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요.”

뺨을 감싸 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살포시 막으며 말했다.

“지하실에서 마력에 억눌린 순간 겁을 먹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분노가 나를 위해서란 걸 알고 안심했어요.”

서서히 휘둥그레지는 눈을 보며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죠? …누군가 그로 인해 죽을 뻔했는데도 기뻐요. 아스레인에게 제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니까. 심지어 자칫 종족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조금도 아스레인과 떨어질 생각이 들지 않아요.”

이기적인 선택임을 안다. 진정 세계를 위하는 영웅이었다면, 여기서 감정을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단한 영웅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온 주인공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고 싶은 평범한 인간일 뿐.

“저, 아스레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선적이에요.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죠. …상관없어요. 함께라면 반드시 멈출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 떨어져 있는 게 더 힘들어요.”

이런 내게 실망해도 상관없다. 어째서 마물을 위하지 않느냐고, 인간의 편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손가락질해도 괜찮다.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이루어지는 평화라면, 더욱이 그게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언제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한 아스레인이 처음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선택한다면-

“아스레인이 유일하게 욕심내는 게 나였으면 좋겠어요.”

그건 반드시 나여야만 했다.

“제가 가지고 싶다면, 기꺼이 가져 주세요.”

“…태오.”

“대신 저의 일생만큼만…. 어쩌면 찰나일지 모를 아스레인의 시간을 제게 주세요.”

조심스레 팔을 끌어당기자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앉았다. 평소대로 돌아온 눈높이에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러면, 공평하잖아요?”

조용히 눈만 깜빡이던 아스레인은 이내 미간이 살짝 구겼다.

“…진심인가?”

“단 한순간도 거짓된 적 없어요.”

서로의 마음이 닿았다고 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를 가장 강하게 자각하는 것이 곁에 없을 때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하지만 인간이 아닌 자를 사랑해 버렸으니 이보다도 바보 같은 짓은 없었다. 그토록 위험하다고 소문 난 바다는 생각보다 다정했고, 내게서 도망친 밀물은 다시 돌아왔으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앞으로는 버리라고 하지 마요.”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를 다시 아스레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잃어버렸으면, 왜 잃어버렸냐고 질타해요.”

“응.”

“늘 끼고 다니라고 하고, 언젠가 까먹어서 빼고 있다면 서운하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지.”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손길이 귓불에 닿았다. 금속이 파고드는 감촉이 따끔거렸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내 귀 끝에 매달린 마석을 어루만지며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거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목 언저리에서 맴돌던 그의 손이 가볍게 턱 끝을 붙잡아 올렸다. 어느덧 새빨개진 눈으로 바라보니 아스레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마음을 한 단어로 표하기엔 그리 단순한 감정은 아닌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입술이 불그스름해진 눈가에 닿았다. 놀란 토끼 눈이 되어서는 각목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심지어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아 숨을 참고 있다가 쪽, 하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스레인…?”

“내 것.”

밀어를 나지막이 속삭인 아스레인은 이윽고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만의 것.”

그대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질척한 키스가 아닌, 마치 손을 잡듯 따스한 온기가 서로를 포개었다. 어쩐지 심장이 옥죄는 것 같아 서서히 눈앞이 뿌예졌다. 이윽고 나를 품에 끌어안은 아스레인은 뒷머리를 다정히 쓸어 주며 말했다.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주마.”

온몸을 감싸 오는 그의 체취에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지금껏 그의 인생에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점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고, 영원히 마음이 닿지 않아도 운명이라고 단념했다. 하지만 그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진중한 목소리가 남긴 그의 고백은 언젠가 다가올 마지막까지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정말 좋아해요.”

영원히 그의 기억 속에 나는 살아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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