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최악의 타이밍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한밤중의 밀회처럼 숨길 일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이카로스와 친하게 지내길 바란 쪽은 아스레인이었다. 그래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면 언제나 그러했듯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봐 줄 줄 알았다. 하지만 라비린토스의 눈보라보다 냉랭한 눈빛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카로스에게서 떨어졌다.
“오, 오셨어요?”
말은 또 왜 더듬었을까. 뒤늦게 당황을 숨기려 활짝 미소를 지었건만, 오히려 역효과가 일었다. 대놓고 흔들리는 동공에 어색한 말투까지- 누가 봐도 은밀한 순간을 들킨 작자였다. 금세 어색한 흐름을 눈치챈 닉스는 겨우 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뭐야. 뭐야. 우리가 눈치 없이 방해한 거야~?]
“네?! 그럴 리가요.”
[그럼? 왜 그렇게 당황하는데?]
활활 타오르는 불을 수습해주지도 못할망정 닉스가 대차게 기름을 들이부었다. 이젠 아스레인이 어떤 표정인지 흘겨보기도 두려웠다. 차라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태연하게 반길 걸 그랬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사달이 나지도 않았겠지만.
“누가 당황했다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
이윽고 닉스는 ‘안 그래?’라고 속삭이며 아스레인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하지만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돌이 된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이 광경을 마주한 게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물론 높은 확률로 아니겠지만, 아스레인이 화낼 이유는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흘끔 눈치를 살피자 아스레인은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내를 읽을 길이 없어 착잡한 목소리로 사실을 불었다.
“별일 없었어요. 그냥… 이카로스랑 같이 저녁을 먹었어요.”
[잠깐. …태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네?”
[저 고지식한 놈이랑 얼굴을 마주 보고 식사를 했다고?]
의심으로 물든 적안이 슬그머니 이카로스에게로 향했다. 바른대로 말하라는 눈짓에도 이카로스는 멀뚱히 식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랜 침묵이 지나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닉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심이야?]
“기왕이면 함께 먹지 않겠냐고 부탁했던 거예요.”
[허, 신기하네. …근데 무슨 얘기했어?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들리던데.]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스레인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심지어 오늘 막 통성명을 한 이카로스에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고백까지 털어놓았다. 그걸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재빨리 잔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생각하는데, 예상외의 목소리가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만하지.”
줄곧 침묵을 지키던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코앞에서 장난감을 놓쳐 아쉬운지, 닉스는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왜?]
“태오가 곤란해하잖나.”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뭐가.”
[태오와 관련된 일이라면 당신이 제일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운 한편, 더 이상 내게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것 같아 서운했다. 어째서 아스레인의 배려에도 썩 기쁘지 않은 지경까지 와 버린 걸까. 안될 걸 알면서도 내심 아스레인이 제멋대로 행동하길 기대하고 만다. …그에게 가장 힘든 일이 선을 넘는 거란 걸 알면서도.
어색하리만치 휑한 분위기를 끊은 쪽은 다름 아닌 이카로스였다.
[만약 당신께서 궁금해하신다면, 제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저 마물이 대체 뭐라는 거야!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기에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식탁 한가운데에 폭탄을 던져 버렸다.
“자, 잠깐만요.”
화들짝 놀라 다짜고짜 이카로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몸을 숙인 이카로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한폭탄 심지에 불을 붙인 마물치고는 퍽 순진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이유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우리가 한 얘기는 비밀로 해 주세요.”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여러모로 사생활이잖아요. 네? 부탁이에요. …이카로스.”
성적으로 끌리니 뭐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간 닉스에게 평생 놀림감이 될 것이다. 한참 동안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이카로스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괜한 소리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닉스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훨씬 음흉해졌다.
[이걸 어째? 영감. 이거… 오해가 아닌가 봐.]
“…….”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이러다가 뺏긴….]
“됐네.”
닉스가 한창 열심히 말하는데, 아스레인이 가차 없이 말허리를 잘랐다. 이내 창백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에게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평소라면 곧장 컨디션을 물어봤을 테지만, 그조차도 녹록지 않은 분위기였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태오.”
“네, 네!”
“적당히 치우고 일찍 잠들게.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아…. 그럴게요.”
할 말을 마친 아스레인은 곧장 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에 일말의 망설임 따위 없었다. 그를 붙잡지 못하는 내게만 미련이 남을 뿐. 역시 아스레인은 아무렇지 않다. 내가 누구와 있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질투를 한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어쩌면 아스레인이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도 단순히 착각이 아닐까? 애초에 그 마물에게 감정을 깨우쳐 주겠다는 자신감이 터무니없는 자만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그에게는 그저 잠시 쉬어 갈 만한 쉼터가 필요했던 거라면….
[재미없네.]
코웃음 치는 소리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생각의 흐름이 뚝 끊겼다. 고개를 휙 들어 올리자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선 닉스가 보였다. 아스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흘겨보는 눈빛에 지루함이 한껏 드러났다.
“닉스 님도 일찍 쉬시는 게 좋겠어요. …늦게까지 일하셨잖아요.”
[괜찮아~ 딱히 힘들지도 않은데, 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부탁한 일 말인데.]
“…시지프의 기억이요?”
[그래. 그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그나마 시지프 사건이라도 정리된다면 복잡한 머릿속이 잠잠해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지만, 기대처럼 결과가 썩 명료하진 못했다.
[네 말대로 ‘영생의 불’이란 단어를 기억 속에서 찾아내긴 했어. 하지만 중요한 단서는 없었어.]
“역시…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인가요?”
[응. 대신 그 덕분에 다른 정보를 얻었지.]
잠시 뜸을 들인 닉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놈이 미쳐 버린 이유가 바로 그 ‘영생의 불’ 때문이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듯 ‘영생의 불’이 놈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부숴 놓은 거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죗값이지.]
자연스럽게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신탁의 일부가 클라우스의 목숨을 좌우한 것처럼 시지프에게도 제약이 걸려 있었다. 단지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바람에 일순 본인조차 계약을 잊은 듯했다. 다행히 클라우스와 같은 길을 걷진 않았지만,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 지금으로선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법이었나요?”
[표면적으로는 그래.]
의미심장한 말에 인상을 찌푸리자 닉스는 차디찬 미소를 흘렸다.
[보통 마법을 쓰면 마력의 잔재가 남아. 그건 알지?]
“네. 그걸로 마법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힘을 쓰면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되어 있지. 그런 논리에서 신력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그 시지프란 놈의 기억 속에서 신력이 느껴졌어.]
“…신력이라니….”
처음 시지프를 만났을 때 희미하게 느껴진 신력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어째서 마물을 연구하는 그에게서 신력이 느껴지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 그가 신을 믿고 따라서가 아니라, 누군가 그의 정신에 쐐기를 깊게 박아 놓았다는 사실을.
신의 개입인가? 아니면, 기도의 힘인가. 아무렴 닉스의 어깨에 창을 꽂은 사제와의 연관성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소리 친 것치고는 딱히 도움은 못 됐네.]
“아니에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물마다 가진 기운이 다르듯 신력도 미세하게 다르다. 비록 마력에 비하면 특징이 흐릿하지만, 몸소 접했으니 구분할 수 있다. 클라우스 때처럼 꼬리 자르기에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시지프에게서 느껴진 신력과 비슷한 기운을 찾아 배후를 추려낼 수 있다.
나라면…. 아니, 헤메라라면 가능하다.
“있잖아요. 이카로스.”
대뜸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혹시 ‘영생의 불’이라고 들어 봤어요?”
[뭡니까? 그 인간이나 좋아할 법한 허황된 망상의 결정체는.]
“아, 아니에요.”
다짜고짜 튀어나오는 신랄한 표현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킥킥 웃던 닉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너희 교수님도 생소한 반응이었어.]
“철저히 인간 사회에서만 퍼졌나 보네요.”
[말했잖아. 영생을 바라는 족속은 인간뿐이라고.]
영원한 삶. 곱씹어 볼수록 종교에서나 들어 볼 법한 표현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삶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감히 넘볼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죽음 이후에 신의 곁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하지만 시지프가 말하는 ‘영생의 불’은 사후 세계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럼 내가 모르는 흑막은 무려 신에게만 허락된 권한을 훔치려는 건가.
[…때문이야?]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귓가로 닉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네?”
[나의 헤메라가 이렇게 기운 없는 이유가 영감 때문이냐고.]
애써 미뤄 둔 문제가 떠오르는 바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올라왔다. 너무도 그리운 행동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원하는 이의 손이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까부터 피곤하다고 그랬거든.]
“그랬군요….”
나한텐 그런 말 안 했는데. 아니, 애초에 힘든 내색은 안 했었지. 이번에도 내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인가? 아니면…….
“먼저 방으로 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내가 못 미더워서인가.
***
힘없이 문을 열어 고요한 달빛이 비추는 방으로 들어갔다. 랜턴에 불을 붙일 생각도 않고 곧장 침대에 걸터앉았다. 축 늘어진 어깨 위를 짓누르는 짐이 오늘따라 무겁게만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숨을 내쉬니 바닥이 늪처럼 몸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간극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아스레인은 피하지 않고 마주해 줄까? 나를 결코 혼자 두지 않으리란 확신이 이제는 입김보다도 흐릿해졌다. 불안하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서랍이 놓인 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지하실에서 도망친 시지프의 수하인가 싶어 곧장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숨은 그림자가 생각보다 위협적이라 본능적으로 필리스 줄기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왜….”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왜 여기 있어요? …아스레인.”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아스레인은 창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윽고 어스름한 달빛이 드리운 얼굴은 어째 어제보다 수척해 보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자네에게 줄 게 있어서 기다렸네.”
저벅저벅 다가온 아스레인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은 다름 아닌 귀걸이였다. 재차 마력을 불어넣은 듯 마석은 전보다 훨씬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따스한 빛을 보고 있자니 칙칙한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잃어버린 귀걸이를 돌려준다는 건, 내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드디어 아스레인이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게 분명하다고- 그리 생각하며 기쁘게 받아든 순간이었다.
“버려도 좋네.”
“…네?”
“자네를 지키고자 준 물건이었지만, …결국 상처를 입히고 말았으니.”
싸늘한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버려도 좋다니. 무엇을? 당신의 호의를? 아니면, 귀걸이를 받고 기뻐했던 나의 추억을? 물론 악의 없이 한 말임을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떤 말도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이제와 찬란한 마력이 깃든 귀걸이가 무슨 소용인가. 제일 중요한 의미를 상실했는데.
“태오.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았어요. 버리든 갖고 있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귀걸이를 세게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마석의 감촉이 칼보다도 날카롭게 느껴졌다. 다시금 침대에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세요.”
질끈 눈을 감으니 거센 파도에 올라탄 듯 속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가차 없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얌전히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서서히 멀어져가는 발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즈음, 바로 앞에서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군.”
또 사과한다. 또. 내가 무엇에 속이 상했는지는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르겠지. 내가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세계를 위해 감정을 버린 마물임을 알면서도, 그걸 감수하고 모든 면모를 사랑하기로 했으면서도… 왜 이렇게 아스레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린 애처럼 서운한 걸까.
“대체 아스레인이 미안할 게 뭐가….”
답답한 마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스레인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딱딱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태오.”
절대자라고 불리는 자가, 수많은 생명에게 칭송받는 자가 고작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대로 내 안색을 살피는 눈동자는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이내 고개를 툭 떨구며 입술을 깨문 그의 목소리엔 진득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