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 (153/305)

#153

그리 순수한 부러움은 아니었다. 봉인에서 막 깨어난 이를 보듬어 주지 못할망정 질투나 하고 있다니, 바보 같은 짓이다. 정작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카로스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그가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말을 돌렸다.

“아, 맞다. 저도 모르게 이름으로 불러서 미안해요.”

[…딱히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반응을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다. 딱딱한 말투에 닉스의 말마따나 융통성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카로스와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나와 이카로스 둘 다 아스레인을 따르고 있고… 그것만큼이나 좋은 공통 화제는 없지 않은가.

“저는 태오라고 해요. 언제든 편하게 불러 주세요.”

생글 웃으며 악수를 권하자 이카로스는 내 손을 흘겨보며 말했다.

[부를 일이 있을까 싶군요.]

악의 없는 말이 정곡을 찔러 무안해진 손을 슬그머니 거뒀다. 그 후로 이카로스가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기에 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로 내려오니 아스레인이 광장 근처 레스토랑에서 사다 놓은 수프가 보였다. 나 때문에 굳이 레스토랑에 들려서 음식까지 사 와 놓고 얼굴 한 번 마주쳐 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딱딱한 나무 식탁에 홀로 앉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혼자 하는 식사는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했다. 오히려 누군가와 겸상하는 것보다도 홀로 책을 보며 끼니를 때우길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둥그런 식탁이 너무도 넓게 느껴졌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아무리 떠먹어도 온몸에 감도는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얼마 먹지도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후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고 별짓을 다했다. 집 안 곳곳을 청소하고, 서리가 붙은 창문도 깔끔하게 닦았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는 간단히 먹을 빵을 사러 외출도 다녀왔다. 그나마 순록을 빌렸던 가게에 들러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확인한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니 여전히 휑하기만 한 거실이 반겨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무심코 연구실에 들어갈 때의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어차피 인사를 받아 줄 사람도 없는데.

쓸쓸하게 로브를 벗고 부엌으로 들어가 빵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낮에 먹다 남은 수프와 곁들이려고 했는데, 반나절 사이에 수프가 서느렇게 식었다. 막상 데우려고 부엌을 둘러보니 큰 냄비는 높은 선반 속에 처박혀 있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부엌을 방치한 거야…?”

그래도 태자의 소유물이라고 꾸준히 청소라도 해 놔서 다행이었다.

자그마한 상자 위에 올라가 손을 뻗자 선반에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았다. 그러나 정작 꺼내야 하는 냄비엔 손끝조차도 스치지 않았다. 아무리 훤칠한 북방 사람들을 기준으로 부엌을 짜 놨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딱 한 뼘만큼 모자란 높이에 의자라도 가져올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이겁니까?]

까,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이카로스가 서 있었다. 어느 틈에 인기척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자 이카로스는 불쑥 냄비를 내밀었다.

[필요한 물건이 이거 아니었습니까?]

슬쩍 찌푸려지는 미간을 보곤 곧장 두 손으로 냄비를 받아들었다.

“아, 맞아요. 고마워요.”

딱히 부엌이나 내게 용건은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쉬는 중에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서 내려와 본 모양이다. 냄비 뚜껑을 열어 안을 닦으면서도 연신 이카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너무 시끄러웠죠….”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무리하지 마십시오.]

“네?”

[당신이 다치면, 그분께서 공연히 힘을 써야 합니다.]

그건… 그렇지. 무덤덤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은근히 정곡을 찔렀다. 평소라면 겸허히 받아들였을 조언도 오늘따라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괜히 풀이 죽어서는 힘없는 손으로 수프를 냄비에 옮겨 담았다.

그때까지도 이카로스가 방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아직도 할 말이 남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걸 옮기면 됩니까?]

“…뭐가요?”

[손을 빌려주겠단 말입니다.]

태풍에 휩쓸린 짚단처럼 너무 축 처져 있었나. 내 안색 따윈 전혀 살피지 않을 것 같은 이카로스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냥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그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카로스가 곁에 있어 줬으면 했다.

냉큼 국자를 꺼내어 이카로스에게 건네었다.

“늘러 붙지 않게 저어 주세요.”

[…….]

처음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던 이카로스는 생각보다 순순히 수프를 저었다. 그 사이 호밀 빵을 먹기 좋게 잘라 두고 테이블 양끝에 수저를 두었다. 얼마 있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수프를 두 그릇에 나눠서 담으니 이카로스가 테이블을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누군가 오는 겁니까?]

“아뇨. 이건 이카로스 몫인데요….”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맞은편에 앉았으나, 이카로스는 불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아, 혹시 육식만 하시는 건가요?”

[아뇨. 굳이 인간의 음식을 먹고 싶지 않습니다.]

곧장 걸음을 돌리는 뒷모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요리를 도와준다기에 당연히 식사를 함께해 줄 줄 알았는데, 나 혼자 김칫국을 들이켰나 보다. 착각해서 민망하기보단 또 혼자 식사를 해야 한단 생각에 속이 상했다.

결국 덩그러니 놓인 그릇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그냥 앉아만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요?]

“네. …이카로스가 있어 주면 고마울 것 같아요.”

실은 누구라도 있었으면 했다. 닉스도, 아스레인도 아무도 곁에 없다는 느낌이 드니 문득 외로움이 사무쳤다. 이상하게도 아늑한 집 안에서 꼭 설원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 먹을게요. 그러니까….”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얼버무리던 그때, 맞은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서로 다른 색을 가진 한 쌍의 눈과 마주쳤다. 그 이카로스가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됐습니까?]

“…고마워요.”

이윽고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만찬이 시작되었다. 고작 빵과 수프뿐이었지만, 심지어 이카로스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수프를 반 정도 먹어 갈 즈음에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왼쪽 눈은 어때요?”

가차 없이 무시할 줄 알았으나, 이카로스는 선뜻 대답해 주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보이긴 합니다.]

“다행이네요. …아스레인이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말주변이 없는 이카로스가 스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그래도 요리를 도와준 것도 모자라 사적인 질문에 대답해 준 걸 보면, 나를 심하게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이카로스도 흥미가 있을 법한 소재를 꺼냈다.

“예전에 아스레인은 어떤 분이었어요?”

[그걸 왜 말해 줘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만 저는 모르거든요. 당시에 아스레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 물론 지금도 대단하지만요.”

처음엔 질문을 단칼에 잘라 낸 이카로스도 내심 아스레인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빛바랜 과거를 회상하는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간의 모습이지만, 당시엔 금빛으로 물든 원형으로 계셨기에 항상 코카서스 산자락에 계셨습니다.]

“와아, 저도 꼭 원형을 보고 싶었는데…. 엄청 아름답겠죠?”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고민하지도 않고 단언하는 걸 보니 또 다시 부러워졌다. 이윽고 이카로스는 아스레인의 과거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잘린 뿔에 대한 단서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구석구석에서 아스레인을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흡사 위인전 같은 이야길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 시절 아스레인을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수프를 한 입 떠먹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네?”

[그분을 좋아하는 겁니까?]

“푸흡!”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지독하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내내 물음표가 떠다녔다.

“네, 네?”

[그러니까 성적으로 끌리는….]

“으악…!”

냅다 귀를 틀어막자 이카로스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스레인을 좋아해? 그냥도 아니고 엄청 좋아하지.

성적으로 끌리냐고? 지금껏 몇 번이나 이성을 시험당했는지 모른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만나서 대화한 지 얼마 안 된 이카로스가 내 감정을 바로 알아채 버렸다. 정작 당사자는 아직까지 눈치도 못 챘는데…!

“그… 그러니까 여러 의미로 좋아하죠. 네.”

[그렇군요.]

담담한 반응이 도리어 무섭게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를 닦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많이 티가 나나요?”

[그런 노골적인 표정을 보고도 모르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하하….”

내가 너무 히죽거렸구나. 주변에 딴죽을 거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정작 본인은 몰라요.”

[알 리가 없습니다. 그분께는 오래 전에 도태된 감정이니까요.]

“아스레인도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소중한 걸 포기해야만 했다고.”

처음으로 아스레인이 내면을 드러냈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깊게 사무친 고독을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짊어진 짐을 생각하면 결코 외로움과 떨어질 수 없지만, 나는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같이 알아가기로 했어요. 물론 그 때문에 이카로스는 저를 싫어하겠지만….”

[제 감정은 당신이 좋아하는 대상과는 상관없습니다.]

“하, 하지만 아스레인을 좋아하잖아요?”

[전 그분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게 아닙니다.]

이카로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분의 앞날에 당신이 걸림돌이 될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정녕 그분의 편이 되고 싶다면, 인간이 아닌 마물이 되십시오.]

“…마물이요?”

[당신이 마물의 편에 선다면… 그분께서 이 땅에 통치하시기에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정말 이카로스의 말대로 마물이 살기 편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균형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저는 인간과 마물 사이에 서서 그 짐을 덜어 주기로 했어요.”

[고작 인간이?]

“오직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엷은 미소를 짓자 무뚝뚝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졌다.

“있죠. 이카로스…. 최근 들어 아스레인은 서서히 변해 가고 있어요. …외로움을 느끼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죠. 마물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 못한 변화일 거예요. 그들에게 필요한건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절대자이니까요.”

그래서 아스레인은 기대에 걸맞게 자로 잰 듯 완벽한 균형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 자신도 ‘그 마물’이라 칭송받는 삶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내게 그저 한 사람일뿐이에요.”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아스레인은 꽤나 지쳐 있었다.

오래 전, 그는 연구실에서 스치듯 ‘편히 쉬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와 달리 이젠 진정한 속뜻을 안다.

‘기도를 받기만 하는 존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한 저의도 전부 이해한다. 그런 아스레인이 조금이나마 짐을 덜기 위해선 알려 줘야만 했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아스레인에게 감정을 알려 줄 생각이에요. 언젠가 평범하게 남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의 단 하나뿐인 바람을 들었으니, 나로선 소원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난 이카로스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둘 다 누구보다 아스레인을 위하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서로의 방법으로 그를 위해 주자고요. …적이자 동료로서.”

그 후로 한참동안 이카로스는 말이 없었다. 나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카로스의 주변에 날카롭게 떠다니던 경계심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단 사실이다.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요. 뒷정리는 제가….”

그만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카로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 안 먹었습니다.]

“네?”

순간 넋이 나간 나머지 말뜻을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의 음식은 안 먹겠다고 단언한 이카로스가 마음을 바꿨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결의에 어떤 바람이 불어온 건 확실했다. 무뚝뚝한 교수님에게 뜻밖의 A학점을 선물받아도 이보단 기쁘진 않을 것이다.

“저, 정말 먹어 줄 거예요?”

서둘러 의자를 끌어다가 가까이 앉으니 이카로스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그러곤 두툼하게 썰린 감자를 어설프게 수저로 들어다가 입에 집어넣었다. 꼭 도구를 처음 쓰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지금은 그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어때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묻자 이카로스는 미간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식감이… 진흙 같습니다.]

“하하, 너무 오래 끓여서 그런가?”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이카로스는 수프를 남김없이 비웠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며칠 간 있었던 노고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예 턱을 괴고 상체를 기울인 채 이카로스가 식사하는 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먹기 힘들면 그만 먹어도 돼요. 이카로스.”

입꼬리가 찢어져라 헤실헤실 웃던 그때였다.

[이야~]

능글맞은 감탄사에 뒤를 돌아보니 닉스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둘이 벌써 많이 친해졌나 본데?]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건, 단단히 표정이 굳은 아스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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