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 (152/305)

#152

어떻게든 오해를 풀 자리를 마련하려 했으나 무참히 실패했다. 그대로 집을 떠난 아스레인은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쁜지, 그날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탓에 아침이 될 때까지 멍하니 벽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장렬하게 불타 으그러지는 장작이라도 되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무색하게 지나 결국 새로운 해를 뜬눈으로 맞이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마치 답답한 내 심정처럼 눈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잠을 깰 겸 비척거리며 일어나 찬물로 씻다가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뒤늦게 수면에 비친 얼굴을 본 후에야 알아챘다.

“어…?”

아스레인이 선물해 준 귀걸이가 없다. 심지어 단 한 번도 귀를 안 뚫어 본 사람처럼 귓불의 흔적까지 말끔하게 사라졌다. 찢어진 상처를 치료해 주느라 흉터가 사라진 건 그렇다 쳐도 소중한 귀걸이를 잃어버린 건 낭패였다.

아니, 정말 잃어버린 게 맞긴 할까.

이상하게도 라비린토스에 두고 온 히페리온의 팔찌는 손목에 있었다. 시지프에게 잡혀 갈 때 떨어뜨린 필리스 줄기를 아스레인이 주워다 돌려준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귀걸이만 예외였다. 일 처리가 철저한 아스레인이 시지프의 수중에 있는 귀걸이를 빠트릴 리가 없는데.

결국 일부러 돌려주지 않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낀 건가? 내겐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 순간부터 자네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지. 다들 내게 기대려고만 하는데, 자네는 점점 홀로 서려고 하니… 도리어 더 관심이 가는 걸지도 모르겠군.’

도서관에서 아이리스와 부딪친 사건 후, 아스레인은 귀걸이를 선물하며 무슨 일이 있거든 자신을 불러 달라고 했었다. 나를 배려해 주는 마음과 조심스레 다가오는 손길에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건 증표였다. 아스레인이 처음으로 내게 마음을 드러낸 증거.

하지만 이젠 없다. 마치 한낮에 꾼 꿈처럼 내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이 전부 사라졌다.

“…다시 돌려 달라고 하면….”

너무 구질구질하겠지.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는걸.

씁쓸한 기분을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방에 없어서 외출이라도 했나 싶었어.]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닉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어제 뺨에 입을 맞춘 일로 소란을 피웠겠지만,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아 고개만 살짝 숙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왜 그래? 기운이 없네.]

닉스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아, 혹시 어제 영감이랑 싸웠어?]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조용한 하루였다. 차라리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데, 얼굴을 마주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럴수록 아스레인이 나와 대화하길 꺼려 하고 있다는 현실만 다가올 뿐이었다. 깊게 생각할수록 우울감만 커질 것 같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궁금해 할 법한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어.]

“무슨 소식이요?”

[이카로스 말이야.]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카로스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 다행히 생글생글 웃는 닉스의 얼굴을 보니 나쁜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들려올 소식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깨어났어요?”

[역시 눈치 빠르네. 위층에 영감이랑 같이 있어.]

“잘됐네요. 그럼….”

반가운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의아함이 일었다.

“잠깐만요. …아스레인이 집에 왔어요?”

[아까 왔을걸? 마법진으로 오가던데?]

아…. 집 안에 있는 마법진을 이용했구나. 그래서 문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스레인을 마주치지 못한 거였다. 설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그런 걸까? 마주치기 힘들어서? …아마도 아스레인이라면 ‘나를 위해서’ 일부러 마법진을 이용한 거겠지.

진상이 무엇이든 이제야 이유가 알게 되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간밤에 벽난로 앞에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내가 왠지 우스워졌다. 혹시 나 때문에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건가, 싶은 걱정마저 전부 허무해졌다.

“…바보 같은 짓을 했네.”

[응?]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러 가도 돼요?”

[물론이지.]

닉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니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아스레인의 방이다. 이 안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카로스가 있다. 성격은 둘째치고 인간에게 우호적인지도 몰라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주춤거리던 찰나, 문 너머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왜 그런 사정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냐는 말입니다.]

…싸우는 건가? 당황한 나머지 노크도 생략하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그러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두 마물이 보였다.

“구태여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네.”

[적어도 제게 만큼은 귀띔해 주실 수 있던 것 아닙니까.]

한창 감동의 재회를 할 줄 알았는데, 때아닌 말다툼이 오고 갔다.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쪽은 이카로스였고, 아스레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심지어 나와 닉스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껏 날이 선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카로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부담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불같은 다홍빛 눈동자가 아스레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저돌적인 모습에 저절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 닉스에게 들은 대로 사 형제 중 막내인 이카로스는 못 말리는 응석받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진중한 말투에 가차 없는 언행은 편견이 만들어 낸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저희가 짐처럼 느껴진 건 아닙니까?]

“그런 적 없네.”

[항상 말은 그리하셨죠.]

“…진정하게.”

[상당히 진정한 상태입니다만, 제가 화난 것처럼 보이십니까?]

점차 언성이 높아지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앞섰다. 하지만 닉스가 한발 빨랐다. 팔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은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니야.]

“네?”

[저러다 괜찮아질 거야. 항상 그랬거든.]

“매번 저렇게 싸웠어요?”

[저건 싸우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한 번도 아스레인이 언쟁에서 이긴 적이 없어.]

항상 아스레인이 졌다고? 그간 말로 상대를 간단히 억누르는 아스레인을 보며 당할 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잠자코 지켜보니 이카로스가 팔짱을 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또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셨겠죠. 늘 그렇듯.]

“뭘 그리 단정 짓는 건가.”

[당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저니까요. 제가 틀렸습니까?]

“아니. …자네 말이 맞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니 이카로스는 아스레인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스레인을 혼낼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새삼 신기하다가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따끔했다. 마땅히 기뻐해야 할 재회인데, 그토록 바라던 모습인데 선뜻 잘됐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썩 달갑지 않은 감정의 이름을 찾다가 먼지 쓴 상자 안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봤지? 저 둘이 금방 화해한다고 말했잖아.]

질투.

우습게도 나는 이카로스와 아스레인의 사이를 질투하고 말았다. 저 둘의 유대에 내가 끼어들 틈 따윈 없는데.

[왜 그래?]

“…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아뇨. 그냥….”

부럽다. 그들의 유대가, 그들이 지내 온 시간이. 내가 모르는 아스레인의 모습을 이카로스는 알고 있겠지. 그러니 저리도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언젠가 나도 저 간극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니, 영원히 못 따라잡을 것이다.

필멸자인 나는 반드시 사라지고, 그들은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태오!]

닉스의 목소리에 일순간 고요가 찾아왔다. 짧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한 번 우울함에 빠져들면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는 버릇이 또 튀어나오고 말았다.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지만, 닉스는 여전히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네.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아닌데…. 그냥 내려갈까?]

“괜찮아요. 잠깐 피곤해서 그랬어요.”

두 손을 저으며 따가운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이카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옆얼굴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는 양쪽 눈 색이 달랐다. 불꽃 같은 다홍빛을 띠는 오른쪽 눈과 달리 왼쪽 눈은 채도 없는 회색이었다. 신력으로 인해 뼈만 남은 날개의 영향인가 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오묘한 분위기에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날렵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인간은 뭡니까?]

“아, 소개가 늦었군.”

자연스럽게 사이에 끼어든 아스레인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제자인 태오라고 하네.”

[…제자?]

“음. 태오 덕분에 자네를 구할 수 있었네.”

물론 중요한 일은 전부 아스레인이 했지만…. 약간의 과장이 곁들인 소개 덕분인지, 이카로스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윽고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이카로스는 퍽 딱딱한 투로 말했다.

[구해 줘서 감사합니다.]

“뭘요. 이카로스.”

생각보다 선뜻 인사를 해 주기에 나도 모르게 친근한 태도로 반겼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름을 허락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아…! 함부로 불러서 죄송해요.”

완벽한 선 긋기였다. 너무 친한 척을 한 것 같아 무안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바탕 웃어 대던 닉스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귀염성 없지?]

“하하…. 초면이잖아요.”

[초면이 아닌 나한테도 저래. 융통성은 또 얼마나 없는지. 가끔 대화하다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니까?]

닉스나 이카로스나 속에 있는 말을 참는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상성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이카로스가 닉스의 장난을 선뜻 받아 주지도 않을 테고. 지금도 대놓고 험담을 하는데 이카로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레인이 나서서 이카로스에 대해 대신 변호해 주었다.

“말주변은 없지만, 그리 나쁜 아이는 아니네.”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역시나 닉스는 한쪽 귀를 후비며 흘려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자리를 비우겠네.”

[왜 더 오래 안 있고?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

“오늘 오후에 태자의 부대가 도착한다더군. 그러니 미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끝내야지.”

순간 나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 일 때문이었지만. …일 때문이 맞겠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배짱은 없었다.

문을 향해 걸어오는 아스레인을 위해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뭔가 잊은 거라도 있는 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심한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정면을 응시하던 아스레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당히 먹을 것을 사 왔으니, 거르지 말고 챙기게.”

아…. 나한테 하는 말이구나.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몰랐다. 아니, 아스레인은 나와 마주하길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역시 나 때문에 자리를 떠나는 게 맞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싫어도 아스레인의 태도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는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다행히 그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심한 금안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아스레인. …할 말이 있어요.”

어째서 내 시선을 피하는 거죠? 어제의 내가 당신을 무서워해서 그런가요? 혹시 귀걸이는 어디 있어요? 당신이 갖고 있나요? 그럼 돌려주지 않는 이유는 뭔가요? 이제 당신의 물건을 가지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니면, 그것도 나를 위한 배려인가요?

무수한 질문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니 아스레인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들어도 되겠나?”

“아…. 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놔주었다. 한 마디면 되는데, 그 한 마디가 어려워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나를 구하러 온 아스레인을 보고 두려워한 내 잘못이 크다. 어제 그의 손길을 무의식중에 피했을 때, 금안에 얼핏 스쳐 지나간 감정은 후회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상처 입혔다. …내가.

“닉스.”

[뭐야?]

“동행하지.”

[내가 왜?]

갑작스러운 아스레인의 말에 닉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태오랑 있을 건데?]

대번에 제안을 거절한 닉스는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웃었다. 곧바로 아스레인의 미간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부터 그는 닉스가 내게 달라붙는 걸 싫어했다. 아니, 닉스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와 있어도 싫은 내색을 보였다. 그래서 사이를 갈라 놓거나 조용히 다가와 제 쪽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은근히 기분 좋으면서도, 내가 아스레인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음대로 하게.”

아스레인은 그대로 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가차 없는 뒷모습은 내게 있어서 선고와 같았다. 힘겹게 좁혀 놓은 관계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분명… 아스레인은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에휴, 진짜 피곤하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다녀올게. 태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닉스까지 보내고 나니, 방 안엔 냉랭한 한기가 맴돌았다. 이카로스와 단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함께 하기에는 이카로스가 뭘 주식으로 하는지 몰랐다.

멋쩍게 눈치를 살피는데, 이카로스가 대뜸 물었다.

[당신입니까?]

“네?”

[그분께서 변하신 이유 말입니다.]

“…변하다뇨?”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이카로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막 깨어난 저를 ‘걱정’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사로운 감정을 느끼는 인간처럼.]

“원래 아스레인은 걱정이 많아요. 소중한 당신을 걱정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고요.”

[아뇨. 단 한 번도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는 분입니다.]

“아스레인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혼자 감내해 왔을 거예요.”

[이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저 곁에 머무는 걸 허락받은 것뿐이죠.”

누구보다 아스레인을 위하는 이카로스이기에 대화가 잘 통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아스레인은 ‘균형을 이루는 자’였다. 완벽한 절대자를 원하는 이카로스에게 나는 옥에 티쯤으로 보일 것이다.

예상대로 이카로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당신이 싫습니다.]

“…하하, 솔직해서 좋네요.”

괜히 속내를 숨기던 시지프를 상대하다가 이카로스를 만나니 속이 후련할 지경이었다. 설마 싫다는 사람에게 웃어 줄 줄은 몰랐는지, 이카로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당신이 부러워요. …이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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