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 (151/305)

#151

두려웠다. 그의 화가 불꽃처럼 내게 튈까 봐서.

성난 불이 결코 나를 태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지키기 위해 타오른 불인 걸 알면서도 혹여 옷자락에 불씨가 옮겨붙을까 몸을 움츠렸다.

본능은 끊임없이 내게 도망치라 말했으나 내 선택으로 아스레인의 곁에 남았다. 그 덕분에 사랑하는 이의 손에 불필요한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언젠가 시지프를 죽이지 않아서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또다시 그 순간에 놓이게 된다면, 나는 몇 번이고 아스레인을 말릴 것이다. 무수한 생명을 지켜 온 그의 노력을 나로 인해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아득한 밤이 펼쳐졌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 때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밤이 눈앞을 드리웠다. 능선처럼 유려한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아직도 꿈속인가?

슬며시 손을 뻗으니 거미줄의 형태로 남은 흉터가 만져졌다. 이윽고 손끝에 달라붙는 검은 아지랑이를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숨을 들이쉬며 상체를 일으키자 재빠른 팔이 어깨를 붙잡았다.

[일어났어?]

부드럽게 휘어진 선홍빛 눈이 퍽 매혹적이었다.

“니, 닉스 님이 여긴 어떻게….”

[축제에 내가 빠지면 서럽지~]

“…축제요?”

아. 순식간에 참혹한 현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절망을 탐하는 자, 닉스로선 지하실만 한 만찬이 달리 없을 것이다. 하나같이 아스레인의 마력에 억눌려 두려움을 토해 냈으니 닉스가 이끌려 올 만도 했다.

[몸은 어때?]

“조금 몽롱한 것만 빼면 괜찮아요. 얼마나 지났어요?”

[정확히 이틀이야. 어쩜 자는 모습도 귀엽더라.]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니 왠지 안심이 됐다.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니 제법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설원의 시작점, 라호 마을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아무래도 여관보다는 태자 소유의 집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졌다.

“아스레인은요?”

[어라, 이제 교수님이라고 안 부르는 거야? 난 그 호칭 꽤 좋았는데.]

작게 키득거린 닉스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네가 자는 사이에 깨끗하게 치료해 주고 갔어.]

“아…. 그럼 지금 어디 있어요?”

[아마도 지금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눈을 굴리는 모습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올까 내심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닉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반성 중일걸?]

“반성…이요?”

[그런 거 있잖아. 말 안 들어서 혼난 애들이 혼자 벽 보고 있는 것처럼.]

잘못은 시지프가 했는데, 어째서 아스레인이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아스레인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그가 버젓이 걱정할 걸 알면서도 단서를 찾겠답시고 무모한 짓을 했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스레인이 반성까지 할 이유가 있어요?”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지.]

하! 닉스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물이 전부 들고 일어났거든.]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이 툭하니 벌어졌다.

마물이 들고 일어났다니… 폭주했다는 건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이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기조차 두려웠다.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자 닉스는 친절히도 설명을 이었다.

[가호를 받고 태어난 마물들은 좋든 싫든 그와 연결되어 있어. 그가 기뻐하면, 마물도 행복해하고… 그가 슬퍼하면, 마물도 눈물을 흘리지.]

“설마 아스레인의 모든 감정에 반응하는 건가요?”

[다행히 일일이 반응하진 않아. 게다가 원체 감정 변화가 없는 작자니까 그동안 다들 평탄하게 살았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반응하는 감정은 따로 있어.]

닉스의 말대로 아스레인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다.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기쁨이나 슬픔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날, 아스레인에게선 또렷한 감정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분노군요.”

[맞아. 그 때문에 온 대륙에 있는 마물이 다 같이 이성을 잃었지.]

“그런….”

[정말이라니까? 나는 그 고리타분한 영감이 드디어 인간과 전쟁할 마음이 생긴 줄 알았어. 그래서 쌍수를 들고 달려왔더니만, 웬 쓰레기들만 가득하잖니. 게다가….]

부드러운 손길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의 귀여운 헤메라까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지.]

장난기 없는 눈동자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는데, 얼마나 피해를 끼친 건지 모르겠다. 문득 눈앞이 아찔해져서 고개를 숙인 채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마물들은 어떤가요?”

[다행히도 별 탈 없이 진정됐어. 오케아노스와 히페리온이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이지.]

“제가, …제가 괜히 누를 끼쳤네요.”

[그게 왜 네 탓이니? 그 나이 먹고도 감정 조절 하나 못한 영감 탓이지.]

닉스가 농담조로 분위기를 풀어 주는데도 마음이 도통 편해지지 않았다. 아스레인을 걱정시킨 것도 모자라, 다른 마물들을 귀찮게 하다니. 만약 이성을 잃은 마물들이 마을을 덮쳤다면… 지금쯤 어찌되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자 닉스가 검지로 미간을 꾸욱 눌렀다.

[뭐, 그래도 이번만큼은 이해해. 나도 순간 눈이 돌아갔거든. …이 작은 몸에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닉스 님….”

[역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걸 그랬어.]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웃어 주긴 하는데, 서슬 퍼런 눈동자는 전례 없이 살벌한 빛을 띠었다. 불안한 마음에 혹시나 싶어 그의 반응을 떠보았다.

“자, 잠깐만요. 설마….”

[아직 살아있어.]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도닥였다.

아직 빼낼 정보가 남아 있는 한, 시지프는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 클라우스처럼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영영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게 두진 않을 것이다.

[어때?]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으니 닉스가 대뜸 물었다.

[우리 헤메라 생각해서 참았는데, 나 잘했어?]

“아아, 네. 그럼요. 신경써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그럼 칭찬.]

칭찬?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멀뚱히 앉아 있자 닉스는 자연스레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윽고 머리 위로 뺨을 살살 비비는 모습이 꼭 영역에 마킹하는 흑표범 같다. 물론 본 모습은 거대한 거미지만.

이걸로 칭찬이 되나 물으려다가 닉스가 꽤나 만족스러워 보여 말을 삼켰다.

“지하실은 어땠나요?”

[응? 뭐가?]

“굉음을 들었거든요. 뭔가… 폭발하는 소리였어요.”

[그래? 내가 도착했을 땐 깨끗하던데.]

이성을 되찾자마자 상황을 수습한 건가. 여러모로 아스레인다웠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요?”

[아쉽게도 다들 멀쩡해. 그 대신 기억만 살짝 건드려 줬지. 멍청한 수하 하나가 마취제를 실수로 엎어서 다 같이 기절한 걸로.]

“정말 감사해요. 닉스 님.”

[후후, 뭘 이런 걸 가지고.]

듣자하니 칼리온의 직속 부대가 올 때까지 그 지하실에 감금해 두겠다고 했다. 아스레인이 직접 마법을 걸어 두었다고 하니, 누군들 쉽게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죄명이 썩 탐탁지 않았다.

마물 포획이라 하기엔 증거가 없고, 설원에 퍼트린 소문마저 죄를 묻기엔 부족했다. 겨우 계획에 방해되는 나를 고문한 게 전부였다. 그나마 가치 있어 보이는 꼬리를 잡긴 했으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다.

“시지프의 기억도 건드리셨나요?”

[응. 영감에 관한 것만.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린 닉스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력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미쳤더라고.]

“미쳤…다고요?”

[자기 수하도 못 알아보던데? 게다가 발소리만 들려도 허공에다가 죄송하다며 빌빌 거려.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독방에 두긴 했지만, 언제쯤 제정신이 돌아올지 모르겠어.]

망할. 트라우마를 너무 자극해 버린 건가. 아니면, 아스레인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받아 낸 탓인가. 수하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극심하다면, 아스레인을 ‘그분’이라 헷갈린 것도 단순히 착란 증세 때문일까.

“혹시 기억을 들여다볼 수는 있나요?”

[시도는 해 봤어. 그런데 정신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유리처럼 모든 게 부셔져서 파편만 남았어.]

“…그렇군요….”

이유가 무엇이든 치료가 불가능한 이상 오로지 기다림만이 답이다. 이번에도 기다려야 한다. 베일에 가려진 흑막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나 싶으면, 늘 손끝에서 스쳐 지나간다. 이런 운명의 장난 따위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숨통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가슴을 툭툭 치자 닉스가 손목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 쉬는 게 좋겠어.]

그의 조언을 따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

“시지프의 기억 속에서 ‘영생의 불’과 관련된 게 있다면, 제게 꼭 알려 주세요.”

단편적이어도 좋다. 설령 정신이 부셔져 파편만 남았어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어붙이면 그사이에 동떨어진 조각은 머릿속으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힘들게 얻어 낸 단서를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었다.

결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니 닉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생의 불?]

“시지프가 직접 말했거든요. 그분께 영생의 불을 가져다줘야 한다고…. 분명 배후를 알아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영 꺼림칙한 게… 딱 인간이 믿을 만하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닉스조차도 영생의 불에 대해선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입가에 스친 싸늘한 조소에서 인간을 향한 경멸이 느껴졌다. 이내 평소대로 돌아온 그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한 번 찾아볼게.]

“정말요?”

[대신….]

의도적으로 뒷말을 삼킨 닉스는 제 뺨을 톡톡 건드리며 심술궂게 웃었다.

[여기, 입 맞춰 주면.]

“…뭐라고요?”

난데없는 부탁에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총명하게 빛나는 눈을 보니 그냥 해 본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빼도 침대 위에서 도망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좁힌 닉스가 은근한 눈웃음을 흘렸다.

[안 돼?]

“아, 아뇨.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민망하게 그…런 걸 어떻게 해요.”

그보다 그걸 왜 받고 싶어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당황해서 목소리가 떨리는 판에 발음까지 절어 버렸다. 멍청하게 눈만 끔뻑이니 닉스는 찡긋 윙크를 하며 물었다.

[그럼 내가 하는 건 괜찮다는 얘기지?]

뭐? 놀라서 주춤하는 사이에 갸름한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그대로 닉스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말랑한 감촉에 한 번 놀라고, 귓가를 파고드는 쪽 소리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질겁한 것은-

“…….”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아스레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단 사실이다.

하필이면 닉스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기에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만 아스레인을 흘겨보았다. 정작 나보다도 먼저 인기척을 느꼈을 닉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스레인이 방으로 오는 걸 알고 기습적으로 다가왔단 의심까지 들었다.

[그럼 분부대로 할게. 나의 헤메라.]

“네? 아, 네? …아니…. 어….”

[귀엽긴.]

닉스는 쿡쿡 웃으며 그대로 모습을 숨겼다.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순간에 함께 변명을 해 줘야 할 당사자가 도망가 버렸다. 이윽고 황량해진 방 안에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스레인이 봤나? 아니, 보면 뭐 어때. 그래도 왠지 못 봤으면 했다. 그야… 오해를 사는 건 싫으니까. 근데 무슨 오해? 왜 나는 바람피운 기분이 드는 거지?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있잖아요. 그러니까….”

쿵. 작은 문소리에 놀라 횡설수설한 말이 쏙 들어갔다. 흘끔 시선을 돌리니 아스레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아무리 봐도 화난 것처럼 보였다.

당장 아무 말이라도 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

기억 속에 내재된 두려움이 샘솟았다. 나도 모르게 지금의 아스레인을 지하실에서의 모습과 겹쳐 보고 말았다. 어느새 침대 앞에 다가온 아스레인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제 기능을 상실한 뇌는 또다시 그를 위험인자로 인식해 버렸다.

“…태오. 상태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손길을 피해 버렸다. 뒤늦게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에서 우뚝 멈춘 손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아스레인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아스레인. 이건….”

다급히 그의 팔을 잡으려 손을 들었지만, 너무도 늦은 후였다.

“…무섭게 해서 미안하군.”

후회에 젖은 눈빛은 내게서 도망치듯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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