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 (150/305)

#150

지금은 낮일까, 밤일까. 문밖으로 한 줄기 빛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아스레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능한 수단이 모두 끊겨 버렸다.

물론 자력으로 탈출할 수는 있다. 단지 시지프에게서 단서를 끌어내기로 결심한 이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기 전에 아스레인이 찾아오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제게 이런 짓을 하셔도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할 거예요.”

“이런 짓…?”

시지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도둑질을 하고도 죄를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모르는 척하려는 건지, 잠시 이성을 잃은 것인지- 방금 전까지 뺨을 때린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멱살을 잡은 손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댔다.

“아~”

짧은 감탄을 내뱉은 시지프는 멱살을 툭 놓았다. 여전히 충격에 갇혀 초점 없는 눈으로 내 상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싱긋 웃는 얼굴엔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책망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태오 군이 버릇없이 굴었잖아요?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윽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그의 손이 강박에 쫓기듯 부르르 떨렸다. 이미 깨끗한 장갑을 몇 번이고 털어 내고, 계속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끝내 완벽한 자태로 돌아온 후에야 시지프는 입매를 길게 찢으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네요. 잊어 줄래요?”

“…없던 일로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시지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뭐, 괜찮아요. 저는 그분께 구원받을 몸이니까.”

“…그분?”

“네. 위대한 분이죠.”

그분. 흔하디흔한 대명사이지만,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조용히 기억을 더듬다가 뇌리에 박혀 잊지 못할 순간이 떠올랐다.

분명 감옥에 수감된 클라우스 자작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그분께서 나를 낙원으로 부르신다. 쓸모를 다한 패는 판에서 내려와 다음 수를 기다릴 뿐.’

막연히 클라우스의 배후에 진정한 흑막이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어물쩍 끝나 버린 사건인 만큼 황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거물이 숨어 있으리라고…. 사건이 잠잠해질 쯤 흑막은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이제야 희미한 가능성이 보였다.

접점이라곤 전혀 없는 그들이 비슷한 목적을 가진 채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클라우스가 말한 ‘다음 수’는 시지프가 아닐까. 그리고 배후는 시지프가 따르는… 에브게니아 황제일지도 모른다.

“폐하 말씀인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나 시지프는 당황한 기색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글쎄요? 태오 군은 평생 모를 거예요.”

“…무슨 말이죠?”

“그분의 위대함을 한낱 평민이 알 리가 없죠.”

벌써 평정을 되찾은 시지프의 입가에 거만한 조소가 어렸다.

이대론 안 된다. 겨우 내 손 안에 쥔 승기가 그에게로 넘어가고 말 것이다.

“자, 이제 잡담은 됐으니….”

“그래요.”

유리하게 흘러가는 흐름을 끊으려 곧장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으로선 그분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요.”

“…뭐?”

“위대한 그분께 실패자인 당신은 어울리지 않아요.”

한 번 아킬레스건을 들켰으니, 판도를 뒤집는 건 어렵지 않다.

역시나 ‘실패’란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감정적 동요를 보란 듯이 똑바로 마주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잊은 거예요? 시지프 씨. 당신의 임무는 고작 저를 붙잡는 게 아니에요.”

“……!!”

“이카로스…. 결국 못 찾았잖아요.”

속내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그의 가면이 손쉽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성공의 대가가 귀족 작위라고 했죠? 그럼 실패의 죗값도 이미 알고 있겠네요.”

“윽….”

“저도 오랫동안 주인 아래서 일해서 알아요. 쓸모없어진 도구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현실을 회피하려는 걸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시지프를 향해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갔다. 손목이 밧줄에 쓸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상체를 한껏 기울였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는 건가요? 아니면, …버림받나?”

일부러 반응을 두세 번 떠볼 필요도 없었다. 버림받는다는 말에 시지프는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천천히 그러쥔 주먹은 겁에 질린 듯 떨렸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건드리면… 곧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어째 시지프 씨는 죽기보다 버림받길 무서워하는 것 같네요. 과거로 돌아갈까 봐 그래요?”

“…닥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죽기보다 사는 게 낫잖아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쉴 새 없이 떨리는 몸이 우뚝 멈췄다. 아차, 싶은 순간 그의 손이 재차 올라갔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이젠 아무렇지 않게 뺨을 내어 주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시지프가 팔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삽시간에 잿빛이 된 얼굴은 거대한 공황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시지프는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연신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버림받을 리가 없어. 이대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아니, 돌아가지 않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지뢰를 제대로 밟은 건가. 시지프는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간간히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해 낼 때마다 억지로 뽑힌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시지프의 발작에 지켜보기만 하던 수하들도 당황한 듯 보였다.

급기야 호흡을 껄떡거리기 시작하는 탓에 내심 그를 걱정했다.

“시지….”

하지만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모순적이게도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가슴에 손을 얹은 모습은 충성을 다짐하는 기사 같기도, 신실한 신도 같기도 했다.

단단히 세뇌당한 푸른 눈동자는 버림받으리란 두려움마저 잊은 후였다.

“제가…. 이 시지프가 반드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끝내 시지프는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위대한 당신께… 영생의 불을….”

뭐? 나도 모르게 입술을 툭 벌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분명 ‘영생의 불’이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진실을, 심지어 클라우스에게서도 빼내지 못한 내막을 시지프가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지금이 아니면 캐낼 도리가 없다. 급한 마음에 의자까지 덜컥거리며 물으려던 그때였다.

“시지프 님!”

밖을 지키던 수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얼굴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꼭 포식자에게 쫓기다가 겨우 도망친 것처럼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도망치….”

결국 수하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뭐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단순한 시작에 불과하다고.

“으… 으아아악!”

그 후로 바깥에서 굉음이 연달아 들렸다. 쿵! 지하까지 흔들리는 걸 보니 웬만한 소란이 아니었다.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내들이 보였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들은 눈을 희번덕인 채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꼭 신력에 취한 것처럼.

“설마….”

아니, 이건 신력이 아니라 마력이다. 어디에서도 맞닥뜨릴 수 없는- 진정한 마물의 마력.

“누구냐!!”

뒤늦게 벽에 서 있던 수하가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기운에 숨통이 틀어막혀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그것은 마법도, 약제도 아니었다. 그저 마력이 내뿜는 위세에 억눌려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둘씩 고꾸라졌다.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온 손은 차마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손톱은 어느 갑옷도 가뿐히 뚫을 것 같았고, 창백한 손등에는 비늘이 드문드문 돋아나 있었다.

찬란하게 발하는 저 금빛을- 나는 알고 있다.

“…아….”

유유히 흩날리는 금발을 보고도 반갑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징과도 같은 잘려 나간 뿔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스레인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이성을 잃어 마물의 힘이 폭주한 상태였다. 혹시… 나 때문인가? 하지만 내가 시지프에게 납치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이유를 추측할 새도 없었다. 가늘게 찢어진 동공이 지하실을 유유히 둘러보았다. 살벌한 눈빛은 마력에 억눌려 쓰러진 사내들을 지나쳐 내게 닿았다. 시지프에게 맞아 붉게 달아오른 뺨과 찢어진 귓불을 발견한 아스레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눈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나마 지금이라면 그를 말릴 수 있다. 나를 알아볼 정도의 이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충분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

차분히 숨을 들이쉬며 아스레인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다, 당신께서 어떻게 이곳에….”

줄곧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시지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은 어느 때보다 짙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마물과 섞인 모습인데도 아스레인을 알아본 건가? 만약 지금 시지프가 제정신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다. 당장 시지프의 머릿속에서 저 기억을 끄집어내야만 한다.

그리 생각했건만, 시지프는 예상외의 행동을 보였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강한 시지프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설설 기어가더니 갑자기 아스레인의 발아래 바짝 엎드렸다. 아무리 봐도 아스레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착란이 온 시지프는 그를 통해 누군가를 빗대어 보고 있다. 사색이 된 얼굴하며 자비를 구하는 몸짓을 보아하니, ‘그분’과 아스레인을 혼동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닮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니 부디 자비를….”

시지프는 급기야 다리를 부여잡고 살려 달라며 울먹였다. 그러나 분노에 눈이 먼 그 마물에게 자비란 없었다.

“커헉!”

날카로운 손톱이 시지프의 목을 거칠게 붙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단숨에 공중에 뜬 시지프는 발끝을 꼿꼿하게 세우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스레인은 제 손에 서서히 죽어 가는 생명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그누스!”

다급히 이름을 불렀으나 그림자는 쥐 죽은 듯 잠잠했다. 아무리 아그누스라 한들 아스레인의 마력에 짓눌려 고개조차 내밀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키코로도 히페리온의 씨앗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팔다리가 묶인 채 사랑하는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안 돼….”

저대로 두면 시지프가 죽는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나, 아스레인의 손을 더럽힐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더군다나 갑작스러운 시지프의 죽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말려야만 한다. 나 때문에 이성을 잃은 거라면, 더더욱 아스레인을 멈춰야만 했다.

“윽…!”

상체를 강하게 비틀자 밧줄이 여린 살결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쓸리기만 할 뿐, 속박이 끊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시지프에게 서린 희미한 온기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끝끝내 축 늘어진 팔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인간의 기도가 신에게 닿는다고 했던가.

만약 정말로 이 세계에 신이 있다면. 테세스의 간절한 마음이 내게 닿은 것처럼 누구라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제발 나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부디 내게 저 사람을 멈출 기회를…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기적이 일어나길.

“…….”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절실한 기도를 끝낸 순간이었다.

- 자.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뜨니 기다란 머리카락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태양 같은 아스레인과 대비되는 머리카락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달빛을 닮은 은색을 보자마자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을 읊조렸다.

“…시…스템…?”

그러자 대답 대신 밧줄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투득. 말 그대로 기적처럼 밧줄이 사라졌다. 그 덕분에 팔다리가 가뿐해져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내 뒤로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은 아닙니다.

“…어?”

- 아직은.

의미심장한 말에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으, 으윽….”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시지프의 신음소리를 듣자마자 다급히 아스레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힘이 얼마나 세던지, 아무리 매달려도 목을 조이는 손아귀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몸을 부딪치듯 아스레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스레인…!”

“…….”

“저예요. 태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살갗으로 느껴지는 마력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신의 영역에서 레톤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격한 힘의 파동이었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껴 팔다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도망치고 싶다. 시지프를 향한 살의가 내게도 튀는 건 아닐까. 패닉이 찾아온 머릿속은 끊임없이 아스레인을 위험인자로 인식하며 사이렌을 울렸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두려움이 뇌를 좀먹을수록 더욱 강하게 아스레인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다정한 향기를 풍기는 품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는 여기… 당신의 곁에 있어요.”

그때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마력의 흐름이 우뚝 멈췄다. 괜찮아진 건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둥그스름해진 동공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뺨에 돋아난 비늘도, 하늘 높이 솟은 뿔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조금씩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아스레인은 마침내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태오?”

살았다. 그게 내 마지막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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