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 (146/305)

#146

신의 말을 전하는 마물. 그 신비함은 북쪽 설원에 혼란을 가져왔다.

신탁은 늘 황제와 귀족의 것이었다. 따라서 평민들은 누구보다 신을 따르면서도 단 한 번도 신탁을 접한 적이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영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처럼 그들은 항상 신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전해 듣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소문을 좇는 자여. 걱정하지 말라. 이곳은 헤메라의 가호를 받는 땅.’

그들은 난생 처음 신탁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다. 심지어 키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평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러는 신께서 북쪽의 험지를 버리지 않았다며 기뻐하였고, 또 더러는 찬란하게 빛나는 새를 신의 사자라고 추앙했다.

‘나의 전언을 전하는 자, 설원 위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틀 만에 헤메라 설화는 북쪽으로 퍼져 나가 눈보라보다 빠른 속도로 마을을 뒤덮었다. 마물을 찾기 위해 설원을 향해 떠났던 모험가들이 하루가 다르게 마을로 돌아왔다. 길거리마다 ‘헤메라 님, 헤메라 님’하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갑자기 ‘피를 불러오는 자’가 되어 버린 시지프는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애초에 그들이 헤메라의 존재를 믿을지도 의문이다. 어쩌면 첫 만남부터 희미하게 신력이 느껴지던 시지프는 약간 주춤했을지도 모르겠다.

“으으, 오늘도 바람이 꽤 많이 부네요.”

슬슬 라호 마을을 떠나 라비린토스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마구간 옆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응당 말이 있을 줄 알았건만, 털이 수북한 수컷 순록들이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옆 건물 쪽창으로는 낮부터 술에 취해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중년 여성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자 중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휴, 어서 와요.”

“순록 한 마리를 빌릴 수 있을까요?”

“기다려 봐요. 내 얌전한 놈으로다가 데려올 테니.”

재빠르게 마구간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술에 진탕 취해도 순록을 다루는 손길은 제 아이들을 돌보듯 부드러웠다. 흐뭇하게 순록들을 구경하다가 불현듯 시선을 느껴 옆을 돌아보았다. 어째 아스레인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네?”

“헤메라라는 이름 말이네.”

아.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싫어하기보단 이상했어요.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하루아침에 말 그대로 신이 되어 버렸다. 처음엔 황당하게 넘겼지만, 서서히 캄페 산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영향력을 보며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물과 인간-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아스레인의 태도는 퍽 단호했다.

“태오. 기도를 받는 존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네.”

살짝 일그러진 표정은 고통을 애써 감내하는 듯 보였다.

아마도 경험담이겠지. 묘하게 씁쓸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문득 아드 쿠네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스레인 앞에서 ‘그 마물’에 대한 연민을 토로했었다. 일방적으로 가호를 약속해야 하는 존재는 분명히 외로울 것이라고. 그래서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그를 위해 기도해주리라 약속했었다.

그 마물이 아스레인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도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들의 기도는 제게 닿지 않아요.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차갑기 그지 없는 그의 뺨을 감쌌다.

“이걸로 아스레인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잖아요.”

“…태오.”

“저는 아직도 당신의 행복을 기도하고 있어요.”

해사한 얼굴로 웃으니 메마른 눈동자에 한 줄기 생기가 스쳤다. 이내 짙은 그림자뿐이었던 그에게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 겨울밤의 끝에 마침내 봄볕이 드리운 것 같았다. 그 미소를 되찾아 줬다는 생각에 괜스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때요?”

“음?”

“아스레인이 그리던 이상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어요?”

분위기를 풀 겸 장난스럽게 물으니 아스레인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내 손에 기대어 왔다. 아래로 내리깐 그의 눈에는 늘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외로움이 전부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낙원은 이미 눈앞에 있네.”

구석구석에 와 닿은 눈빛에는 애틋한 감정이 섞여 있어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웠다.

그때 크흠! 하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고 옆을 돌아보니, 순록을 데려온 사장이 뻘쭘하게 서 있었다. 어째 우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시선이 야릇해서 서둘러 아스레인에게서 멀어졌다.

“아, 사장님.”

“순록은 한 마리면 되는 거요?”

“네네.”

여인의 손에 이끌려 나온 순록은 새하얀 털로 뒤덮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기다란 콧등을 슬쩍 만지자 손끝으로 뻣뻣한 감촉이 느껴졌다. 다행히 사람의 손길엔 익숙한 것 같았다. 얌전한 순록과 친해지려 냄새를 맡게 해주는데, 대뜸 여인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한 마리에 둘이 타긴 힘들 텐데….”

“아, 저만 타는 거라서요.”

“엥? 거짝은 그럼….”

술에 취해 풀린 눈이 슬며시 아스레인을 향했다. 아랑곳 않고 묵묵히 계산을 마친 그는 고삐를 받아 가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내 능숙한 손길로 순록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마저도 기막히게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아스레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년의 여인은 내 등을 찰싹 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휴, 한창 좋을 때구먼.”

“…네?”

“남편한테 사랑받는다니 좋겠어~”

뭐? 나, 남편? 아스레인 보고 남편이라고 한 거야? 그럼 나는… 부인이야? 두꺼운 겉옷을 입었다지만 목소리나 체형이 남자잖아. 물론 평균에 비하면 왜소하지만… 비록 목소리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편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별안간 넋을 놓고 눈만 끔뻑이다가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아~ 아직 결혼은 안 했나 봐요?”

“…….”

“그럼 얼른 해요. 멀끔하니 괜찮아 보이는구먼. 저런 남자 어디서 못 찾아~”

어디서부터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은 나머지 입을 다물자 그녀가 퍽 호탕하게 웃었다.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아스레인 곁으로 갔다.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여인의 오해를 풀어 주긴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라호 마을을 떠나 라비린토스까지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평탄했다. 정말 신이 도운 것인지. 아니면 아스레인이 손을 쓴 것인지, 어제까지만 해도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우뚝 멈췄다. 게다가 순록이 말보다 체고가 낮은 덕분에 예전처럼 안장 위에서 벌벌 떨지도 않았다.

무사히 설원을 가로질러 해가 질 무렵엔 다음 마을로 도착했다. 불빛이 모여 있는 광장 쪽으로 향하며 슬쩍 물었다.

“하룻밤 묵고 가는 게 좋겠죠?”

“음. 자네가 피곤할 테니까.”

“저보단 계속 걸은 아스레인이 더 힘들지 않아요…?”

고삐를 쥔 채 내려다보니 아스레인이 물끄러미 시선을 맞췄다. 이내 불쑥 다가온 두 손이 내 허리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놀랄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가뿐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구겨진 옷자락을 정리해 준 아스레인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중얼거렸다.

“자네는 이따금씩 내가 누구인지 잊고 있는 것 같군.”

“…아.”

자연스럽게 고삐를 가져간 아스레인은 아담한 2층 집 앞에서 멈췄다. 여관이라 쓰인 팻말이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우리에 순록을 묶어 두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선 레스토랑을 하고 있는지, 몇몇 사람들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양손 가득 맥주를 나르던 소년이 반갑게 인사했다. 곱실거리는 머리칼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을 보니 왠지 진이 떠올랐다.

“묵으러 오신 거예요? 아니면, 식사만?”

“하루정도 지낼 방이 필요해요.”

“아! 잠시만요.”

빈 방을 확인하려는 걸까. 소년은 카운터로 들어가 부지런히 서랍을 뒤적였다. 잘그락, 잘그락. 쪼그려 앉아서 열쇠를 찾던 소년이 머리만 불쑥 내밀고 말했다.

“두 분이세요?”

“네. 혹시 방 두 개가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여관이 보시다시피 좁아서요. 침대가 두 개인 방은 있는데, 어떠세요?”

“그럼 그걸로….”

조용히 서있던 아스레인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침대는 하나면 된다만.”

“어… 네?”

카운터 너머로 소년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최대한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 못지 않게 당황한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아스레인을 휙 돌아보았다. 무덤덤한 표정을 보니 무슨 의심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영업용 웃음을 활짝 지으며 말했다.

“신혼여행을 북쪽으로 오셨나 봐요.”

“…예?!”

“제일 구석방으로 드릴까요? 거기가 그나마 사람이 덜 오가거든요.”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북쪽은 다른 곳보다 편견이 없나? 아니면, 북방 남자들에 비해 내가 너무 작고 왜소해서 그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아… 괜찮으세요?”

“당연하죠. 그리고 침대는 꼭 두 개여야 해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니 소년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계단을 올라가 여관방으로 가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소년은 흘끔흘끔 우리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환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은근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 것만 같았다.

“여기예요.”

소년이 잠긴 문을 열어 주자 아담한 방이 드러났다. 두툼한 모포가 놓인 침대는 창가와 벽 쪽에 각각 붙어 있었다. 두 침대는 겨우 한 뼘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그 정도도 지금으로선 감지덕지였다. 문 옆에 있는 각진 테이블에 열쇠를 올려 놓은 소년이 말했다.

“지하 욕탕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놨으니 편히 씻으세요. 지금 시간대엔 두 분밖에 없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끝까지 친절로 일관한 소년에게서 진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문 밖으로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뭘?”

“…진짜 모르시겠어요?”

“어차피 자네만 자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얘기가…. 아니, 아니에요.”

기운이 쭉 빠졌다.

애초에 침대가 하나면 밤새 어디에 있으려고 했는데? 설마 아스레인 성격 상 바닥은 아닐 테고, 내내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용납 못한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한 침대를 같이 쓰는 결론뿐이다. 물론 아스레인의 저택에서 한 침대를 쓰긴 했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렇고 말고.

“그래도 방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창가 쪽 침대에 짐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아스레인이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얼떨결에 안쪽 침대를 차지하곤 의아하게 돌아보니 그가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이쪽은 외풍이 들어 추울 걸세.”

“아…. 감사합니다.”

그쪽으로 눈치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배려는 숨 쉬듯 했다. 그게 또 나한테만 하는 행동이라니, 여러모로 고문이 다름없다. 침대 머리맡에 짐을 내려놓으며 괜스레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너무하네.”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겉옷을 벗으니 보온 마법이 걸려있는데도 왠지 몸이 으슬으슬 거렸다. 살짝 어깨를 떨자 아스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먼저 씻겠나?”

“네? …그래도 돼요?”

“안 될 이유도 있나.”

“그야 당연히….”

어른이 먼저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그의 눈에는 망설이는 걸로 보였나 보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스레인은 목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를 풀며 중얼거렸다.

“그럼 같이 씻든가.”

툭. 일순 손에 힘이 풀려 갈아입으려고 챙긴 옷가지를 놓쳐 버렸다. 이 사람이 더위를. 아니, 추위를 먹었나. 한 침대도 모자라 한 욕탕에 같이 들어가자고? 상상만 해도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라 오한이 단숨에 사라졌다. 잽싸게 떨어진 옷을 품에 안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염치 불고하고 먼저 다녀올게요.”

그대로 지하로 내려가 욕탕에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이대로 혼자 느긋한 시간을 즐기려고 했건만, 자꾸 ‘같이 씻겠냐’고 물어보는 아스레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욕탕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덜 마른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오니 아스레인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광경이었다. 하지만 오늘 내내 들은 오해 때문인지, 망상 회로가 힘차게 돌아갔다.

막 씻고 나온 나와 편안한 차림으로 기다리던 아스레인. 어째 호텔에서 한때를 보내기 전의 커플 같지 않은가.

“우와….”

나 진짜 미쳤나? 거친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 내자 아스레인이 어리둥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아, 아뇨. 아까 그 점원한테 물을 다시 받아달라고 부탁했으니 어서 다녀오세요.”

“…그러지.”

거의 등 떠밀듯 아스레인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머리를 고치려 이마를 끈지게 때렸다. 짝! 얼얼한 감촉에도 이성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을 둘러보는데, 문득 벽에 걸린 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지….”

벽에 꽂힌 후크에 둘의 로브를 걸어 두었는데, 어째 아스레인 것만 바닥에 끌렸다. 좀 더 높은 곳이 없나 싶어 아스레인의 로브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두툼한 로브를 끌어안자마자 귀족적인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설원 특유의 바람 냄새까지 섞여 안 그래도 혼란한 마음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진짜 고문이라니까….”

침대에 걸터앉아 아스레인의 로브에 얼굴을 묻었다. 왠지 아스레인에게 폭 안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슬슬 나른해져서 애착 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겉옷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만. 아주 잠깐만 이대로 있으려고 했다. …설마 이대로 잠이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뒤척이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겉옷 너머로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랜턴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은 정확히 맞은편 침대에 있는 이의 얼굴에 닿았다. 나른한 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아, 아스레인.”

“내가 깨웠나?”

“아니요! 그보다 오셨으면 저를 깨워 주시지 그랬어요.”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말이네. …내 옷까지 끌어안고.”

미친. 하마터면 어설픈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그러니까 이건요….”

남의 옷을 허락도 없이 끌어안고 잤다.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는 옷을.

변명할 여지?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왠지 옷이 바닥에 끌리는 것 같아서 다른 곳에 두려고 했는데요. 그러다가….”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는 모습이 유치하게 느껴져 뒷말은 대강 얼버무렸다.

“…향기가 좋아서 저도 모르게 끌어안고 자 버렸어요.”

“향기?”

“그, 있잖아요? 왠지 마음이 안정된다고 해야 하나. 아스레인이 곁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왠지 외지에 오니까 마음이 어수선해서요.”

어설픈 변명이 끝난 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아스레인이어도 할 말을 잃었겠다.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구겨진 겉옷을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어이없는 웃음과도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기왕 안을 거면 이쪽이 낫지 않나?”

“네? 그게 무슨….”

다시금 뻣뻣하게 고개를 들자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아스레인이 보였다. 서서히 동이 트는 새벽의 하늘과 희미한 랜턴 불빛에 서려 그 모습이 아롱거렸다.

“그러게 침대는 하나로 충분하다고 했잖나.”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불현듯 반절 열린 셔츠의 앞섶으로 눈길이 꽂혔다. 물기 젖은 머리카락이 하필이면 탄탄한 근육이 만들어낸 가슴골 사이로 흘러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 사이를 가로지르는 금색 실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가 단추에서 멈췄다.

고혹적인 자태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벌렸다.

“그래도….”

돼요?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되긴 뭘 돼. 저쪽은 아무 자각도 없이 한 소리일 게 뻔했다. 뭘 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은 확인해야지. 결국 속세의 유혹을 감내하는 사제처럼 눈을 질끈 감고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갑자기 번데기가 되어버리니 아스레인은 황당한 목소리로 불렀다.

“…태오?”

“저 잘 거예요. 진짜로요.”

그대로 자는 척하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홀로 뛰쳐나가 찬물로 샤워했다.

때아닌 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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