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설원에 숨은 마물을 찾으라니…. 본디 소문은 그 원천을 알 수 없으나, 이번만큼은 근원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속내가 훤히 보이는 탓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먼저 말을 꺼낸 중년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크흠. 내가…뭔가 잘못 말한 건가?”
“…아뇨. 저도 소문에 관심이 생겨서 그러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중년은 아스레인을 흘끔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나마 북쪽에서 인구가 몰려 있는 이곳, 라호 마을부터 시작해서 설원을 둘러싼 각지에 똑같은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소문을 퍼뜨린 자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응당 귀족일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누구든 설원에 숨어 있는 마물을 찾는 자는 큰 은혜를 입을 것이다.’
직관적인 목적과 두루뭉술한 보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예요?”
“처음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몇몇 청년들이 나섰는데, 소문이 어디까지 펴졌는지… 보상을 바라고 온 외지인이 많아졌다오.”
먼저 설원에 도착했다고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보다 빠른 소문을 보냈고, 그 덕분에 일대의 마을을 손아귀에 넣었다. 사방에 흩어진 사람들이 시지프의 눈이자 귀가 되어 줄 것이다. 비록 라비린토스는 여전히 출입 제한 구역이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었다. 돈에 눈이 멀어 험지까지 온 사람이 뭔들 못할까.
“아무튼 조심들 하게나. 내일 오후부터 신의 분노가 대지를 드리울 테니.”
“신의 분노요?”
“이곳에선 눈보라를 신께서 노하셨다고 표현하거든. 천벌을 받고 싶지 않거든 집에 얌전히 있어야지.”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중년을 뒤로 하고 아스레인과 함께 광장으로 걸어갔다. 때 아닌 인파에 상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음식과 천을 날랐다. 호객의 대상은 대부분 길을 떠나는 젊은 청년이었다. 더러는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허리춤에 찬 칼을 자랑했다.
이른 바 ‘모험가’라 불리는 그들의 대화 주제는 한결 같았다.
“내가 먼저 찾아서 영주님 눈에 들어야겠어.”
“야. 영주님께서 내린 명령이 아니라니까.”
“그래도 이번 일 처리하면 한자리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건 뭐… 그렇겠지.”
“짜식, 나중에 가서 빌붙지나 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이들마다 전부 ‘설원의 마물’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소문은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와전되었다.
‘설원에 인간을 먹는 마물이 있다.’
‘끊이지 않는 눈보라는 마물 때문이다.’
‘과거 마을을 불태우고 도망친 마물이 설원에 숨어들었다.’
자극적인 소문으로 인해 아무 관련 없는 마을 주민까지 공포에 휩싸였다. 보다 못한 아스레인과 나는 마을을 떠나 인적이 드문 숲길로 향했다. 벌써부터 마물을 포획하기 위한 수를 써 두지 않았을까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안 그래도 험한 돌길에 발목까지 쌓인 눈 때문에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열심히 나무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높게 솟은 침엽수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사방이 온통 하얗게 물든 숲속 한가운데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두 개의 바위틈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발이 휘날릴 정도로 격한 움직임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서둘러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니 바위 사이에 힘없이 축 늘어진 토끼가 있었다. 눈 아래 숨겨진 덫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 버린 듯했다. 새하얀 털 사이로 참혹한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혹여 상처가 벌어질까 봐 섣불리 건드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아스레인이 다가왔다.
“야생 동물인가?”
“네. …덫에 걸린 것 같아요.”
“상태를 봐야겠군. 잠시 비켜 주게.”
방해하지 않도록 한 걸음 떨어져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아스레인은 가벼운 손짓으로 덫을 풀어내고 토끼의 상태를 살폈다.
“포획 금지로 지정된 눈사리토끼군.”
“네? 그럼 어서 치료를….”
생각보다 환부가 심각한 걸까. 아스레인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생과 사에 깊게 관여하면 안 되지만, …이 정돈 괜찮겠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아스레인은 이내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덫에 벌어진 상처가 섬세한 손길을 따라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처럼 아슬아슬한 토끼의 호흡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해 갔다.
“상처를 전부 치료했으니 금방 깨어날 걸세.”
“…다행이네요.”
얼마 후,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던 토끼가 몸을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리를 보곤 화들짝 놀라 쏜살같이 도망쳤다. 힘차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아마 마을 주민이 사냥을 위해 둔 거겠죠?”
“…아니. 그렇다면 표식이 있어야 하네.”
“표식이요?”
아스레인이 눈덩이를 치워내자 땅에 단단히 박힌 덫이 드러났다. 먹잇감을 붙잡는 이빨 사이로 피로 물든 토끼털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능숙하게 안전장치를 채운 아스레인은 덫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방금 전에 봤던 눈사리토끼처럼… 설원엔 보호종이 많은 탓에 수렵을 허가받은 사냥꾼만이 덫을 놓을 수 있네. 그래서 그들은 지정된 구역에 표식이 있는 덫이나 그물을 남겨 두지. 그래야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까.”
다시금 유심히 덫을 관찰한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 덫엔 아무것도 없네. 게다가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그럼 허가받지 않은 덫이란 건가요? 대체 왜….”
아니,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추적을 위해 수배를 띄우는 건 효율적이나,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다. 그들은 마물을 찾는 것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소문대로 ‘인간을 먹고 과거 마을을 불태운’ 마물이라면, 그를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과도한 의욕은 항상 원치 않은 피해를 낳았다.
“설원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겠지.”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물 사냥꾼이 판치던 그때로.
***
하루 종일 설원을 돌아다니며 표식이 없는 덫을 전부 제거했다. 정확히는 숲속에서 표식이 있는 덫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듣자 하니 라호 마을 근처 숲은 밀렵 금지 구역으로 정해져 있단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소문이 낳은 덫이 포대 자루로 쌓였다. 투박한 쇠붙이보다도 냉랭한 현실이 더욱 무거웠다.
시지프는 대체 무슨 작정으로 이런 수를 쓴 걸까. 똑똑한 그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대로면 우리가 라비린토스로 향하는 동안, 죄 없는 동물과 마물이 상처 입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휘말릴지도 모른다.
“…수를 써야 돼.”
아무리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로브를 대충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으로 간단히 먹을 수프라도 사 오려는데, 옆 건물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언성이 높은 탓에 일부러 엿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또렷하게 들렸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는 거야?”
“설원.”
남자의 짤막한 대답에 여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미쳤어? 곧 눈보라가 칠 거야.”
“알아. 하지만 도망친 마물이 언제 날뛸지 모르잖아.”
“그건 그냥 소문이야.”
“소문이라 해도 불안하다고.”
한 번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이곳의 주민들은 설원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굶주린 곰이, 새끼를 지키는 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무모하게 떠난다. 심지어 이번 상대는 이름도 모르는 마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소문을 따른다.
“너도 알잖아. 아빠는 우릴 먹여 살리려고 매번 설원을 오가셔. 근데 마물이랑 마주치는 꼴을 두고 보라고?”
“그래서 어쩔 건데.”
“뭐?”
“네가 뭔지도 모를 마물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개죽음이라고!”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맞는 이야길 하고 있었다. 단지 소문이 불러온 화에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를 뿐이다. 대체 무슨 수로 소문을 잠재우지? 이미 마을을 넘어 설원 곳곳에 퍼진 불길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애초에 무슨 근거로 소문을 믿는 거야?”
“…….”
“그깟 소문이 문제야? 천벌받는다고. 이러다가… 네가 신의 분노에 휘말릴까 봐 두려워.”
걱정으로 울먹이는 목소리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숙연해졌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소문.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신. 설원의 주민들은 그 두 가지를 쉽게 믿는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쉽게 옮아 붙듯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은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지금으로선 소문을 일일이 부정하고 다닐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 소문을 덮을 수만 있다면….
“태오.”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막 나오려던 아스레인과 딱 마주쳤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겐가.”
“아,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다녀왔어요.”
“…걱정했잖나.”
“미안해요.”
멋쩍은 미소를 지으니 아스레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두터운 로브를 벗어 두는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그보다 아스레인. 소문을 막을 방법을 찾았어요.”
“…뭐?”
휘둥그레 뜬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대로 그를 데리고 벽난로 앞 소파에 앉혀 놓고, 나는 홀로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자 싸늘한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벌써부터 먹이를 구하려고 비행하는 텃새가 굴뚝 위를 지나갔다.
“이곳 사람들은 소문에 꽤나 민감한 것 같아요.”
“그야 고립된 험지에선 소문 따위를 빠르게 판명할 수 없으니 그렇지.”
“맞아요. 게다가 외지인이 몰려오는 지금은 소문이 훨씬 빨리 퍼지겠죠. …그러니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소문을 소문으로 덮으려고 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시지프가 만들어 낸 근거 없는 소문보다 ‘확실한’ 방법을 써서… 믿게 만들 거예요.”
근거 없는 소문과 존재하지 않는 신. 그리고 나의 소문을 퍼뜨려 줄 자유로운 존재. 모든 것은 준비됐다.
“여기야. 나의 소중한 친구.”
손목을 휘감은 필리스 줄기를 감싸 쥐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가 필요해. 키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니 창문 앞으로 화사한 빛이 모였다. 둥그렇게 뭉친 빛은 이내 날렵한 부리와 커다란 날개로 변모했다. 마침내 햇빛을 반사하는 눈밭처럼 반짝거리는 새 한 마리가 창가에 사뿐히 앉았다.
[태오!]
“춥진 않아?”
[괜찮아. 그보다 밖은 정말 오랜만이야…!]
기분 좋은 새소리가 새로운 아침을 알렸다. 한껏 신이 난 키코의 부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그럼 이 설원을 마음껏 날아다녀 줄래?”
[그거면 돼?]
“응. 대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겠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키코는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나를 도와줄 친구도 생겼으니,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어떤 말인데?]
설마 내가 ‘그 이름’을 쓰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마지막까지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문을 좇는 자여, 이 설원에 마물이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존재하지 않는 신이자 마물을 사랑하는 신.
“이곳은 헤메라의 가호를 받는 땅.”
지금만큼 그 이름을 이용하기에 어울리는 순간은 없었다.
“나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를 보내어 상처 입은 마물을 보듬고, 제 영역으로 무사히 돌려보내겠다. 그러니 권세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반(反)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
이게 나라는 게 들키면 신성 모독이라고 재판에 서겠지.
“혹 누군가 설원으로 떠나려거든 말려라. 또 누군가 마물의 행방을 묻거든 모른다고 답하라. 그건 오랜 평화를 깨는 자이며… 이 땅에 피를 불러오는 자이니라.”
하지만 이것으로 불길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나의 전언을 전하는 자, 설원 위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필리스 팔찌를 풀어 키코의 발목에 묶어 주었다. 히페리온의 마력이라면 설원을 비행하는 내내 모습을 유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거센 바람에 풀리지 않게 꼼꼼히 마무리하고 키코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부탁해, 키코.”
이로서 설원으로 향하는 자들이 부디 걸음을 돌리기를.
소중한 가족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도 이젠 마음 편히 잠들기를.
설원을 뛰어다니는 모든 생명들이 예전의 평화를 되찾기를.
“네 날개가 닿는 모든 곳에 이 말을 전해 줘.”
그리하여 인간도 마물도- 그 누구도 헛되이 목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