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어느 한쪽도 물러날 기미는 없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누가 먼저 활시위를 당길지 몰라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겨우 호흡을 고르는 사이,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면 경비병을 부를 겁니다.”
“경비병…이요?”
“못할 것도 없죠.”
시지프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 입꼬리를 배뚤게 올렸다. 설마 경비병을 진짜로 부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이리스는 당장이라도 경비병을 불렀으면 불렀지, 허투루 공갈을 할 사람은 아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걸까. 한껏 당당하던 시지프는 살짝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저는 적합한 방법으로 이 학교에 출입했어요. 게다가 추잡하게 경비병에게 잡혀 갈 위치는 아니죠.”
“아, 그래요?”
대놓고 조소를 흘린 아이리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렇게 대단한 위치에 계신 분께서 설마 학생을 억지로 붙잡아 위협하려고 학교에 친히 오신 건 아닐 테고.”
“…….”
“할 일 끝났으면 이만 가시지 그래요?”
일순 말문이 막힌 시지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입 아프게 상대하지 않아도 돼서 좋긴 하지만, 슬슬 아이리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리스의 팔을 살짝 잡아 뒤로 끌며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시지프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렸다.
“태오 군. 이래저래 좋은 방패를 갖고 계시는 군요.”
“…네?”
“앞뒤 안 보고 달려드니 꽤나 든든하겠어요. 아, 훈련 잘 받은 번견이라고 해야 하나.”
부드럽게 웃으면서 신사적인 투로 말하는데도 그 안에 박힌 가시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가시는 내게 흠집 하나 내지 못했지만, 난데없이 조롱을 들은 아이리스가 신경 쓰였다. 혹시 이 말을 듣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흘끔. 옆을 돌아보기 무섭게 아이리스가 내 어깨에 턱 하니 팔을 올렸다.
“허, 그리 보인다니 다행이네.”
“…아이리스.”
“그동안 방패이자 번견이고 싶었는데, 얘가 날 도구처럼 다뤄 주지 않아서 걱정이었거든.”
나지막이 이름을 속삭이자 아이리스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그에 반해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불쾌한 시지프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힘겹게 유지하는 웃는 얼굴조차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시지프는 일그러진 입매를 어루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참 대단한 우정이네요.”
“왜. 부러우면 끼워 줘?”
“하하, 전혀요.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머릿속이 꽃밭인 건 꽤 부럽네요.”
“그쪽은 뭐 대단한 걸로 가득 찼나 봐? 아쉽네. 함부로 열어 볼 수도 없고.”
잠잠해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치열하게 오고 가는 말에 끼어들 틈만 찾던 그때였다.
“장난도 이만해야겠네요.”
경직된 분위기를 먼저 끊어 낸 쪽은 시지프였다. 충분히 기분이 상했을 만도 한데, 그는 끝까지 정갈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럼 북쪽에서 봐요. 태오 군.”
싱긋 미소 짓는 얼굴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는 예고장처럼 보였다. 심지어 아이리스에게까지 여유로운 눈짓으로 인사해 주는 그는 역시 함부로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마주 인사하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꼼짝없이 서 있었다.
저만치 멀어진 후에야 온몸에 서린 긴장이 훅 풀렸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자 식은땀이 배어났다. 폭풍 같은 상황이 일단락되자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나를 위해 직접 나서 준 아이리스가 고마우면서도, 괜히 나 때문에 좋지 못한 일에 연루될까 걱정됐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아이리스를 휙 돌아보았다.
“아이리스.”
“잔소리 하지 마.”
“…알겠어요.”
퍽 단호한 말투에 순순히 수긍했다가 뒤늦게 반발심이 일었다.
“아니, 근데 왜 무리하고 그래요.”
“잔소리 안 한다며?”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럼 네가 웬 놈한테 끌려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냐?”
“…도와준 건 고마워요. 아이리스 덕분에 별 탈 없이 끝났어요.”
“응.”
그게 끝이었다. 심지어 고맙다는 한 마디에 아이리스는 기분이 꽤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훗날이 걱정되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불쑥 다가가서 그의 팔을 잡고 속에 있는 생각을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혹시 아이리스의 뒤를 캐고 다닐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하는 일마다 방해할 수도 있다고요. 아이리스는 이제 막 마법으로 창창하게 나가야 할 인재인데….”
“너는 무슨 말을 진로 상담하는 교수님처럼 하냐.”
“지금 제 말투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젠데?”
살짝 찌푸린 미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반응이었다. 여러 의미로 순수함에 놀라 별안간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이리스의 말은 뜻밖이었다.
“걱정도 많다. 가족은 물론이고 전 주인은 이미 뒤지고 없는데, 뒤를 캘 게 뭐가 있어?”
“그건….”
“그리고 나는 네 말대로 했을 뿐이야.”
“네?! 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일단 맘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끝까지 입으로 패라? 물론 솔직함이 아이리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당황한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이리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마석을 주면서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하라 했잖아.”
클라우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일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리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사이누르의 마력이 담긴 마석을 건네주며 말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부 아이리스의 선택에 달렸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그날의 일은 똑똑히 기억나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그랬죠…?”
“실은 너한테 그걸 받을 때 이미 뭐가 되고 싶은지 정했어.”
“정말요?”
“그래서 지금 행동한 거고.”
이상하다. 분명 아이리스가 원하는 대로 마법과 관련된 직업을 가질 줄 알았다. 근데 방금 있었던 일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렴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 고민했을 테니, 구태여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의구심을 가뿐히 지워 내며 해사하게 웃었다.
“아무튼 잘됐네요. 아이리스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원하는 대답이 이게 아니었던 걸까? 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아이리스는 제 이마를 탁, 소리 나게 때렸다. 그러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안색을 살피니 회색 눈동자에 허망한 눈빛이 얼핏 스쳤다.
“아이리스?”
“…네가 이럴 때 눈치가 없어서 다행인지 모르겠다.”
“뭐가요?”
“그냥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네가 왜 그 교수 제자인지 알겠다.”
잠깐. 칭찬이겠지? 근데 왜 이렇게 욕처럼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레인의 하나뿐인 제자라는 건 내게 둘도 없는 자랑거리인데, 왠지 아이리스의 의도는 그게 아닌 것 같다.
가늘게 뜬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니 아이리스가 애써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디 가는 길이었어?”
“온실이요.”
“나도 따라갈래.”
“어, 왜요?”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
“그냥….”
“불안해서 혼자 못 보내겠어. 됐냐?”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솔직히 말하면 한소리 듣겠지. 자꾸만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숨기며 서둘러 온실로 향했다. 열심히 앞서 가는 나를 금세 따라잡은 아이리스가 대뜸 물었다.
“근데 아까 그놈 말이야.”
“네에.”
“북쪽에서 만나자는 게 뭔 소리야?”
“그곳에 도움이 필요한 마물이 있어서요. 근데 그쪽도 ‘마침’ 같은 마물을 찾고 있었죠.”
“또 그 교수랑 가는 거야? 쉬는 날이 없네.”
“하하, 뭐….”
뒷말을 대강 얼버무렸다. 쉬는 날에 아스레인의 저택에서 함께 지냈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은근히 아이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의심을 하진 않았다. 도리어 ‘북쪽’이란 단어에 꽂힌 듯 보였다.
“북쪽이라…. 꽤 험난하겠네.”
“가 봤어요?”
“아니,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이 그쪽 출신이었어. 게다가 일할 때 쓸데없이 말이 많아서 고향 얘기를 주구장창 했거든.”
고향 출신의 이야기라면 꽤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혹시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싶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거긴 어떻대요?”
“험지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비슷하지 뭐. 차갑고, 딱딱하고.”
“그럼 외지인을 썩 반가워하진 않겠네요.”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실제론 그 반대래.”
반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북쪽 설원이 유명한 순례길 중 하나잖아. 지금도 순례하는 사제가 종종 마을에서 신세를 지나 봐. 그래서 외지인에게는 꽤나 호의적인가 보더라고.”
“만약 사제가 아니면요…?”
“나야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설원에선 가족도 못 알아본댔어.”
“아?”
“눈보라가 치는 데다가 두꺼운 옷을 둘러싸고 있는데, 누가 사제인지 알겠어? 그러니 외지인이라면 일단 잘해 주고 보는 거야. 신을 안 믿어도 왠지 사제에게 성을 냈다가 천벌받을까 두려운 거지.”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본디 사람이란 주변 환경이 위험할수록 절대적인 존재를 따르게 된다. 혹한의 설원과 인접한 마을 주민들이 신을 따르는 거나 사제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변변한 신전은 없지만, 여러 종교가 설파돼서 신도는 꽤 많대.”
“그렇군요….”
신도가 많다. 이 특징을 어딘가 써먹을 수 있을까. 만약 ‘헤메라’의 이름을 쓸 수만 있다면…. 잘못 엮여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지만, 리스크가 큰 만큼 효과는 톡톡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어느새 온실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이리스와 나란히 온실로 들어가 키코로가 있는 바위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심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리스가 물었다.
“여기 뭐가 있는데?”
“키코로라는 마물이에요. 워낙 특이한 개체라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중에 코로가 아이리스를 닮았어요.”
“마물이 나를 닮았다고?”
대답 대신 씨익 웃기만 하자 아이리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서 키코로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 누르와도 잘 어울린 그라면, 분명 키코로와도 사이좋게 지내 줄 것이다.
마침내 키코를 처음 마주친 바위 앞에 다다랐다. 새하얗다 못해 반짝이는 키코는 오늘도 바위 정상에서 유리벽 너머로 스며드는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키코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미안. 일광욕을 방해했어?”
어딘가 한참 이상한 인사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아이리스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뭐야?”
“네?”
“방금 네가 말한 거 아냐?”
“아뇨. 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키코였다. 하지만 변명하기도 전에 옥구슬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리스가 또 다시 고개를 휙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이리스. …지금 이 목소리가 들려요?”
“잘만 들리는데?”
“마물의 목소리가 들린다고요?!”
“내가 너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아이리스는 분명 키코의 목소리를 들었다. 의심만 가중되던 차에 문득 키코가 하는 말이 왠지 익숙하다는 걸 눈치 챘다.
“내가 갑자기 너희의 영역에 들어온 건 사실이니까.”
틀림없다. 저건 내가 처음 키코로를 만났을 때 했던 말들이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키코를 뚫어지게 쳐다보니 아이리스가 금세 사색이 되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코를 가리킨 아이리스는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지, 지금 저 마물이 말하는 거야?”
“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키코?”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이름을 부르니 키코가 새하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윽고 왠지 모르게 어색한 발음이 온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하, 안녕? 하하, 안녕?”
설마… 인간의 말을 따라 할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