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라비린토스. 눈보라가 치는 그 감옥엔 혹독한 겨울이 영원히 이어졌다.
누군가 설원을 탈출하고자 해도 경비병들은 막지 않았다. 정확히는 막을 이유가 없었다. 굳이 힘을 들여 쫓아가지 않아도 혹한에게 먹혀 동사할 뿐이니까. 그리하여 차갑게 얼어붙은 사체들은 무심한 설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라비린토스는 가히 미궁이라 불릴 만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얽히고설킨 길도 없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눈보라가 베일이 되어 그 안에 갇힌 죄수들을 영원히 떠돌게 했다.
그런데 과거의 흔적만이 남은 그곳에 이카로스가 잠들어 있다. 신탁은 그리 예언했다.
‘순리를 배반한 자. 한때는 창공을 지배했으나, 이젠 새하얗게 썩은 날개. 흔들리지 않는 별을 바라보며 녹지 않는 감옥에 갇힌다. 훗날 신의 뜻을 가진 이가 이 앞을 지남에도 하얀 베일에 뒤덮여 죄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원체 신탁이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단 사실은 알지만, 몇몇 문구가 신경 쓰였다. 특히 새하얗게 썩은 날개란 부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신력으로 상처 입은 날개의 상태가 꽤나 심각한 걸까.
이러나저러나 서둘러야만 했다. 그래서 아스레인이 남은 일을 끝내는 대로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출발을 며칠 앞둔 지금,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태오. 소식 들었나.”
“…네? 어떤 소식이요?”
연달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아스레인이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잔뜩 찌푸린 미간을 보니 썩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지프 일행도 이카로스를 찾아 북방으로 떠난다더군.”
“설마 라비린토스라는 걸 알아낸 거예요?”
“다행히도 지역을 확정 짓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추적 범위를 설원으로 좁힌 것 같네.”
물론 드넓은 북쪽에 설원이 라비린토스 하나뿐인 건 아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협력을 받은 데다가 수적 우세에 있는 그들은 금방 추적 범위를 좁혀 올 것이다. 마치 어망을 들고 호수에 있는 물고기를 구석에 몰아넣듯 서서히 숨통을 조이겠지.
이카로스의 날개가 덫에 걸리기 전, 먼저 그를 구해야 한다.
“어떻게 알았대요?”
“북쪽 신전에서 순례 기록을 제공받았다고 했네.”
“…순례 기록이요?”
“아마도 황실 산하의 연구소이니 선뜻 건네준 모양이지.
제아무리 신전이라 한들 황실의 위세는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앞으로 북쪽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얻을 때도 ‘황명’이란 단어 하에 수많은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혹시 기록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세요?”
“순례길에 오른 사제가 거대한 빙산을 봤다던가. 그 안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지만, 눈보라가 극심해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더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눈보라가 사제의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든 덕분에 순례 기록엔 정확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았단다. 따라서 시지프가 가진 단서는 눈보라가 치는 거대한 빙산뿐이다. 출발선은 우리가 조금이나마 앞서 있었다.
“…지금도 라비린토스엔 마법이 걸려 있는 거죠?”
“음. 타르타로스와 마찬가지로 악용 가능성 때문에 마법은 그대로 두었다고 들었네.”
“그들이 조사를 위해 마법을 풀 수도 있지 않나요?”
“그리 간단하게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아니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다행인 건가?
혹한의 설원. 극악한 범죄자조차 쉽게 도망치지 못하는 감옥. 만약 이카로스를 찾고자 한다면, 탈옥한 죄수처럼 똑같이 설원을 헤매야만 한다.
그나마 라비린토스로 가면 순례한 사제가 그랬듯 이카로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벌써 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태오.”
“네, 네?”
“수업에 다녀올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게.”
“…그럴게요.”
애써 웃으며 아스레인을 배웅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다정한 그는 매번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초조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여유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수한 엑스 표가 그려진 지도를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아직까지 우리가 앞서고 있잖아….”
그래. 아직까지는.
하지만 그 말을 달리하면, 자칫 따라잡힐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
요즘 들어 학교에 붙어 있는 시간이 부쩍 줄어드는 것 같다. 캄페 산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리를 비우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론만 배우기보다는 현장을 뛰고 싶어 했으니, 어쩌면 소원이 이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이번에도 무사히 이카로스를 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봄이 다 됐네.”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대체 얼마만의 산책이지? 계속 연구실과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계절이 변한 것도 몰랐다. 기왕 바람을 쐬려고 나왔으니 온실에 들르는 게 좋겠다. 설원으로 떠나기 전에 누르도 보고, 혹시 모르니 키코와 코로에게 이카로스에 대해 재차 물어야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온실로 향하던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썩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싱그러운 봄바람은 순식간에 매서운 칼날이 되었고, 기분 좋은 새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호흡을 고르곤 뒤를 돌아보았다.
“…시지프 씨.”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봐 주는 겁니까? 영광이군요.”
오늘따라 유독 시지프의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주름 없는 재킷부터 시작해서 가르마를 타서 넘긴 머리카락이나 때 묻지 않은 장갑까지- 그건 일종의 강박증인 것 같았다. 빈틈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건지, 단순히 완벽주의자 성향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인위적인 분위기가 자아낸 거리감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학교에는 또 무슨 일이시죠?”
“태오 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드럽게 웃는 낯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질문이 날아올 것이라고. 역시나 시지프는 에둘러 대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스레인 교수님께서 연구 협력을 거절하셨더군요.”
“…….”
“따로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의 눈매가 어스름한 초저녁에 뜨는 그믐달처럼 가늘어졌다.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언제든 찌를 수 있도록 갈아 둔 은장도 같았다. 휘말리지 않으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데, 시지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면, 먼저 이카로스를 찾아서 손에 넣으려고?”
“시지프 씨. 그는 물건이 아니에요.”
“이런….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네요.”
살짝 놀라서 입을 가리는 행동에는 진심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와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태도가 시지프의 본의일 테니까.
덩달아 속내를 감추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카로스의 상태가 좋지 못할 것 같아서 하루라도 서두르려고요.”
“그런데 왜 저희와 협력하지 않으시는 거죠?”
“목적이 다르니까요.”
“…예?”
“저희가 먼저 찾는 한, 연구가 아니라 보호가 우선될 거예요.”
단호하게 선을 그으니 시지프는 제법 당황한 듯 보였다. 방금 한 말은 철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는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희가 이카로스를 해치리라 생각하시나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그걸 긍정이라 받아들이든, 회피라고 여기든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직 인간을 위해 마물을 연구하는 시지프는 적이 되진 않더라도 결코 같은 편은 될 수 없다.
장황한 설명 대신 엷은 미소로 대신 답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희미한 적의를 느낀 걸까. 배뚤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살짝 파들거렸다. 이내 시지프는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했다.
“태오 군. 저희 연구소는 제국을 위해서 일해요. 그리고 제국은 곧 황제 폐하에 의해 존재하죠. 만약 방해한다면, 폐하의 앞길을 가로막는 거나 다름없어요.”
서서히 거리가 좁아지자 기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태양을 등진 시지프의 얼굴엔 습관처럼 만들어진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반면에 서슬 퍼런 안광이 빛나는 눈동자는 감정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춰선 그가 말했다.
“…화를 입는 게 두렵지 않으신가요?”
화를 입는 게 두려워? 그랬다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내게 진정 두려운 것은 이카로스의 소재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이카로스를 찾는 일이다. 이런 유의 협박은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태오 군은 고작 평민이에요. 단죄의 석상에선 당신을 그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요?”
다행이다. 시지프는 아직 이 사건에 태자가 연루되어 있단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부디 끝까지 모르길 바란다. 유리한 패는 오래 숨길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어떤 게임이든 얕보일수록 이길 확률은 높아지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의 앞길을 막겠어요. …저 또한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걸요.”
“호오. 그럼….”
“마물을.”
하지만 할 말은 해야지. 가볍게 말을 가로채자 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마물을 보호하는 것이 곧 제국의 평화를 도모하는 일 아니겠어요?”
타협할 여지 없는 정론을 들이대자 시지프는 입술을 꾹 닫았다. 아무래도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본 모양이다. 이윽고 흘러나온 한숨에선 답답한 마음이 짙게 드러났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요.”
“시지프 씨야말로 제 진심을 알아 주시지 않네요.”
곧장 말을 받아치자 옅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닌 평민 주제에.”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정확히 귓가에 꽂혔다. 이게 지금껏 시지프에게서 느껴지던 왠지 모를 거리감의 원인이었나. 분명 비슷한 처지의 평민이라 반갑다고 했으면서, 속으론 차등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태오 군. 잘 들어요.”
내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어지간히 거슬렸나. 그 와중에 마음을 다잡는 것도 제법 대단하다. 애써 미소를 유지한 시지프가 내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닿고 싶지 않아 뒷걸음질 치려던 그때였다.
탁-! 불쑥 튀어나온 손이 시지프의 팔을 세게 낚아챘다.
“뭐야? 당신.”
잔뜩 날이 선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불같이 흉흉하게 타오르는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이리스였다.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부르려다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리스까지 시지프에게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리스에게 물러서라고 눈짓을 보내도 소용없었다.
“모르는 얼굴인데… 아는 사람이야?”
그저 침묵을 지켰다. 곧 죽어도 지인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리스가 적당히 시지프의 옷차림을 보고 귀족이겠거니 싶어 물러서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표정은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그쪽은 왜 모르는 애한테 수작질이죠?”
저질렀다. 머릿속으로는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속이 시원한 이 느낌은 뭘까. 잠시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다가 끼어들 틈을 놓쳤다. 대놓고 공격하는 투에 시지프는 헛웃음을 흘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뼛속부터 못 배운 티가 나는군요. 제가 누구인 줄 알고 말을 함부로 하시나요?”
“내 말투가…. 아니, 제 말투가 문제였나요? 거 미안하게 됐네요.”
순순히 손목을 놔준 아이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예의는 지킬 사람한테만 지키면 된다고 배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