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 (140/305)

#140

모든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신은 단지 인간의 기도에 응답했을 뿐이다. 간절한 염원은 마침내 마물을 물리치는 힘이 되고, 신력에 상처 입은 마물은 인간을 적대한다. 그리하여 두 종족 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대물림된다.

대체 누가 대륙에 전쟁의 불씨를 떨어뜨렸는가.

“…그걸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미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몰라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나마 새로이 탄생한 헤메라의 존재가 변수가 될 수 있을까. 과연 단단히 비틀려 버린 세계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게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생애 처음으로 신께 기도할 텐데….

아무렴 지금은 이카로스를 찾는 데 집중해야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로 돌아오니 여느 때처럼 아스레인이 반겨 주었다.

“…아직 계셨네요?”

“어딜 다녀온 건가.”

말하자면 길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의자를 끌어다가 아스레인의 옆에 가져다 놓고 앉았다. 조용히 일하던 아스레인은 다소 당황했는지, 처리하던 서류마저 내려놓고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내 차근차근 생각의 흐름을 설명하니 아스레인이 물었다.

“그래서 신탁을 열람하고 싶다고?”

“네. 혹시 이카로스에 대한 단서도 그 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아쉽게도 내게 허락된 신탁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정녕 신탁을 접할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황족이라면 신탁에 접근할 권한이 있고, 영광스럽게도 태자와 대면할 수 있는 사이다. 하지만 칼리온이 선뜻 도와주리란 확신은 없었다.

신탁은 황족과 대사제만이 볼 수 있다. 그건 오래전부터 이어진 유구한 법도였다. 아무리 하늘 아래 두려울 것 없는 제국의 태자라지만, 제멋대로 법도를 깨진 못할 것이다.

“그럼….”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건가?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입가를 톡 건드렸다. 잉크와 종이 냄새가 은근하게 배어난 손길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버릇.”

“아, 죄송해요.”

그만 입술을 괴롭히겠다며 어설픈 미소를 지으니 아스레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손을 거두었다. 다시금 깃펜을 들고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일이 바쁘니, 내일 함께 가지.”

“네? 어디를요?”

“어디겠나.”

짤막한 말이 퍽 단호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 주지 않는 바람에 무거운 침묵이 연구실을 짓눌렀다. 일에 집중한 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문득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뇌리에 스치는 생각을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서, 설마 태자궁이요?”

스슥- 툭. 서명을 하고 마침표를 찍는 펜촉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내가 정답을 맞힌 모양이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다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전하께서 부탁을 들어주실까요?”

“당연히 거절할 걸세.”

“네? 그럼 어떻게….”

“들어주게 만들어야지.”

저절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들어주게 만들어? 뭐… 칼리온을 협박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 아스레인이라면 회유에 가깝겠지. 하지만 저건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빠르게 서류를 훑어보는 금안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처음으로 아스레인이 일을 낼까 봐 내심 불안해졌다.

“전하만 계시면 신탁을 열람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 하지만 우린 보관소에 들어가지 못하네.”

“보관소요?”

“지금까지의 신탁과 순례 기록은 전부 황성 내부에 있는 보관소에 있네. 세월에 따른 종이 노화와 외부 침입에 따른 훼손을 막기 위해 공간 전체에 마법을 걸어 놨지.”

“…그럼 전하께서 서적을 가지고 나오시는 건요?”

“그것도 불가능하지. 보관소에는 아무것도 들고 들어갈 수 없고, 무엇도 가지고 나올 수 없네.”

듣기만 해도 보관소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구석구석까지 사람이 돌아다니는 황성에서 감시를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아스레인의 말은 포기하는 쪽이 빠르다는 것처럼 들렸다.

“다 합쳐서 양이 어느 정도인데요?”

“전해 듣기론 도서관 한 층 정도 된다더군.”

아. 몇 권 들고 나오는 건 고사하고, 한 번 훑어보기도 힘들겠다.

보관소에 황족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불가하다. 동시에 서적을 들고 나올 수도 없고, 중요한 부분을 받아 적을 종이와 펜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탁에 접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

“네, 네?”

“전에도 말했잖나. 걱정하지 말고, 자네의 감에 집중하게.”

올곧은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신뢰로 다져져있었다.

“길을 여는 건 내가 할 테니.”

***

황궁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심지어 황족이 지내는 곳은 궁궐의 심층부에 있다. 내로라하는 귀족조차도 여러 관문을 지나쳐야만 닿으니, 나 같은 평민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성역이다.

정확히는 성역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군.”

“아닙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백작님이시니까요.”

“전하께선 어디 계시지?”

“지금 막 소식을 들으셨을 테니, 곧 오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황실의 위용도, 태자의 위세도 전과 같지는 않다. 제 집 드나들 듯 이동 마법진을 이용한 탓에 궁궐에 아무 감흥이 없어졌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태자의 보좌관인 세핀의 태도도 한몫했다.

“그사이 차라도 즐기시죠. 어제 막 어린 찻잎이 들어왔습니다.”

“저….”

“태오 님께선 뜨거운 차도 괜찮으십니까?”

“예? 아, 네. 감사합니다.”

아스레인은 그렇다 쳐도, 다짜고짜 태자궁에 쳐들어간 나를 달갑지 않게 여길 줄 알았다. 하지만 세핀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를 맞이했다. 능숙하게 접견실로 안내해 향이 좋은 차까지 대접해 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때 아닌 티타임을 즐기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게 연락 없이 찾아오기 있어요?”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으면 태자답지 않게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전하.”

곧장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차를 즐기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 꽤나 못마땅했는지, 진회색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세핀한테 소식을 듣자마자 얼마나 놀랐는데요.”

“가끔은 자신이 한 행동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둘이서 한 번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고요.”

천하의 칼리온이 당황할 때도 있구나. 항상 느긋한 미소로 무장하고 있던 사람이 소파에 털썩 앉아 하소연하니 제법 신선했다. 인간적인 모습을 조용히 구경하는데, 아스레인을 향한 화가 이번엔 내게 튀었다.

“태오도 그래. 적어도 서신 하나 넣어 줄 수 있잖아?”

“제 이름으로요? …전하께 닿지도 않을 걸요.”

“그런가?”

어느새 느긋한 태도로 돌아온 칼리온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뭐, 앞으로 네 이름을 단 물건은 무조건 궁으로 들이라 할게.”

“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좋은…건가? 남이 타 준 차는 절대 입에도 안 대는 칼리온이니, 나름의 신뢰 표시일지도 모른다. 아무렴 아스레인이 옆에서 말리지 않으니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숨을 돌릴 겸 차를 마신 칼리온은 곧장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설마 둘이서 나란히 안부 따윌 물으려 들른 건 아닐 테고.”

눈치 빠른 칼리온의 물음에 아스레인은 이카로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이카로스를 찾는 목적은 연구라고 둘러댔다. 달리 찾을 방법이 없어 신탁에서 단서를 얻고자 한다고 말하니, 칼리온은 삽시간에 표정을 굳혔다.

“신탁의 전문이라. 아벨의 부탁이니 노력은 해 보겠지만… 잘 모르겠네요.”

예상한 대답이었다. 적당히 흘려 넘기는 태도는 거절에 가까웠다. 그 의도를 모를 리 없는데도 아스레인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던 그는 칼리온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이카로스에 대해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버지가요?”

일순 칼리온의 눈빛이 달라졌다. 번뜩이는 눈동자는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 같기도, 먹잇감이 뺏길 위기에 놓인 독수리 같기도 했다. 쉽게 빈틈을 내어주지 않는 칼리온의 아킬레스건이 설마 아버지일 줄은 몰랐다.

조금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아 냉큼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폐하께서 설립하신 연구소 소속의 연구원이 찾고 있어요.”

“…갑자기 혈안이 된 데는 위에서 압력이 있는 거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저희가 먼저 이카로스의 소재를 파악해야 돼요.”

황제보다 먼저. 그게 아스레인이 가진 승부수였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지, 칼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기만 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의 주변으로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 탓에 섣불리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스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이제는 거의 만나 주지 않으세요.”

“흐음, 예전엔 문안 인사 정도는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한때는.”

그저 나이가 들어 무리가 온 줄 알았건만, 친아들의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을 정도면 꽤나 병세가 심각한 듯했다. 다음 대 계승자가 아무리 멀쩡해도 황위가 교체될 땐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황제이기 전에 칼리온의 아버지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신 걸까요…?”

“아니. 의원에게서 요즘 들어 병세에 차도가 보인단 말을 들었어.”

곧바로 다행이라고 말하려다가 순간 움찔했다.

“쯧.”

애써 넘기려했지만, 혀를 차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표정에 서린 건 다름 아닌 아쉬움이었다.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온은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나이가 됐으면 적당히 물러서는 편이 좋지 않아? 너무 끈질긴 건 꼴 보기 싫잖아.”

“그….”

“태오. 이러다 나, 아버지랑 나란히 관짝으로 들어가면 어떡해? 내 위패에 태자라고 적히거든 몰래 와서 좀 바꿔 줄 수 있겠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조만간 황제가 되실 거예요.’라고 단정 짓기엔 이제 막 나아 가는 사람을 골로 보내는 꼴이었다.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순간이었다.

“전하.”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아스레인이 날이 선 눈빛으로 칼리온을 쏘아보았다.

“언행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여기 셋뿐이잖아요? 피곤하게 성군으로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꼭 잔소리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칼리온이 대충 시선을 피했다.

내가 뭔가 잘못 알았나. 예전 칼리온은 곧 황위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단 아스레인의 말에 주춤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병세가 나아지는 걸 다행이라 여길 줄 알았는데.

“그 자리가…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슬쩍 물어보니 칼리온의 시선이 내게 휙 날라들었다.

“부담스러워?”

두툼한 눈썹 한쪽이 비죽 올라갔다. 뭔가 잘못 건드렸다 싶은 그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접견실 안을 가득 채웠다.

“태오. 난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몸이야. 부담스러울 리가 없잖아? 지금으로선 이 척박한 오지에 ‘내 사람’이 아직 부족하다 느낀 것뿐이지. 이대로 황위에 올라 봤자 아버지와 비교되며 물어뜯길 거야.”

“아….”

“설마 그런 걸 걱정할 줄이야. 내가 그 정도 그릇으로밖에 안 보이는 건가?”

의도치 않게 칼리온을 도발하고만 모양이다. 뒤늦게 오해였다고 변명해도 소용없었다. 호기롭게 빛나는 눈동자는 이 제국을 호령하고도 충분했다.

“뭐, 좋아. 나도 아버지께서 왜 이카로스를 찾는지 궁금해졌어. …아니, 내가 먼저 찾았다고 하면 얼마나 당황할까?”

방법은 글러도 아무렴 칼리온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으니 된 거 아닐까. 가지런한 입꼬리를 싱긋 올린 칼리온이 선뜻 말했다.

“아주 잘 알겠지만, 나 혼자 보관소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타인을 들이기란 어려워요.”

그 말 그대로였다. 칼리온을 앞장세운다고 한들 아스레인과 내가 들어가리란 보장은 없었다. 황제에게 의심을 사는 것뿐 아니라, 칼리온의 명성에도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 당장 머릿속엔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벨이라면 방법을 생각하고 온 거겠죠?”

그러자 아스레인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몸을 틀었다.

“바로 보관소로 앞장서시죠.”

“…지금? 달리 준비할 건 없어요?”

느긋하게 머리카락을 넘긴 아스레인은 이맛살을 살짝 좁혔다. 마치 그런 걸 왜 묻느냐는 듯 불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칼리온을 살짝 내려다본 아스레인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뭐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될 사람이 절대적인 내 편이 되면 이런 느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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