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 (138/305)

#138

둥그런 티 테이블 사이로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야외 테라스도, 봄을 알리는 화사한 꽃장식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도 소용없었다. 툭, 툭. 조그마한 집게로 각설탕을 집어넣는 소리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들렸다.

이윽고 그는 찻잔에 각설탕을 빼곡히 채워 넣으며 말했다.

“단 건 싫어하나요?”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가 썩 반갑지는 않았다. 차라리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는 쪽이 낫지. 예나 지금이나 미소로 속내를 감추는 사람은 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칼리온 태자나 닉스에게 단련된 덕분에 여유롭게 응대할 수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단 걸 좋아하시나 봐요.”

마주 웃으며 대답하자 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역시 호불호를 묻는 것만큼이나 좋은 화제는 없다. 그리 확신했으나 뒤이어진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싫어해요.”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끊임없이 각설탕을 홍차 안에 넣었다. 대체 왜 자신이 싫어하는 짓을 스스로 하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던 반문을 겨우 삼켰다. 심지어 싫어하는 단맛이 가득 풍기는 홍차를 마시고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특이하고도 수상쩍은 사람. 그게 그의 첫인상이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시지프 마르시아스라고 합니다. 부디 시지프라고 불러 주시길.”

“아, 저는….”

“태오 군, 맞죠?”

이제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느냐고 물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내 이름이 팔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마물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데다가, 원체 유명했던 아스레인의 제자이니까.

그저 소문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평민이니 말씀 편히 하세요.”

“아아, 저도 평민이에요.”

“네? 그럼 ‘마르시아스’라는 성은….”

“그저 제 후견인이신 마르시아스 백작님의 성을 감사히도 허락받아서 쓰는 것뿐이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피후견인에게 성씨를 물려줄 정도라니. 아무래도 마르시아스 백작은 시지프를 꽤나 촉망하는 모양이다. 비록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니었으나 차후 조사하는 게 좋겠다.

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는데, 뜬금없는 질문이 불쑥 다가왔다.

“안겔루스, 어때요?”

“어, 음. 뭐… 좋아요.”

“다름이 아니라 저도 여기서 공부했었거든요. 오랜만에 오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예? 졸업생이셨어요?”

“하하, 졸업한 지는 좀 됐어요.”

거리낌 없이 웃는 모습이 첫인상과 사뭇 달랐다. 왠지 후배들이 선망하는 선배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도서관에서 마주했을 때도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인상 좋은 축에 속했다.

그저 내가 그에게 남은 신력의 잔재를 느꼈을 뿐.

“어느 학과였는데요?”

“당연히 마물학과죠. 물론 그땐 교수진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아쉽게도 소문으로만 듣던 마물학자께서 이곳의 교수로 오기 직전에 졸업했죠.”

아스레인을 말하는 건가. 그건 그렇고 아스레인이 태자의 요구로 인해 교수직에 임명되기 전에 졸업했다니, 시지프는 보기보다 나이가 꽤 있는 편인가 보다.

조용히 새로운 정보를 정리하던 중에 시지프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 맞다. 태오 군은 ‘그 마물’을 실제로 봤죠?”

“무슨….”

“닉스 말이에요.”

깜짝이야. 순간 아스레인을 말하는 줄 알았다. 어색하게 굳은 표정을 감추려 일부러 느릿하게 차를 홀짝였다.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집요한 푸른 눈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혀뿌리에 남은 쓴맛을 삼키며 능청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았죠.”

“하아, 저도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마물은 평생 연구만 해도 스치기 쉽지 않잖아요.”

“시지프 씨. 연구소에서 일하세요?”

“네. 졸업 후에 폐하께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썩 달갑지 않은 소식에 잠시 표정이 굳었다.

“폐하…요?”

“정확히는 폐하께서 설립하신 연구소지만요. 아무렴 저 같은 걸 써 주신다니 영광이죠.”

황실의 사람이라면 그나마 태자 쪽이길 바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현 황제의 수하라니, 애써 당혹을 감췄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황제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에브게니아의 정통 계승자라는 것과 ‘미노스’란 이름뿐이었으니까.

“시지프 씨가 그만큼 능력이 있으니 쓰시는 거겠죠. 대단하세요.”

“에이, 뭘요.”

장난스럽게 웃어넘긴 시지프는 이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보니까 우리… 처지가 꽤 비슷한데, 서로 돕고 살면 어때요?”

“…예?”

“정보를 교환하잔 얘기예요.”

잡담은 이만하려는지,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띠었다.

“저는 줄곧 이카로스를 찾아다녔어요. 그의 날개깃을 어떤 약재로 쓸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개인적인 연구 차원인가요?”

“제국을 위해서죠.”

기록이 거의 없는 전설의 마물이니 연구자로서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이카로스를 관찰하기 위해서나 그의 깃을 약재로 쓰기 위해서 찾고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 한 구석에 계속 찜찜한 기분이 남아있는 걸까.

“어때요?”

“그….”

결국 찻잔을 어루만지며 차분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죄송하지만, 전 아직 조사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다지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은 안 될 것 같네요.”

“그럼 제 쪽에서 정보를 드릴까요.”

“네?”

“그럼 태오 군한테도 도움이 되겠죠.”

겨우 만들어 놓은 표정이 단숨에 깨졌다.

어째서? 굳이 저쪽에서 좋은 패를 드러내는 이유가 뭐지…? 일부러 혼선을 주려는 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시지프가 입가를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제가 왜 정보를 주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네요?”

“그야… 시지프 씨가 얻는 이득이라곤 없으니까요.”

“하하, 그건 그렇죠. 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찾아다니면 더 빨리 찾지 않겠어요? 전 이카로스를 찾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거든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카로스를 먼저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 단서가 없는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일은 없었다.

“…그럼 말씀해 주시겠어요?”

긍정적인 대답에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잠시간 주변을 둘러본 시지프는 누군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쪽. 저는 그곳에 이카로스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죠?”

“그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신전이 북쪽이거든요.”

“날개를 다친 신전 말씀이시군요.”

시지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력으로 인한 부상 때문에 일단 도망쳤지만, 멀리가진 못했을 거예요.”

“당시 사제들이 도망치는 그를 쫓지 않았나요?”

“글쎄요. 굳이 힘들게 쫓아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쫓아내면 그만인 것을.”

그런가. 순순히 동조하려다가 불현듯 의문이 떠올랐다.

“단순히 쫓아내는 게 목적이었던 자가 날개를 공격하나요? 심지어 그곳은 신전이었어요. 신력이 깃든 성물이면 충분히 쫓아내고도 남죠.”

이미 신전 가까이로 와서 힘을 잃은 이카로스를 죽이고자 공격했을 것이다. 신성한 영역에 들어온 마물은 적이니까. 게다가 이성을 상실한 이카로스는 신전에 상당히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태오 군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반드시 추격했을 거예요.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마물도 아니고, 창공의 지배자라 불린 자예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놓쳤거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사라진 거겠죠.”

“하지만 상처가 있잖아요? 제아무리 이카로스라고 한들 멀리 못 갔을 테죠.”

그러고 보니 닉스는 신력으로 인해 날개를 다친 이카로스와 마주쳤었다고 증언했다. 그게 만약 쫓기는 길이었다면…? 닉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떠난 것도 이해된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로 소식이 끊겨 버린 걸까.

신도들은 여러 마을에 두루 퍼져있으니 감시 카메라 역할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당시는 마물 사냥꾼이 당당하게 설치던 시대다. 소문을 들었다면 누군들 이카로스를 잡으려고 설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잡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이카로스가 갑자기 증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신전의 추격을 피해 예상치도 못한 장소로 도망친 것인가. 만약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신력에 상처 입은 몸으로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었을까.

“…으음….”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신전과 사제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시죠?”

“아뇨.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한 모양이에요. 신의 사랑을 받는 사제들이 설마 마물의 피를 보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리가 없잖아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리려는데, 시지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태오 군. 그 시절엔 그게 극단적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연했죠.”

“…….”

“물론 지금도 그래요. 신전에 침입한 마물을 그 누가 사랑으로 보듬어 줄까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꾹 다물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마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마물을 아껴야죠. 하지만… 마물이 우리 인간보다 중요해질 순 없어요. 결국 ‘인간을 위해’ 마물을 공부하는 거니까.”

이제야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하지만….”

“신전도 인간을 지키기 위한 일을 했을 뿐이잖아요?”

시지프의 말대로 비슷한 처지를 만났다고 생각했건만, 결정적인 지향점이 달랐다.

결국 그가 마물을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였다. 아마 이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마물학자들이 시지프와 같겠지. 그러니 아스레인이 마물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가치를 논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시지프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네요.”

신념의 차이. 백번 양보해서 그리 생각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좋은 소식이 있거든 부디 연구소에 연락주세요.”

반드시 그보다 이카로스를 먼저 찾아야 한다.

***

하루가 지나도 복잡한 머릿속은 가라앉을 겨를이 없었다. 연구실에 돌아와 이카로스와 관련된 서적을 찾다가도 넋을 놓기 일쑤였다. 같은 페이지를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불쑥 들었다.

수업을 막 끝마치고 온 아스레인의 손에 낯선 문장이 찍힌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연구 협력 요청이 왔네.”

“어떤 협력이요?”

잠시 망설이던 아스레인은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카로스를 찾는다더군.”

불길한 낌새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시지프 마르시아스인가요?”

마음속으로 아니기를 바랐건만,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진실을 말했다. 짐짓 놀란 아스레인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인상을 험하게 찌푸렸다.

“자네가 그자를 어떻게 알지?”

“어제 도서관에서 만났어요.”

“…뭐?”

“걱정 마세요. 별일 없었어요. 제가 이카로스와 관련된 서적을 찾고 있는 걸 보고 접근한 것 같았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어차피 말할 일이었으니, 시지프와 나눈 대화를 빠짐없이 전했다. 퍽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길 들어 주던 아스레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날개깃을 연구하겠다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군.”

“이카로스의 날개를 약재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던데요?”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왜요?”

“마물의 일부가 종종 약재로 쓰이는 건 사실이네. 게다가 약재가 아니더라도 마력이 깃들어 있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지.”

“…사이누르의 마안처럼요?”

“그래. 하지만 이카로스의 날개는 지극히 평범하네. 세이렌의 살을 먹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미신처럼 헛된 소문에 불과하지.”

마물을 제대로 공부한 연구원이라면 더욱이 이카로스의 날개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럼 날개깃을 찾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어딘가 수상한 푸른 눈동자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구 협력… 받으실 건가요?”

“아니. 여러 곳에 요청을 보낸 모양이니, 굳이 우리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지.”

대대적으로 이카로스를 찾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황제가 설립한 연구소가 움직인다면 속도는 필시 빠를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진 불안감이 온몸에 번져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마를 짚은 채 가만히 서있으니, 아스레인이 금세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괜찮나?”

“괜찮아요. 그냥… 불안해서요.”

“역시 그자와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얌전히 머리 위에 닿는 손길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신력이 느껴졌어요.”

“그에게서?”

“네. 희미하지만, 확실했어요.”

“그가 신자라고는 듣지 못했네. 게다가 나조차도 신력을 느끼지 못했건만.”

아스레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혹시 그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분명 느꼈어요.”

“아니, 자네를 의심하는 게 아니네. 아마 그때 타르타로스에서 레톤을 마주한 탓에 감각이 민감해진 거겠지.”

“그…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시지프보다 먼저 이카로스를 찾아야 해요. 위험한 거 알아요. 하지만….”

또 나를 위험하다고 말릴까 봐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다정한 눈길이 닿았다.

“태오.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나.”

“…아스레인.”

“자네의 뒤엔 내가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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