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짧은 휴일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며칠간 이카로스와 관련된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을 오고 갔다. 허무하게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계속됐지만,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뭐지?”
건물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얼핏 반짝인 걸 보니, 빛이 반사되는 투명한 유리를 옮기는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되어 인부의 뒤를 밟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온실이었다.
건장한 인부 넷이 천으로 둘러싸인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자 저 멀리서 연구원이 다가왔다.
“다들 수고했어요.”
인부가 사라진 후, 연구원은 상자를 덮은 천을 걷었다. 그러자 물이 가득 담긴 거대한 수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록달록한 산호와 해초가 가득한 걸 보곤 수조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혹시 오필리아가 오늘 돌아간 건가요?”
“아, 네. 그걸 어떻게….”
불쑥 나타나 말을 거니 연구원은 흠칫 놀랐다. 이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금세 화색이 돌았다.
“아~ 전에 오필리아의 먹이에 대해 조언해 준 원생이군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아쉽게도 오필리아는 새벽에 떠났어요. 지금은 이미 바다에 있을 거예요.”
“…갔구나….”
곧 돌아간다고 하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보다. 종종 오필리아가 쉬던 산호만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젠 좁은 수조가 아닌 넓은 바다를 유영하고 다니겠지. 심해에서 더욱 진하고 아름답게 변모할 붉은 지느러미를 상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간 고생하셨어요.”
“하하, 뭘요. 고생은 오필리아가 했죠.”
“그래도요. 막상 보내니 섭섭하진 않으세요?”
“시원섭섭하죠. 춤추는 오필리아를 보면서 차를 마시는 게 낙이었는데….”
뒷말을 삼키는 입가에 쓸쓸한 감정이 머물렀다. 기간은 짧아도 하루 종일 오필리아를 돌보느라 곁에 붙어 있었을 테니 당연히 정이 들었을 것이다. 수조 벽을 쓰다듬는 연구원의 손길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그 후로는 별일 없었나요?”
“아휴…. 말도 마요. 먹이는 그때 해결했다지만, 수질도 문제였어요.”
“수질이요?”
“매번 수도 근처에 있는 바닷물을 떠와서 물을 갈아 주곤 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밤새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며칠을 잠도 못 잤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새벽부터 오케아노스 바다에 가서 물을 충당해 왔죠. 그러니 정말 조용해지더라고요.”
그때를 회상하는지, 연구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오필리아를 위해 꼭두새벽에 학교에서 꽤나 떨어진 오케아노스 바다를 다녀왔다니.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에 뒤늦게 눈치챘다.
“그럼 이 수조 안에 담긴 물은….”
“오케아노스 바닷물이에요.”
“헉, 매번 그 먼 길을 다녀오신 거예요?”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실없이 웃은 연구원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아무튼 이제 필요 없어졌으니, 바닷물은 전부 근처 바다에 흘려보내기로 했어요.”
대단한 사람이다. 오늘도 오필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모양이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퍼석퍼석한 입술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붉게 충혈된 눈엔 일말의 후회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이런 사람과 함께했으니 분명 좋은 기억을 가지고 떠났겠지.
“…연구원님 덕분에 오필리아는 행복했을 거예요.”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요.”
연구원은 쑥스러운 듯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저 멀리서 연구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지, 바쁘게 서류를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럼 다음에 봐요!”
“조심히 가세요.”
어느새 온실 한편엔 나와 빈 수조만이 남았다. 곳곳에 오필리아의 흔적이 남은 수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수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물결에도 반응하는 해초도 흔들리지 않는 와중에 물만 움직이니 이상한 일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꿈실거리던 수면에 이내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니 기다렸다는 듯 물기둥이 하늘 높이 솟았다.
“이건…!”
투명한 물 사이로 보이는 건, 갈라진 균열. 그리고 그사이에 피어오른 붉은 해조류.
울렁거리는 물기둥은 서서히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물결은 곧 머리카락이 되었고, 길게 뻗은 물줄기는 팔과 다리를 만들었다. 신중을 가해 깎은 조각상처럼 날렵하고도 아름다운 인상에 불현듯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시스템?”
마침내 수조에 있던 산호가 튀어 올라 그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뚝, 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베일이 되어 함부로 볼 수 없는 용안을 가렸다. 위세를 나타내는 왕관과 넘실거리며 흘러내린 물빛 머리카락- 저건 오케아노스다.
“오케아노스 님…!”
[그간 잘 지냈느냐.]
물로 형체를 만들어 낸 오케아노스는 수조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한쪽 다리를 꼬고 고고하게 내려다보는데도 거만하기는커녕 우아한 광채가 일었다. 온몸으로 내뿜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 시스템과 똑같은 얼굴이란 생각이 가뿐히 사라졌다.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니 베일 속 가지런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짐의 일부와 짐의 나라가 이곳에 있으니, 달리 어도(御道)를 만들 필요도 없지.]
아, 오케아노스 바다에서 물을 퍼 왔다고 했지. 바다 전역에 넓게 퍼진 마력과 내 안에 있는 오케아노스의 일부가 합쳐져 길을 연 모양이다. 비록 물로 이루어진 형상이라 권능을 행사할 순 없겠지만, 아무렴 대화가 통한다면 충분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오케아노스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못 본 사이 꽤 많이 달라졌구나.]
“오랜만에 인세에 나오셨다면 그럴 수도….”
[아니, 너 말이다.]
천천히 상체를 내게 기울인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삼킨 짐의 일부가 상당히 흐릿해졌군.]
“……!!”
[혼자서는 흡수하지 못했을 터인데….]
뒤늦게 아차 싶었다. 혼돈에 가까운 본질이 합쳐진 건 내겐 꽤 오래된 일이지만, 그 뒤로 만난 적이 없는 오케아노스에겐 새로운 사실이었다. 심해를 꿰뚫는 혜안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보았다.
[금기된 마법이라도 쓴 게냐? 아니면, 신께 기도라도 올린 겐가?]
“고생을 조금… 했죠.”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구나.]
인간의 일엔 무심한 오케아노스라 그런가. 사정을 집요하게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의심스러운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가 대뜸 화제를 돌렸다.
“오필리아는 무사히 바다로 돌아갔나요?”
[그래. 그리고 네 소식을 전해 들었지. …짐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했나.]
“아, 네!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와 주신 건가요?”
나 때문에 바쁜 시간을 내어 행차해 줬다는 꿈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는 입가에 손을 대며 가벼운 코웃음을 흘렸다. 훗, 하고 날카롭게 귓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아닌가요?”
[감히 짐을 불러내려 하다니 100년은 이르다고 말하려고 왔지.]
“죄송합니다….”
[마침 짐도 네가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으니 용서해 주마.]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는지, 오케아노스는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네가 이카로스를 찾고 있단 이야기는 들었다. 하나, 애석하게도 짐과도 소식이 끊긴 지 꽤 되었지.]
“…그랬군요.”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
이카로스를 찾을 방법이 있다고? 희망적인 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뭐죠?”
[물의 가호를 받은 마물들이 짐을 알 듯 이카로스도 마찬가지지. 드높은 창공은 녀석의 구역…. 하늘을 나는 자라면 이카로스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과거 이카로스는 아스레인을 찾기 위해 전 지역을 떠돌아다녔다고 들었다. 누군들 태양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날개를 봤을 터, 하늘에 가까운 마물일수록 목격 가능성은 컸다. 만약 이카로스를 봤다면 마물들 사이에서 전설으로라도 떠돌았을 것이다.
[날개를 허락받은 자를 찾아보거라.]
“감사해요. 오케아노스 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오케아노스는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너는 여전히 헤매고 있구나.]
“…네?”
[아니, 됐다.]
오케아노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려는 걸까. 뙤약볕에 얼음 조각상이 녹는 것처럼 물로 이뤄진 형체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동화 같은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오케아노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앞으로 짐에게 묻고 싶은 게 있거든 태양을 담은 물에 피를 떨어뜨려라. 마음이 동하거든 기꺼이 응해 주마.]
“태양을 담은 물이 뭐죠?”
[필요한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 필요한 때라는 건 대체….”
더 이상 말은 삼가라는 듯 투명한 손가락이 내 입술을 톡 건드렸다. 이내 손을 거두자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이 흘러 턱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혔다. 차가운 손길에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띠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한 번 이어진 물길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으니.]
***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물은 많지만, 막상 찾으려 나서자니 막막했다. 그리하여 눈길을 돌린 곳은 온실 안이었다. 희미하게 새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바위산이 보였다.
“…우와….”
몇몇 새들은 험준한 바위 사이에 둥지를 튼다고 배웠다. 이곳에 있는 마물도 비슷한 습성일까. 갑자기 나타나서 쉬고 있는 마물을 놀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조심스레 바위산으로 다가가니 저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일순 바위틈에 박힌 보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유심히 살피니 깃을 고르는 뾰족한 부리가 보였다.
“어…!”
마치 새 모양 유리병에 태양빛을 모아 둔 것 같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 나갔다. 하필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이름 모를 마물은 털 단장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일광욕을 방해했어?”
어디가 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새하얀 마물이었다. 딱히 인간을 무서워하진 않는지, 마물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경쾌한 알림이 들려 곧바로 마물 도감을 펼쳤다.
“오픈 북.”
허공에 떠오른 갈색 책에 심장이 철없이 두근거렸다. 이내 펼쳐진 페이지엔 역시나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했다.
NO. 64 키코로
-분류: 3급 위험 마물
-최초 발견지: 온실 서쪽 바위산
-외형: 낮에 생활하는 키코는 햇빛을 반사시키는 털로 인해 환하게 반짝인다. 반면, 밤에만 나타나는 코로는 그림자처럼 새까만 털을 가져 모든 빛을 흡수한다. 종종 두 마리가 합쳐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땐 검고 흰 깃이 섞여 있으며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다.
-특징: 일정 시간 이상 떨어져 있으면 한쪽이 반드시 소멸한다. 무성생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자 반려자가 된다.
-관계 평가: 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