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따사로운 햇빛이 스며드는 정오. 새벽이슬을 담뿍 머금은 꽃밭을 뒹구는 꿈을 꾸었다.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은 서로의 뺨을 비비고, 이름 모를 새는 사랑을 바라듯 목 높여 울었다.
녹음 사이로 피어난 노란 꽃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옹기종기 모인 꽃망울이 유채꽃 같기도, 아담한 이파리가 금매화 같기도 했다. 그게 무엇인들 아무렴 좋았다. 바람결을 따라 나부끼는 모습이 퍽 자유로워 보여 덩달아 너른 대지 위에 누웠다.
“으음….”
기분 좋은 온기에 뺨을 비비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 보는 꽃에서는 의아하게도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아득한 의식 너머에서 무언가 떠오를락 말락 했다.
은은하고 신선하면서, 동시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향기를 알고 있다.
이건- 아스레인의 고아한 체취다.
“헉…!”
번쩍 잠에서 깨어나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이었다. 흐릿한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이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아스레인의 체취가 스며든 모양이다. 괜스레 숨을 크게 들이쉬니 마치 그에게 폭 안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헤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데, 창밖에서 어렴풋이 새소리가 들렸다. 벌써 해가 뜬 모양이다. 그럼 자는 사이에 아스레인은 일을 하러 갔으려나.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챙기는 편이 좋을 텐데….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뒤척이던 그때였다.
“잘 잤나?”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일순 환청인가 싶어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그러나 점차 생생해지는 현실감에 등줄기로 머리에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설마.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교, 교수님?!”
“아스레인.”
“왜… 아직도 여기 계세요…?”
고요한 금빛 눈동자가 반갑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라리 막다른 골목길에서 괴한을 마주치는 게 낫지.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는 침대에서 뒷덜미를 잡혀 버렸다.
넋을 잃고 쳐다보니 그의 시선이 슬며시 아래로 향했다.
“이러고 있는데 어찌 갈 수 있겠나.”
“이러고…라뇨?”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가 어깨를 흠칫 굳혔다.
“…아.”
망할. 어째서 내 팔이 아스레인의 허리에 감겨 있는 걸까. 게다가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옆구리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불이라 착각하고 마구 비벼 댄 것도, 따뜻하다고 들러붙은 것도 전부 아스레인이었다.
어쩐지 이불치곤 딱딱하다 싶었어!
“죄, 죄송해요….”
멍청하게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고 황급히 팔부터 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는지, 반듯한 셔츠가 보기 싫게 구겨져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더 자게나. 오늘은 늦게까지 자도 괜찮으니.”
“아뇨….”
아무리 독한 술에 절어도 여기서 다시 잠들 수는 없을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만 흘끔 들자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 보였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버린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퍽 태평해 보였다.
간밤에 한 침대를 쓴 것도, 내내 끌어안고 있던 것도… 전부 나만 신경 쓰는 건가.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음?”
“제가 그… 끌어안고 있었잖아요.”
“곤란하긴 했지.”
그래. 아무리 아스레인이라도 잠결에 끌어안는 사람이 달갑진 않겠지. 괜히 불편하게 만들었단 생각에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 둔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럼 역시 깨워 주시지 그랬어요.”
“왜?”
“곤란했다면서요.”
“아, 그건….”
뒷말을 삼킨 아스레인은 입술 위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참는 게 제법 힘들어서.”
“…네?”
이 사람이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 아무렴 무자각은 위험하다. 막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내가 쌓아 올린 벽을 무참히 부숴 버렸다.
“자는 사이에 만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나. 그런데 나도 모르게 계속 자네에게 신경이 쏠리더군.”
“…….”
“이상한 일이지. 지금껏 누군가에게 닿고 싶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
“뭐, 그래도 일에 집중한 덕분에 무사히 약속은 지켰네.”
이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실은 아스레인은 이미 마음을 자각했고, 나를 놀리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켰다’는 데에 의의를 두는 그를 보니 맥이 툭 풀렸다.
아예 자는 척할 걸 그랬나? 그 후에 아스레인이 딴소리 못하게….
“태오.”
“네, 네?”
“이제 닿아도 괜찮은 건가?”
“…애초에 그냥 한 말이었어요.”
괜스레 토라져서 입술을 비죽거리자 이내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사양하지 않으마.”
그건 상냥한 예고였다. 밤사이에 참은 걸 전부 쏟아 내려는 작정인지, 조심스레 뺨에 닿은 온기는 서서히 턱과 눈가로 번졌다. 사나운 마물을 길들이듯 부드럽고도 능숙한 손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소중하게 대해 주는 게 느껴져 마냥 기쁘다가도, 손가락이 언뜻 민감한 귓가를 스치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으음….”
이윽고 은근한 손끝이 목선을 따라 내려왔다. 이대로 뒀다간 긴 손가락이 서슴없이 셔츠자락으로 들어올 것 같아 황급히 손목을 붙잡았다.
“…간지러워요.”
꾹 깨문 입술 새로 달뜬 숨을 내뱉었다. 손길을 피해 살짝 고개를 비틀자 그에게 받은 귀걸이가 잘그락 흔들렸다. 분명 그의 손은 내게 잡혀 있는데, 어째 계속 만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결 위를 유영하는 시선이 퍽 집요해서 눈가가 금세 발그스름해졌다.
안 돼. 더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주하니 또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건, 사람을 홀리는 마물의 눈이었다.
“아….”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으려 질끈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그의 손을 놓을 생각은 못했다. 이내 잔뜩 찌푸린 눈가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좋은 아침이네.”
뭐, 뭐지? 손가락이야? 내가 알기론 손끝이 그렇게 말랑하진 않았는데. 그럼 설마…. 본능적으로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그리고 몇 초 후, 눈가에 닿았던 것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패닉에 빠졌다.
“…어라?”
아스레인이 내게 입술을 대다니. 입술을….
당황하지 말자. 서양에선 가벼운 키스가 인사라고 들었다. 물론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그런 낯부끄러운 인사를 받은 적은 없지만,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히페리온도 포옹 정도는 익숙했고 닉스도 스킨십을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아스레인. 지금 그… 한 거에 대한 자각이 있어요?”
“음?”
“제 이마에… 아무튼 하셨잖아요.”
보통 안 사귀는 사이끼리 이래? 내가 모르는 제국의 전통이야? 아니면, 오래 산 사람의 여유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무 사이도 아닌데 눈에 입맞춤을 하진 않지. 나 혼자 의미부여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별 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이 괘씸해서 다짜고짜 이유를 물었다.
“왜 하셨어요?”
“…….”
봐. 아스레인도 실은 할 말이 없는 거야. 무의식중에 질러 놓고 이제 와서 이유를 생각하는 거지.
대놓고 물어봐서 당황할 줄 알았건만, 아스레인은 퍽 시원하게 말했다.
“하면 안 되나?”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 버렸다.
“보통은 잘… 안 하죠?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럼 이유가 있으면 해도 되는 건가?”
“…그렇죠?”
“이유라….”
심각하게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겠군.”
역시 이번에도 모른다고 넘어가는 건가. 금세 얼굴에 실망이 드리우려던 차, 진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자네가 악몽을 꾸지 않아서 다행이고, 무사히 일어나 주어서 고맙고, 줄곧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도 자네에게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라니까.”
“…….”
“…이 복잡한 마음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내가 곁에서 사라질까 불안하다고만 하던 아스레인이 맞나. 감정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표현만 들어도 그의 감수성은 예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이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그랬었지. 자네는 내가 왜 불안한지 알고 있다고.”
“…네.”
“이번에도 자네는 답을 알고 있는 건가?”
아스레인은 변하고 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아마 그 자신도 내면의 변화를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망치거나 피하려는 일 없이 마주하려고 했다.
내 감정에 급급해서 메마른 땅을 밀고 나오는 새싹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 씨앗을 뿌린 사람이 바로 나인데도.
“있죠. 아스레인. 지금도 그때도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이에요.”
“…이게? 전혀 다른 것 같네만.”
“푸흐, 원래 마음이란 게 복잡한 거잖아요.”
감정은 오직 살아있는 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중 사랑은 제일 오묘한 감정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용기를 주지만 때론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행복감을 안기면서도, 이따금씩 숨 쉴 수 없을 만큼 불안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힘들고, 그 사랑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럼 자네도 날 보면, …복잡한가?”
“네! 하지만 감정을 마주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오히려 빨리 인정하지 못해 후회했죠.”
“…나도 후회하겠군.”
“글쎄요? 그 마음이 뭔지 깨달으면, 그간의 ‘이상함’은 전부 해소될 거예요.”
어쩌면 아스레인은 이미 사랑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일생을 바쳐 지켜온 마물이, 위태롭게 균형을 이룬 이 세계가 증거다. 희생은 가장 숭고한 형태의 사랑이니까.
누구보다 남을 위하는 사람이기에 앞으로 이기적인 부탁을 할 것이다.
“이건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스레인에게 주는 문제예요.”
“…문제라….”
“분명 난제가 되겠죠. 하지만 같이 풀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좋아하는 나를 마주해 줄 것. 균형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 것. 설령 대의를 위해서라도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자기희생을 당연시하지 않을 것.
“언젠가 답을 깨닫게 된다면, 제게 가장 먼저 말해 줄래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위해 먼저 스스로를 사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