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아스레인이 내게 원하는 모습은 단순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야심한 밤에 단둘뿐인 만찬이 열렸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니 기다란 테이블 위에 그릇이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 고기와 술로 가득한 만찬이 아닌 대부분 약초가 들어간 요리였다. 소화에 도움이 되는 채소는 물론이고, 혈액순환에 좋다고 들은 약초가 곳곳에서 보였다.
“…그렇게 신경 쓰였나….”
아무래도 혈색이 썩 좋지 못한 나를 걱정한 모양이다. 하늘색 셔츠 소매를 걷으며 자리에 앉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조각상이 삐걱거리며 다가왔다. 둥그런 잔에 물을 따라 주는 모습은 오랫동안 훈련받은 집사 못지않았다.
“고마워요.”
“…….”
“이걸 조각상 씨가 직접 만든 거예요?”
“…….”
“늦은 밤에 미안해요. 정말 잘 먹을게요.”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조각상이었지만, 어째 오늘따라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은근히 내 앞에 잔을 밀어 주는 손길이나 할 일이 끝났는데도 곁에 가만히 서 있는 행동도.
혹시 아스레인이 변하는 만큼 그의 영향을 받는 조각상도 달라지는 걸까.
“저기….”
아스레인이 따로 전한 말은 없어요? 그리 물어보려고 했건만,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저도 방금 막 들어왔어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저택으로 온 서신이 있어 처리하고 왔네. 북방 지역에서….”
넓은 어깨에 선이 딱 떨어지는 셔츠 차림은 언제 봐도 설렌다. 물론 정갈하게 단추를 채운 재킷이나 베스트도 좋지만, 늘 정복을 입고 있는 사람의 풀어진 모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로망이었다.
게다가 새하얀 셔츠 위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금색 머리카락이라니.
“…하아….”
“음?”
“아,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탄성이 담긴 한숨이 튀어나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영문을 모르는 아스레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뒤이어 화제를 끌어내려다가 예기치 못한 아스레인의 행동에 바보 같은 반응이 새어 나갔다.
“그래서 북방 지역에서 뭐가…. 엥?”
테이블은 족히 8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전에도 당연히 양 끝에 앉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보란 듯이 바로 옆에 앉았다.
그깟 모서리를 사이에 두면 뭐하나. 팔을 살짝만 뻗어도 닿을 거리인데.
“여기… 앉으시게요?”
“그래야 잘 보이지 않겠나.”
“그건… 그렇죠.”
당당한 태도에 할 말도 사라졌다. 이내 아스레인은 조각상이 따라준 와인을 홀짝이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안주로 삼으려는 걸까. 단 한순간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길에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잘 먹겠습니다….”
혹여 식사할 때 나도 모르는 습관이 드러날까 봐 심혈을 기울여 포크를 쥐었다. 흡사 테이블 매너 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기계처럼 꾸준히 음식을 입에 넣는데도 혀마저 긴장해 버린 건지, 도무지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토끼가 풀을 뜯듯 야금야금 먹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역시 같이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결심 끝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지만,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뭐지? 분명 시선을 나를 향하고 있는데 정신은 다른 곳으로 팔려 간 것 같다. 대체 무슨 생각을 저리도 골똘히 하는 걸까. 불현듯 그의 상태가 걱정되어 눈살을 찌푸렸다.
“…교수님?”
“그 호칭 말인데….”
“네?”
“이제 달리 부르면 어떤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게 호칭 문제였나 보다. 예기치 못한 제안에 포크까지 내려놓고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왜…요?”
“여긴 학교 밖이잖나. 둘뿐인데 교수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호칭이 입에 붙어서 계속 부르긴 했는데, 설마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내가 아스레인이라도 일 외적인 장소에서까지 ‘교수’라 불리는 게 썩 반가울 것 같진 않다. 퇴근한 느낌도 안 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제법 괜찮은 대안이 머릿속을 번뜩 스쳤다.
“백작님?”
“자네가 내 하인인가?”
“…아니죠. 하하….”
순식간에 싸늘해진 눈빛이 가슴을 찔렀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다른 호칭을 말했다.
“그럼 선생님?”
“…태오.”
“넵. 다시 생각할게요.”
흑심으로는 이름이 최고긴 한데, 그건 한국인으로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교수님을, 그것도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분을 감히 이름으로 부른다니. 내 안에 있는 훈장님이 벌떡 일어나 대성통곡을 할 법한 사건이었다.
재차 고민에 빠지자 참다못한 아스레인이 결론을 내려 버렸다.
“이름으로 불러 주게.”
“…네?!”
“종종 부르지 않았나.”
물론 매번 교수님이라고 깍듯하게 부른 건 아니었다. 머릿속에 이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절박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이성이 완벽하게 깨어 있는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학생인데 어떻게 교수님을 이름으로 불러요.”
멋쩍은 미소로 에둘러 거절을 표하자 그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서렸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모든 걸 가능케 하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자네가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뭐지?”
“…이름을 부르는 게 저뿐만은 아니잖아요.”
뼛속까지 스며든 유교도 유교지만, 실은 다른 이유도 한몫했다. 하지만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엔 너무도 유치한 이유였다. 대놓고 말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니 아스레인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설마 칼리온이 나를 아벨이라 불러서?”
헙! 정곡이 찔린 나머지 숨을 멈췄다. 노골적인 반응에 아스레인은 믿기지 않는지 머리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 이유인가?”
“…네.”
“칼리온과는 상관없지 않나.”
“그치만… 왠지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어떻게 말해. 처음 칼리온이 아스레인을 ‘아벨’이라 불렀을 때, 별 사이도 아니면서 질투해 버렸다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친근하게 애칭으로 부르는 칼리온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이 옹졸한 마음을 아스레인이 몰랐으면 하니, 나 혼자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스레인’으로 할래요. 이걸로 괜찮아요?”
“괜찮다마다.”
선뜻 고개를 끄덕인 아스레인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기쁘군.”
“…그래요?”
“그간 내가 가진 이름이 족쇄처럼 느껴졌네. 인간으로 살기 위해 에브게니아가 지어 준 이름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아래로 내리깐 그의 눈이 부드럽고도 평화로워 보였다.
“비록 거짓일지라도 자네에게 불릴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네.”
생각해 보면 세대를 거듭할 때마다 그는 이름을 달리 썼다. 그저 이번 대의 아스레인이 ‘디아벨’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성은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명만이 ‘아스레인’이란 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겐 그저 가문의 상징일지라도, 내겐 ‘아스레인’이란 이름이 특별했다.
“…아스레인.”
“음?”
“역시 저는 이쪽이 좋아요.”
진정한 그를 알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
“지, 진심이세요?”
자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여 흔쾌히 응하지 말 걸 그랬다.
“이게 거짓말하는 얼굴로 보이나?”
“아뇨. 완전… 진심이요.”
“그런데 뭘 묻나.”
“하하, 그냥…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서요.”
그래. 자는 걸 보는 것까진 좋아. 나도 아스레인이 황송하게도 내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아주 기쁜 마음으로 구경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소파에서 자거나 의자에 기대어 조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다.
“침대가… 넓네요.”
밥을 다 먹고 함께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손님방이었다. 넓은 방엔 두 명이 뒹굴어도 충분할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소파에서 잠깐 조는 게 아니라 침대에서 편히 자길 바라는 마음까진 이해한다.
그런데 내가 침대에 누우면, 아스레인이 공중에 떠 있지 않는 이상-
“실은 제가 누가 있으면 잠을 잘 못 자요.”
한 침대를 써야 한단 소리였다.
“머리라도 쓸어 줄까?”
“…아뇨….”
누구 평생 불면증 만들 일 있나.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스레인은 진심이었는지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한 침대에 들어간다고 긴장한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 같다.
감정에 무자각한 아스레인을 두고 혼자 끙끙 앓은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그냥 아는 사람과 한 침대를 쓰는 거라 생각하자.
아주 많이 아는 사람과. 아주 많이 알고 좋아하는… 사람과.
“그래요. 잠자는 게 얼마나 쉬운데요.”
당당하게 침대로 걸어가 이불을 펄럭 들춰 냈다. 그대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어깨까지 빈틈없이 이불을 덮었다. 포근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는데도, 가시밭을 뒹구는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침대로 다가와 옆에 걸터앉았다.
다행히 이불로 들어오질 않을 작정인가보다. …다행히.
“있잖아요. 교수님.”
“아스레인.”
“아, 아스레인.”
힐끗 올려다보니 부담스러우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그 빈틈없는 아스레인이 셔츠 윗 단추를 살짝 푸른 채로 침대에 앉아 있으니, 머릿속에서 망상 회로가 열심히 돌아갔다. 단번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려 이불을 한껏 끌어올렸다.
“갑자기 제가 자는 모습은 왜… 보고 싶으신 거예요? 그동안에도 꽤 보셨잖아요.”
물론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은 상황이 대부분이었지만.
잠시 망설이던 아스레인은 이내 차가운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스스로 잠들지 못하네.”
“…네? 그게 무슨….”
“애초에 불필요한 것이니까. 인간의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때가 와야만 눈을 감을 수 있지.”
잠은 도피 수단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머리 아픈 일을 잠시 잊고 싶을 때 전부 내려놓고 잠을 자곤 했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원하는 순간에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영원한 악몽을 헤매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 긴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밤을 홀로 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이불 안에 곤히 넣어 둔 손을 빼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무뚝뚝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자네가 자는 걸 봤네. 지금껏 누군가 자는 모습은 자주 봐 왔다만, 어쩐지 자네는 달랐지. 서서히 차분해지는 심호흡이 꼭 파도 소리 같았어.”
“…….”
“무슨 꿈을 꾸는지, 찌푸린 미간이 도통 펴지질 않았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미간을 눌러 주니 살며시 웃더군. 그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자리를 뜰 수 없었네. …이상하게.”
이윽고 아스레인은 잔잔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마저도 아까울 정도로, 진솔한 이야기를 내뱉는 그는 아름다웠다. 찬란하게 빛나는 생명의 불꽃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후로 몇 번이고 봤네. 숨을 들이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가끔씩 작은 입술로 웅얼거리기도 했지. 그게 뭐라고…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을 따라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나도 함께 잠을 자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머리카락을 만질 뿐인데, 어째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때 이른 봄비에 화사하게 고개를 드는 새순처럼 얼굴 곳곳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도 모르고 멍하니 아스레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창백한 손등이 얼굴을 톡, 건드렸다.
“괜찮나? 열이 오른 것 같은데.”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둥글게 웅크린 몸이 꼭 소란스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는 벽 같았다. 이불 속에서 두 손을 꽉 맞잡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긴장해서 그래요.”
“…편히 있으래도.”
어떻게 편하게 있을 수가 있을까. 나 혼자 급급하단 생각에 울컥한 나머지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아스레인이랑 한 침대에 있는데, 긴장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왜?”
“그야 좋….”
하마터면 그대로 내지를 뻔했다. 급히 말문을 틀어막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몰라요.”
“뭘 모른다는 건가.”
“아마 아스레인은 평생 모를 거예요…!”
“…태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러나.”
그냥 질러 버려? 아니, 지금 고백해 봤자 ‘좋아한다고? 나를? 왜?’ 같은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아서 화가 난 닉스에게 눈치 없이 이유를 물어 오히려 화를 돋울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이 사람의 입에서 좋아한단 말이 나오긴 할까?
“하아….”
“나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아니에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려다가 나를 보고 싶다는 말이 떠올라 꾹 참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이대로 아스레인을 봤다간 저택을 뛰쳐나갈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이제 잘 거예요. 진짜로.”
“좋은 꿈꾸게.”
“깨우시면 안 돼요.”
“…그래.”
“자는 사이에 괜히 만지지도 마시구요.”
“…….”
왠지 심술이 부리고 싶어져서 한 말인데, 어째 대답이 없다.
“아스레인?”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뜨자 곤란한 듯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참아 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