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133/305)

#133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봉인되어 있는 뿔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마물이라면 찾기 훨씬 쉬울 터. 이카로스를 만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담긴 단서를 건져 내면 된다. 비록 이카로스를 추격하는 과정이 평탄하진 않겠지만, 막다른 길을 맞이하는 것보단 희망적이었다.

이카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히페리온과 아스레인은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그때 태오에게 느껴지던 선한 기운이 당신이었군요.]

“…그걸 느꼈었던 건가.”

[후후, 제가 당신의 기운을 잊을 리 없지 않습니까.]

항상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히페리온이 과거를 추억하는 모습은 꼭 아이 같았다. 말을 주고받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왼쪽 뺨에서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닉스가 턱을 괸 채 싱긋 웃었다.

[이제야 여길 보네.]

“어…왜요?”

[그냥. 네가 기뻐 보여서.]

너무 헤실헤실 웃고 있었나. 뺨을 매만지며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제가 흐뭇해졌어요.”

[네 덕분이야. 태오.]

“저요? 저는 그저….”

[우리 중 누구도 서로를 만날 생각은 안했으니까.]

단정한 입매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올랐다. 닉스를 볼 때면, 늘 웃는 얼굴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진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닉스 님도 반가우신 거죠?”

[나~?]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자 그의 눈길이 테이블 맞은편으로 향했다.

[…꽤 그리운 풍경이긴 해.]

노을처럼 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사라져갔다.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어쩐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투영하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이 자리에 오케아노스 님도 계시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대판 싸움 났을 걸? 나야 환영이지만.]

“다 같이 모여 계실 때 자주 싸웠었어요?”

[뭐, 그렇지. 나랑 오케아노스는 저 둘에 비하면 호전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카로스는 교수님 말이라면 전부 따르는 바람에 얼마나 귀찮았는데~]

장난스럽게 손을 휘적거리던 닉스는 이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균형은 제법 잘 맞았어. 나와 오케아노스, 그리고 히페리온과 이카로스. 처음부터 둘씩 나눠지게 짝을 맞췄을지도 모르지. …철저한 사람이니까.]

아득히 먼 옛날, 균형을 이루는 자는 네 개의 씨앗에 각기 다른 힘을 나눠 주었다. 그건 여러 마물이 기억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문득 세잔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사 제국을 건국하기 전… 선황 유피테르는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르던 그때, 하늘 높이 떠 있던 다섯 개의 별이 땅으로 떨어졌다더군요. 그걸 신의 계시로 삼아 이 땅에 뿌리 내린 겁니다.’

그 후로 제국 안에 있는 신전은 대부분 다섯 개의 기둥을 쓴다고 했다. 물론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기엔 꾸며진 이야기가 많지만, 특정한 상징엔 항상 이유가 있다.

왜 굳이 다섯이었을까. 당시 대륙에 다섯 개의 부족이 나뉘어 있던 것도, 제국이 다섯 개의 나라를 통합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면-

“…이카로스가 막내라고 했죠?”

[응. 마지막으로 하늘을 채웠지.]

혹시 유피테르가 본 다섯 개의 별이 아스레인이 만들어 낸 마물을 뜻하는 거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별에 마물을 일일이 대응하기엔 딱 하나가 부족했다.

유구한 역사 아래, 카르사 제국에서 다섯은 완전한 수다.

그럼 설마….

“한 분 더 계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내가 봤겠지.]

“그런가….”

[게다가 더는 필요 없었어. 숲과 바다, 지하와 하늘. 그리고 대지엔 저 사람이 있었으니까.]

단순히 내 착각이었던 건가. 그 시절부터 살아온 닉스의 말이니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단호히 고개를 저은 닉스는 뒤이어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카로스를 만들어 낸 후, 대륙엔 다시없을 평화가 이어졌지. 하지만 유피테르가 나타나면서 너희 교수님께서 유언 같은 걸 남기고 보란 듯이 사라졌어.]

“닉스 님은 유피테르를 직접 만난 적 있어요?”

[아니. 나도 소문으로만 접했어. 얼굴을 봤다면, …평생 잊지 않았을 텐데.]

암울한 회색빛 머리카락.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 그 마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존재. 그게 내가 기억하는 유피테르였다. 평범한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도 강했고, 초월자라 보기엔 이미 사라진 사람이었다.

카르사 제국을 세운 선황의 정체를 감히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대체 유피테르는 뭘까요?”

[글쎄? 네가 말한 것처럼 정말 ‘신의 아이’일지도 모르지.]

신의 아이, 라. 대체 어떤 신의? 그보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내려왔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신의 아이라면, 자신을 창조한 이를 국교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피테르는 제국의 국교를 정할 수 없게 선언했다. …왜?

끊이지 않는 의문에 머리가 아프던 차, 소름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체가 무엇이든, 언젠가 만나면 반드시 이 손으로 목을 베어 버릴 거야.]

“……!!”

[…라고 다짐했는데, 이미 죽어 버렸잖니? 이래서 인간은 덧없구나.]

순간 닉스의 서슬 퍼런 안광에 스친 살의는 진심이었다. 누군가 빨리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러 절망을 맛본 닉스라면, 원수를 곱게 죽여 주진 않을 것 같으니까.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닉스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꽤 늦었네.]

“…가시게요?”

[우리 사랑스러운 헤메라는 곧 잘 시간이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닉스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피며 히페리온을 불렀다.

[아저씨.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어요?]

[아, 이만 일어나도 괜찮네.]

수백 년 만에 재회했으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하는 건 당연했다. 어둑해진 창밖을 본 히페리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윽한 흙냄새가 여러 생각으로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잠재웠다.

햇살을 담뿍 담은 녹안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카로스의 행방에 대해 나도 수소문 해 보마.]

“고마워요. 히페리온.”

내색하진 않지만, 그 또한 한순간에 아스레인이 사라져 많이 불안했겠지. 왠지 오늘따라 히페리온을 안아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 슬쩍 품에 다가갔다. 그러자 히페리온은 당황한 기색 없이 곧장 팔을 둘러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나야말로 고맙구나.]

올해 여름, 치자 꽃은 풍성하게 피겠구나. 이토록 따스한 사람의 곁에 있으니까.

마음 한 편이 뭉클해지는 포옹을 마지막으로 히페리온은 모습을 감췄다. 허공에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눈동자를 꼭 닮아 있었다. 반딧불이 같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등 뒤에서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나도 안을래.]

“우왓!”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닉스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성긋 눈웃음을 치는 모습이 매혹적이었다.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에 본능적으로 뺨을 붉히며 속삭였다.

“너, 너무 가깝잖아요.”

[그럼 안 돼?]

“그건….”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음에 또 봐요. 닉스 님.”

[아, 맞다.]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던 닉스가 내 어깨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그 딱딱한 호칭 말고 앞으로 ‘형’이라 부르는 건 어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그 말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어디긴.]

날카로운 손톱이 살짝 상기된 뺨을 쿡 건드렸다.

[네 머릿속이지.]

“…네에?!”

[후후, 이젠 안 읽어. 걱정하지 마.]

설마 세잔에게 형이라 부르라고 말하는 순간을 본 건가? 아니,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본 거야. 이 세계로 온 후부터의 일생을 다큐멘터리처럼 훑어봤단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툭 하니 벌어진 입술을 뻐끔거리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다음에 만날 땐, 단둘이 오붓하게 보자.]

이윽고 닉스는 나를 가뿐히 품에서 놔주곤 아스레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갈게~ 영감. 부디 태오 고생시키지 말고.]

“…쓸데없는 걱정이군.”

흥. 짧게 코웃음을 친 닉스는 거센 바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둘이 가 버리니 접견실이 평소보다 텅 비게 느껴졌다. 그 후로 적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 야심한 밤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을이 멀어서 그런가…? 이 일대는 되게 어둡네요.”

그러나 접견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너무 뜬금없는 얘길 꺼냈나. 다시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데, 웬일로 아스레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태오.”

“네?”

뒤를 돌아보니 가지런한 그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능력에 대해 캐물어 곤란했다면 미안하군.”

“아니에요. 제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고민이었어요.”

“직접 마력을 써야 하는 거라면, 너무 남발하지 말게.”

“네! 그래도 교수님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요.”

아무렴 도감의 능력 덕분에 아스레인에게 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당연히 아스레인도 능력 있는 제자를 둬서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찡그린 얼굴에서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다.

“자네가… 그리 부담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네?”

“이카로스도, 뿔이나 기억도… 그걸 찾는 게 자네의 의무가 아니니까.”

평범한 삶을 잃을까 봐 그런 건가. 하지만 평범함 따윈 이미 학교 정문에서 차에 치이는 순간부터 없어졌다. 내가 줄곧 바라던 건 힘없이 남의 뒷바라지를 하는 게 아니라, 고생하더라도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는 연구였으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일말의 걱정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 일부러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능력을 알려 주는 고비도 넘겼으니 슬슬 학교로 돌아가야겠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오래 잡아 둬서 미안하기도 하니까. 가벼운 걸음을 돌려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만 돌아갈까요?”

“…왜?”

“네?”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휘둥그레진 눈을 끔뻑이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연구실에 돌아가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일은 다 끝내고 왔다만. 내일은 수업도 없고.”

“아….”

맞다. 아스레인은 여기서 지냈지. 심지어 내일이 휴일이라면, 굳이 학교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 아쉽지만 나 혼자라도 학교에 돌아가야겠다.

“아, 그럼 저는 이만 기숙사로 가 볼게요.”

공손히 인사하고 제자리에서 걸음을 돌리는 그때, 손목이 턱하니 붙잡혔다. 뭔가 잊은 거라도 생각난 걸까.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과 마주쳤다.

“자네만 괜찮다면….”

그 답지 않게 뜸을 들이던 아스레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 있다 가지.”

“네, 네?!”

“…안 되는 건가?”

“아뇨! 아니, 그건 아닌데….”

안 될 리가 없지. 오히려 환영이지! 근데 이유가 뭔데. 자고 가라는 거야? 저택에서? 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는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영원같이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고, 마침내 아스레인이 말을 꺼냈다.

“자네를 좀 더 오래 보고 싶네.”

흡.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자각이 있는 채로 하는 말이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게 누군데. 아스레인이잖아. 그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언행으로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는지 알기에 의심이 불쑥 생겼다.

슬쩍 눈치를 살피며 반응을 떠보았다.

“저…를요?”

“그래.”

“…왜요?”

이유를 물을 줄은 몰랐나. 평온한 금빛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한참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드디어 원하는 답을 찾았는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특별하니까.”

“…….”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모습까지도 빼놓지 않고 보고 싶네. 내겐 그리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 자네와 있으면 특별하게 느껴져.”

그동안 아스레인은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그가 잃어버린 것을 하나씩 채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아스레인은 처음 봤다.

심지어 그가 원하는 게 나와의 일상이라니-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뭐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