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 (131/305)

#131

이건 화목한 가족 모임이 아닌 살벌한 삼자대면이었다.

[보고 싶은 얼굴이랑 보기 싫은 얼굴이랑 다 섞여 있네~?]

저 건너에는 봄을 맞아 새순이 돋아나는데, 호숫가에만 때늦은 겨울이 찾아왔다. 음산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나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렸다.

서둘러 뿔에 대한 단서를 물어보려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태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그러니까….”

아스레인은 내게 기억을 돌려준 닉스를 찾아다녔고, 닉스는 화를 입을까 봐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었다. 그런데 보란 듯이 아스레인의 앞에 닉스를 소환했으니… 충분히 팔아넘겼다고 오해를 살 만했다.

애써 짜증을 참고 있는지, 닉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살짝 솟아났다.

[당신 때문에 ‘첫 소환’을 망쳐 버렸잖아.]

“소환…?”

의미심장한 단어를 들은 아스레인은 날카로운 눈썹을 찡그렸다. 소환이란 말까지 나왔으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한 걸음 앞으로 불쑥 나서며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마물을… 소환할 수 있어요.”

“…뭐?”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엔 의아함과 황당함이 얼룩져 있었다. 그래. 저 표정 어디서 봤나 했더니… 혈액형 심리테스트를 진지하게 여기는 학부생을 마주한 교수님 같다. 아니, 인터넷에서 굴러다니는 쓰레기 자료로 보고서를 써도 저 정도로 당황스러워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닉스가 다가와 자그맣게 속삭였다.

“괜찮아. 태오. 내가 도와줄게.”

[닉스 님…!]

무엇이든 대신 해 줄 것 같은 든든한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졌다. 기대감으로 두 눈을 빛내자 닉스는 여유롭게 윙크로 화답했다. 이윽고 내 어깨에 팔을 걸치더니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말했다.

[나랑 태오는 특별한 관계거든~ 그래서 교수님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아니! 잠깐만.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역시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아스레인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특별한, 관계라….”

“잠시만요. 그게 아니에요. 교수님!”

[에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태오.]

잔망스러운 웃음을 흘린 닉스는 뾰족한 손톱으로 내 볼을 쿡 찔렀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아스레인은 애써 속을 삭이고 있었다. 닉스를 노려보는 눈빛은 푸른 불꽃처럼 고요하게 이글거렸다.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는 나와 달리 닉스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단숨에 깨 버렸다.

[그래서 난 왜 불렀어? 설마 우리 대단하신 교수님께서 나를 끌고 오라고 하시던?]

“그게 아니라 제가 필요해서….”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날이 잔뜩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가 ‘우리’인가.”

[…뭐?]

“불쾌하기 짝이 없군.”

[하! 그런 자잘한 부분을 신경 쓰니까 당신이 쪼잔하다는 소릴 듣는 거야.]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흉흉한 기세가 맞부딪쳐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다급히 히페리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히페리온?”

늘 인자한 빛을 띠던 녹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어 있었다. 덩달아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고요한 숲에 폭풍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잘게 떨리는 시선은 아스레인에게 박혀 있었다.

[당신은 설마….]

애한이 서린 목소리가 아스레인의 귀에 닿은 걸까. 닉스를 향해 뻗어 나간 푸른 서슬이 차차 누그러들었다. 한결 차분해진 아스레인은 히페리온에게 넌지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히페리온.”

[이 고귀한 기운은 역시… 당신이셨군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은 금세 환희로 가득 찼다. 이내 히페리온은 망설임 없이 제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 아닌, 존경과 사모의 표현이었다.

[존귀한 분을 다시 뵐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마치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같았다. 이내 아스레인은 세례를 하듯 우아한 손길을 뻗어 히페리온의 머리를 짚었다. 살며시 내리뜬 금빛 눈동자엔 자애가 깊이 묻어났다.

“그간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 히페리온, 당신께서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음 한편이 훈훈해지는 재회였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닉스가 우는 건 아니겠지? 뻣뻣하게 굳은 목 대신 눈만 돌려 닉스를 흘겨보았다.

[어휴, 눈물겨워라.]

그럼 그렇지. 말투에서부터 좀처럼 숨길 수 없는 비아냥거림이 느껴졌다. 단숨에 감동이 와장창 깨져 버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닉스 님….”

[태오. 손수건 있어?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저런 장면을 보고 눈물이 다 나네~]

대체 눈물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마지못해 손수건을 꺼내어 주니 닉스는 능청스럽게 눈가를 닦았다. 비련의 주인공 연기에 빠진 닉스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대놓고 티내진 않아도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그들을 만나 내심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과할 건 사과하고 넘어가야했다.

“죄송해요. 닉스 님.”

[응? 뭐가?]

“연락도 없이 멋대로 불러서요. 닉스 님이 불편해하실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아냐~ 나의 헤메라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지.]

불그스름한 혈색이 돋아난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흘렀다.

[게다가 오랜만에 못 보던 얼굴도 보고 좋네.]

손수건을 다시 돌려준 닉스는 자연스럽게 히페리온에게 다가갔다. 설마 히페리온에게도 시비를 거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닉스는 퍽 유순한 투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말도 안 돼. 천하의 닉스가 존댓말을 쓰다니, 당장 세상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상반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히페리온과 대화를 나누던 아스레인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오직 히페리온의 얼굴에만 완연한 화색이 돌았다.

[닉스 군. 잘 지냈나?]

[어째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그대도 여전히 아름답구나.]

[하하, 아저씨도 참~]

그 뒤로 히페리온과 닉스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닉스가 불편하게 여기는 존재는 아스레인뿐인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에 생긴 오해가 깊은 앙금으로 굳은 탓이겠지. 어서 아스레인에게 있던 일을 이야기해 엇나간 관계를 풀어 주고 싶었다.

일단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겠냐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태오.”

“…네?”

냉랭한 목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어깨를 크게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자 아스레인이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내게 설명할 게 있지 않나?”

아.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닉스의 오해를 풀기에 앞서 아스레인에게 내 능력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렇다고 아스레인이 눈앞에 있는 난제를 어물쩍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말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직 사실만을 나열했다.

“저는 마물을 소환할 수 있어요. 정확히는 소환을 위해서 제 마력을 써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마력이 부족해서… 자연물이 가진 생기를 이용한 거예요.”

“대체 그게 무슨….”

“이해하기 힘들단 거 알아요. 그래서 일단 보여드린 건데….”

말없이 소환부터 해 버려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것 같다. 깊은 생각에 잠긴 아스레인은 이따금씩 눈만 깜빡거릴 뿐 말이 없었다. 설상가상 머리까지 지끈거리는지,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인간이 마물을 소환한 사례는 없었네.”

“그, 그래요?”

“아무리 계약을 맺었다한들 힘을 빌려주는 것뿐이지.”

이윽고 아스레인은 학자답게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상식선에서 설명 가능한 마법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기적. 시스템과 마물 도감은 존재 자체부터 비현실이었다.

끝끝내 해답을 내놓지 못한 아스레인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원리가 뭐지?”

그나마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케아노스 핑계라도 댔지. 이건 답도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자 닉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교수님~ 태오가 곤란해하잖아.]

“그러는 자네는 궁금하지도 않나?”

[딱히…? 그냥 이해가 됐어. 어느 순간부터 ‘태오가 부르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거든.]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니. 말도 안 되지. 근데 뭘 어떡해? 그냥 납득이 되는데.]

닉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숨겼다고 생각하는지, 아스레인은 고개를 돌려 히페리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히페리온은 곤란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허….”

그들의 증언에 놀란 건 비단 아스레인뿐만이 아니었다. 내게도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간 소환되는 마물이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그들은 의심을 품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품지 않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납득할 수 있다는 건가.”

[뭐라 설명해야 하지…. 태양이 뜨고 지는 거에 대해선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잖아? 심지어 태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왜 저기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지. 그거랑 똑같아. 굳이 의심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

관계 평가 기능은 눈을 마주쳐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 열린다. 그러다 마물이 내게 경계를 풀면 목소리가 들리고, 더 나아가 신뢰가 쌓이면 소환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능력의 기반은 마물 도감이고… 그 중심엔 시스템이 있다.

결국 나와 의식이 연결되는 마물마다 시스템이 손을 써 뒀다는 건가?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나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무사히 이 세계에서 모험을 끝낼 수 있게.

‘당신의 모험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당신께서 알맞은 때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지금으로선 그 가설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방화벽을 뚫고 침투하는 바이러스 같지 않은가. 아니면, 어디든 접근할 수 있는 관리자라도 된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시스템은 늘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 길을 알려 주곤 했다. 그의 도움으로 능력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고, 때론 선택의 기로에서 그의 조언을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나를 위해….

“정말… 그것뿐인가?”

마물은 물론이고 나까지도 의심하지 못하게 한 것도, 레톤이 만들어 낸 신의 영역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것도, 아스레인에게 기척을 들킨 것도- 전부 우연이어야만 한다. 이계의 존재이자 무형인 시스템이기에 가능한 일이어야만 한다.

“태오. 왜 그러나.”

[왜 그러긴. 그쪽이 너무 몰아세워서 새파랗게 질린 거잖아~]

그래. 그만 생각을 끊어 내자. 의심의 불씨를 꺼트리자.

“하하….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서 마저 얘기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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