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 (130/305)

#130

소환에 필요한 것은 오직 생명력. 그래서 아스레인에게 싱그러운 꽃과 풀을 가능한 한 많이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뜻밖의 부탁에 의문을 품은 듯 보였지만, 다행히 아스레인은 별말 없이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나는 오케아노스에게 소식을 전달해 줄 바다의 꽃을 만나러 갔다. 거대한 수조 앞에 다다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농염한 자태를 뽐내는 마물이 보였다. 만개한 모란처럼 겹겹이 이어진 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며 흔들렸다. 우아한 춤사위에 자그맣게 감탄하니, 후후 웃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반가운 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너구나?]

“오필리아!”

[못 본 사이 제법 어른스러워졌네?]

“원래 어른이었어….”

유리벽에 손을 올리자 오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윤기 흐르는 비늘이나 풍성한 지느러미가 예전보다 훨씬 생기 넘쳤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훌륭한 케어를 받은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그래서 말이야… 조만간 돌아갈 것 같아.]

“뭐? 정말?”

[아직 확실치 않지만, 인간들이 나를 옮기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걸 봤어.]

“잘됐네! 안 그래도 수조가 작은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거든.”

오필리아를 만난 후로 벌써 시간이 꽤 흘렀구나. 다른 일 때문에 자주 만나러 오지 못했는데도 막상 떠난다고 하니 시원섭섭했다. 그래도 더는 좁은 수조 안에서 홀로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모습을 조용히 눈으로 담는데, 오필리아가 노래하듯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니?]

“실은… 네게 부탁할게 있어.”

[말해 봐. 평화를 가져다준 보답으로 들어줄게.]

선뜻 부탁을 들어준다기에 사양 않고 말을 꺼냈다.

“그럼 바다에 돌아가서 오케아노스 님께 말을 전해 줄래?”

[전하께? …무슨 말을?]

“긴히 여쭤볼 게 있으니 시간을 내주실 수 있냐고….”

단서를 얻기 위해서라면 직접 오케아노스 바다에 가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바다의 주인이 나를 흔쾌히 만나 줄지가 의문이었다. 전처럼 절벽에서 물보라에 휘말려 얇은 천 몇 개만 걸친 꼴이 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던 오필리아가 말했다.

[말을 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오케아노스 님께서 들어주실지 모르겠어.]

“괜찮아. 전해 주기만 해도 고마워.”

수조 벽에 조심스레 이마를 대자 하늘하늘한 지느러미가 다가왔다. 두꺼운 유리로 가로막혀 있지만, 왠지 오필리아의 손길이 내게 닿은 것만 같았다. 따뜻한 작별 인사가 끝나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관리인이 수조로 오는 모양이다. 마물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되니,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조심히 돌아가. 오필리아. …또 만나자.”

엷은 미소를 짓다가 순간 아차 싶어서 말을 바꿨다.

“아, 아니지? 안 만나는 게 좋은 건가…?”

[후후, 인연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거지.]

인연이라. 다른 마물이 아닌 오필리아를 만난 것도, 그녀에게 현혹당했던 일도, 그로 인해 오케아노스 바다에 간 것도 전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오필리아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이길 바란다. 또다시 폭풍우에 휘말려 인간에게 구조되는 일은 없었으면 했으니까.

[어쩌면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대학 내에서 일을 벌였다가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르니 아스레인의 저택을 빌리기로 했다. 교수회관에 있는 마법진을 통한 덕분에 금세 익숙한 저택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돌아와 들뜬 기분을 만끽하기도 잠시, 문을 열자마자 우두커니 서있는 조각상과 마주쳤다.

“까, 깜짝이야….”

“…….”

“안녕하세요.”

“…….”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

끼긱끼긱. 조각상은 변함없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저택 바깥으로 안내했다. 정문으로 나서자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호숫가가 펼쳐졌다. 기둥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때와 달리, 오늘은 아스레인이 가져다 놓은 꽃이 경치를 아름답게 빛냈다. 심지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들꽃이 아닌, 색색이 화려한 관상용 꽃이 줄을 지었다.

당연히 약초밭에서 솎아 낸 꽃을 가져올 줄 알았건만, 전문 원예가로부터 꽃을 사 온 모양이다.

“역시 씀씀이가 다르네….”

활짝 피어있는 꽃망울을 넋 놓고 구경하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으음, 아마도요.”

곁에 다가온 아스레인은 품에 들고 있던 프리지아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로써 자갈밭 위에 간이 꽃밭이 완성되었다.

“이거 전부 사신 거예요?”

“그래. 당장 많이 구하려면 사는 게 최선이니까.”

곳곳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 섞여 있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희귀한 꽃에 이 정도 양이면 돈이 꽤나 나갔을 텐데…. 물론 월급 받아먹고 사는 평민이 귀족 돈 걱정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만, 어쨌든 불편한 건 불편한 거였다.

물기 어린 꽃대를 톡톡 건드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꼭 갚을게요.”

“그럴 필요 있나?”

“그래도요. 괜히 저 때문에 돈 쓰신 게 걸려서 그래요.”

역시 아스레인은 이해할 수 없는 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 불편하면 자네에게 선물하는 걸로 하지.”

“그게 더 불편한데요!”

“…꽃 선물을 싫어하나?”

“아뇨. 그게 아니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선물한 꽃을 바로 시들게 하냐고. 심지어 선물이라고 하니 대뜸 소환하기가 더더욱 힘들어졌다.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자 아스레인이 당황한 듯 안색을 살폈다.

“태오. 괜찮나?”

“네에. …아무튼 감사히 받을게요.”

지금 와서 다른 꽃을 구할 수도 없고, 호의는 호의이니 받기로 결심했다. 아름답게 핀 꽃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나를 잠자코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의아한 투로 물었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건가.”

“…설명하기 어려우니 일단 보여드릴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싼 꽃인 만큼 생기는 가득했지만, 두 마물을 소환하기에 충분한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지하실에서 누르와 히페리온을 불러낼 때는 마력을 머금은 데히드 꽃을 사용했는데도 꽤나 고생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닉스와 히페리온이다. 전설적인 마물을 동시에 소환해 본 적이 없어 걱정이 앞섰다.

“…후우….”

평소보다 훨씬 공을 더 들여야 한다. 체내 마력은 충분하나, 그들을 이 공간에 유지시키려면 내 마력은 남겨두는 게 낫다. 그럼 오로지 꽃만으로 소환해야 하는 건데-

“이걸로 되려나….”

일단 해보지 뭐. 우선 아스레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마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그때였다. 호수 저편에서 산들바람이 불더니 이윽고 꽃밭 위로 은색 장막이 내려앉았다.

- 무리한 시도를 하시는군요.

“어! 시스….”

느닷없이 튀어나온 시스템을 보곤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팔짱을 낀 채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중얼거렸다간 전부 들키고 말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 걸어 나가며 시스템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왜 나타난 거야.”

- 이 정도 양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뭐?”

-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상대는 히페리온과 닉스입니다.

시스템은 느긋한 시선으로 꽃밭을 휘둘러보았다. 자갈밭을 한가득 채운 꽃으로도 부족하다니, 그럼 얼마나 더 필요하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짓자 시스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 도와드리죠.

“어떻게?”

- 소환할 때 이 문장을 읊으시면 됩니다.

그의 손길을 따라 허공에 갈색 가죽으로 된 책이 떠올랐다. 처음엔 마물 도감인 줄 알았으나, 그 안에는 난생 처음 보는 문장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 인간들이 마법을 쓸 때, 마력이 부족하면 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까.

“응. 뭐… 그렇지?”

- 같은 원리입니다.

기도문은 주로 성서나 신탁으로 이루어진다. 그럼 이게 마물과 관련된 성서란 말인가? 첫 문장을 읽으려다가 문득 의심이 일어 시스템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시스템이 내 모험을 위해 존재한다지만, 머릿속에도 없는 정보를 가져다주니 이상했다.

“넌 이걸 어떻게 알았어?”

- 오케아노스의 기억을 엿봤습니다.

“아…?”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은 오케아노스의 일부와 섞여 있었지. 물론 오케아노스 본인만큼 기억이 완전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과거를 알고 있음이 확실했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시스템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한 가지 사실을 더 털어놓았다.

- 참고로 이건 성서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

- 저분께서 하신 말씀이죠.

은밀한 시선이 어깨 너머로 향했다. 공허한 호숫가에 서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 물론 당사자는 기억을 잃은 듯 보이지만요.

이게 아스레인이 한 말이라고? 서둘러 문장을 눈으로 훑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몸을 크게 움츠리며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아스레인이 다가와 있었다.

“교, 교수님?”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변명거리를 떠올리며 초조하게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이쪽을 쳐다보기는커녕 뚫어져라 앞만 주시했다. 게다가 어깨를 붙잡은 손이 어쩐지 나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뭔가 있는 것 같아서.”

“…네?”

황급히 아스레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했다. 그 끝엔 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스템을 제외하곤.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럴 리가. 시스템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환영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아스레인에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 예리하게 날이 선 금빛 눈동자는 정확히 시스템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시스템의 형체가 아닌 기운만 느낀 것이지만, 두려우리만치 날카로운 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은발의 사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눈동자를 한참동안 마주하던 시스템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 과연 ‘그 마물’이라는 건가….

팽팽한 긴장감 끝에 시스템이 먼저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내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미안하네. …기분 탓이었나 보군.”

“하하…. 그럴 수도 있죠.”

애써 웃어넘기는 내내 긴장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닉스는 시스템의 이름을 알았고, 아스레인은 시스템의 기척을 느꼈다. 당연히 안 보일 거라 생각해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어떻게 무형의 존재에게서 기운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혹여 소환으로 영향이 미칠까 봐 아스레인을 벤치 옆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꽃밭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재차 마음을 다잡으며 허공에 떠 있는 책에 집중했다. 시스템의 조언대로라면 이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마력 소모가 줄일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스템이 남긴 문장을 읽어 내렸다.

“첫 번째 기둥은 메마른 대지에 활기를 불러오는 자. 그의 이름은 히페리온. 풍성한 가지를 뻗어 염원을 끌어안고 녹음을 지켜라.”

첫 번째 기둥. 히페리온. 의미 모를 내용을 담고 있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내 만물이 피고 지는 밤에 세 번째 기둥을 내리니, 그 이름은 닉스라. 절망에 묻힌 가련한 생명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라.”

잠깐. 이게 정말 아스레인이 한 말이라고? 분명 오케아노스의 기억을 가져왔을 테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기꺼이 그대들에게 힘을 나눠줄 테니… 각자 맡은 바 사명을 다하라.”

이건 마치-

“…균형을 이루는 자의 이름 아래서.”

최초의 마물을 창조하는 것 같지 않은가.

휘이익- 문장이 끝나자마자 책이 사라지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바람을 맞은 꽃잎은 단숨에 생기를 잃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비쩍 말라비틀어진 꽃밭 한가운데서 이른 여름이 찾아왔다.

나뭇결을 닮은 피부와 푸름을 머금은 눈동자. 그리고 물씬 풍겨오는 치자 꽃향기는 숲의 수호자의 현신을 알렸다.

[그대. 오랜만이구나.]

“히페리온…!”

그뿐이 아니었다. 한차례 더 불어온 바람이 꽃에 그나마 남아 있던 생기까지 앗아 갔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꽃잎 위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서서히 한 곳으로 뭉친 연기는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거듭났다.

[나 불렀어~?]

“닉스 님!”

기분 좋게 다가오던 닉스가 뒤늦게 다른 손님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붉은 눈동자가 옆에 있는 히페리온과 어깨 너머 아스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닉스는 한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물었다.

[태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 그게….”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보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 가족 모임은 딱 질색인데.]

아무래도 스스로 무덤을 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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