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 (129/305)

#129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실은 헤메라가 나라고.

당시 신력에 융화된 내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더라도, 소문이 이렇게까지 퍼질 줄은 몰랐다. 그 결과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게 됐다.

칼리온이 타르타로스에서 헤메라의 목소리를 듣고 과오를 인정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태자를 깨우쳐 준 신’이란 명성 하에 소문은 끊임없이 퍼질 것이다.

그럼 기댈 곳을 찾던 사람들은 신전에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는 마물의 안녕을 빌고, 또 누군가는 마을에 마물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겠지. 맹목적인 기도를 일방적으로 받는다고 상상하니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이건….

“사라진 그 마물의 빈자리를 헤메라로 대신한 거뿐이잖아.”

기울어진 세계에 새로이 균형을 이루는 자가 나타났다. 마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라 그의 신전에는 성물을 두지 않는다. 마물과 인간이 충돌하지 않는 공간이 생긴다니, 두 종족에게 모두 잘된 일이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온 대륙을, 심지어 신을 사칭하는 거짓말을 하고도?

“아냐. …그들이 믿는 건 ‘헤메라’지, 내가 아니야.”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야! 야!! 앞에 나무!!]

“…어?”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들자 코앞에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하마터면 나무껍질에 들입다 얼굴을 박을 뻔했다. 화들짝 놀라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는데, 나무 뒤에서 반가운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 누르야!”

[왜 정신을 놓고 걸어?!]

“미안,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 온실에서만 볼 수 있는 짙은 녹음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태자궁에서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할 겸 산책한다는 게, 어느새 온실로 와 버린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자마자 나무에 머리 박는 놈이 어디 있어?]

“하하….”

나 때문에 꽤나 놀랐는지, 긴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버릇처럼 그 앞에 쪼그려 앉으니 누르의 눈높이가 나보다 위에 있었다. 못 본 사이 어엿한 성체의 모습을 갖췄다. 그게 대견스러워서 다짜고짜 누르를 끌어안았다.

“으으, 보고 싶었어. 누르야.”

[갑자기 왜 이래.]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뭐…. 조금은.]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꼬리는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동안 못 만졌던 만큼 푸근한 털을 마구 쓸어주는데, 별안간 누르가 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상함을 눈치챈 누르가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

“응?”

[또 뭐가 달라졌다?]

움찔. 나도 모르게 어깨를 크게 떨었다. 슬쩍 뒤로 물러서니 어서 바른대로 불라는 눈빛을 쏘았다. 역시 누르는 못 속이는 건가. 선생님께 혼나듯 얌전히 무릎을 꿇고 타르타로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안 그래도 동그란 누르의 눈이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신려억? 마물도 모자라 신력까지?]

“으응.”

[너 진짜 위험하단 생각은 안 해?]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한 거야.”

[뭐?!]

“아니… 미안하다구….”

둥그런 발이 바닥을 쿵쿵, 내리찍자 자그마한 모래바람이 일었다. 괜히 말을 더 얹었다가는 저 발바닥에 짓눌릴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누르는 잔뜩 풀이 죽은 내 모습을 보곤 화를 참았다.

[…너처럼 체질을 잘 써먹는 인간은 또 없을 거다.]

“그, 그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융합하지 못하고 서로 밀어내느라 몸이 부서졌을 거야.]

처음 누르에게 ‘텅 비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꽤나 울적했다. 안 그래도 마력이 없는데 본질까지 볼품없어서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비어 있는 본질을 타고나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때?”

[빈틈없이 꽉 찼어.]

“좋은 거야?”

[…모르겠어.]

초점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던 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거대한 물음표 같아. 너.]

“…물음표?”

[나는 마물이고, 이건 나무야. 근데 너는 하나로 특정할 수가 없어.]

악의 없이 한 말일 텐데, 어쩐지 마음에 깊게 박혔다.

몸에 무언가가 섞일수록 예전의 내가 점차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오케아노스의 일부도 신력의 잔재도 전부 자진해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다 나중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누르야.”

[왜?]

“여전히 내가 인간으로 보여?”

[뭐? 당연하지.]

“그럼… 내 본질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아니지.]

쿵. 심장이 발끝으로 내려앉았다.

그럼 나는 뭐지? 오케아노스는 내게 ‘마물과 인간 사이에 선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그걸 달리 말하면 마물도 인간도 아닌 존재였다. 게다가 이젠 나의 일부분을 뜯겨 ‘헤메라’라는 새로운 신이 만들어졌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복잡하게 뒤섞인 내 본질에 이질감이 느껴지던 그때였다.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한데?]

“…뭐?”

[만물의 본질은 죽을 때 비로소 완성돼.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도 네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할 거야.]

“여기서… 더 변할 수도 있다고?”

[응. 그래도 걱정하지 마.]

누르는 두툼한 발을 내 허벅지 위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히려 인간이면서도 마물을 위하는 너이기에… 너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본질이니까. 설령 여러 힘이 섞여서 처음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라지더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너 자신은 변함없어.]

“…그래?”

[날 구해 줄 때부터 지금까지 네 본질은 한결같이 상냥한 빛을 띠거든.]

천천히 다가온 누르는 내 이마에 머리를 맞대었다. 따스한 온기에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차분해져 갔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짧은 침묵 끝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전히 바보처럼 미련하지.]

“푸흐, 그건 너무했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누르를 끌어안았다.

본질이 어떤 식으로 변해도 나는 나다. 오케아노스의 일부를 삼킨 나도, 헤메라의 이름을 가진 나도 전부 같은 사람임엔 틀림없다. 처음부터 내 신념은 마물과 인간의 공존- 그것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고마워.”

헤메라의 진짜 정체가 뭐 그리 중요할까. 그로 인해 캄페 산 일대의 마물과 주민들이 편해졌다는데. 앞으로도 무고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억울하게 흘리는 피를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차 없이 이용할 것이다.

[무슨 일 있었어? 웬일로 그런 걱정을 해.]

“꽤 어려운 약속을 해서 고민이 많거든.”

[어려운 약속?]

그게 설령 신을 들먹이는 짓이라도.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했어.”

***

아직 아스레인의 수업이 끝나지 않은 걸 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찾으려는 정보는 그 마물이 살던 시절의 기록이었다.

유피테르와 건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 부분 변형되어 있긴 해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마물’에 관해 적힌 서적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미 그는 사람들이 더는 연구하지 않는 신화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아….”

아무리 서적을 뒤져도 잘린 뿔의 행방을 나타내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체 사제는 무엇을 계기로 뿔을 찾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서적? 누군가의 증언? 아니면, 봉인된 아스레인을 찾아간 에브게니아 1세처럼 신탁이라도 받은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신탁이란 게 뭔데….”

태자궁에 다녀온 후로 신에 대한 불신만 커졌다. 칼리온은 존재하지도 않는 헤메라를 들먹여 회개했다는 식으로 말할 계획이라 했다. 그 이야길 들으니 불현듯 의심이 일었다. 신탁이라 꾸며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지금껏 세간에 발표된 신탁 중 ‘진짜’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하면 신성모독인가?”

도서관에서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늘어져 앉았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하루가 멀다고 의심만 늘어난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그때,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오셨어요?”

“늦게 와서 미안하군.”

“저도 도서관에 갔다가 방금 막 들어왔어요.”

책상에 수업 자료를 내려놓은 아스레인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바로 앞에서 멈춰선 그는 느닷없이 내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꼭 며칠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은 주인과 같았다.

“교, 교수님?”

“괜찮나?”

“그럼요. 들으셨겠지만, 전하께서도 따로 조사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사건이 그냥 묻힐 일은….”

“아니,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일이 아니라 자네일세.”

“아…네! 저는 괜찮아요.”

손길이 닿은 자리마다 열꽃이 피듯 불긋불긋해졌다.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이번엔 커다란 손이 머리 위로 닿았다. 슥슥- 머리를 쓸어 준 아스레인은 그제야 안심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설마 그 모습 때문에 신이란 소문이 나돌 줄 누가 알았겠나.”

“하하…. 그러게요.”

“괜히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정정하겠네. 태자에게도 내가 말하지.”

“아니에요. 오히려 잘됐어요.”

“잘됐다고?”

“그로 인해 마물과 인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이잖아요.”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는 신도들은 안타깝게 됐지만, 한순간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니 아스레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

“네.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내 선택을 믿어 준 그에게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재킷을 벗으려 하기에 냉큼 다가가 시중을 들었다. 연구실 구석에 놓인 옷걸이에 재킷을 반듯하게 거는 사이, 아스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왜 바로 쉬지 않고 도서관에 다녀온 건가.”

“아, 잘린 뿔에 대해 찾아보려고 갔죠.”

“기록이 없을 텐데.”

“네에. 정말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스레인이 지금껏 서적을 찾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서관에 들렀다. 역시나 그럴싸한 수확은 없었다. 그래도 서적을 뒤적이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정리했다.

“혹시 뭐 좀 여쭤봐도 돼요?”

“뭐든.”

“에브게니아를 처음 만난 장소가 어디예요?”

“코카서스 산꼭대기일세.”

“엥? 교수님이 태어난 곳 아니에요?”

“맞아. 한때는 성역이었으나, 이젠 금지된 땅이라 불리지. 황제의 허락 없인 발도 들이지 못하네.”

“어, 그럼 설마 그곳에….”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자 아스레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가 봤지만 뿔은 없었네.”

웬만한 곳은 모두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야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레인이니까. 하지만 그가 수백 년이 흐르도록 찾지 못했다는 건, 뿔이 예상 밖의 장소에 숨어 있다는 의미였다.

안타깝게도 기록이 남지 않았으니 결국 살아있는 기억만이 유일한 증거다. 비록 아스레인의 기록은 온전치 못하지만, 그 시절 곁에 머물던 마물이라면 자세히 알지 않을까.

“있잖아요. 교수님.”

“음?”

“예전에 교수님이랑 함께 지내던 이들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누굴 말하는 건가?”

“히페리온이나 닉스, 오케아노스라면 과거를 기억할 것 같아서요.”

아스레인은 ‘그 마물’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지 않으려 자신을 알아볼 법한 마물에겐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마물에겐 뿔의 행방이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생각할수록 그럴싸한 방법에 신난 나와 달리 아스레인의 반응은 건조했다.

“…글쎄. 그들이 나를 따른 건 사실이지만, 각각 사명을 위해 멀리 떨어져 지냈네.”

“그래도 교수님께서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으니까요.”

“확실히 가능성은 있군.”

“그죠? 그럼 물어볼까요?”

당장이라도 불러 모을 기세로 다가가니 아스레인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안 돼요?”

“안 될 건 아니지만, 그들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나.”

“아….”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들에게 내 목소리가 닿지 않네.”

아차. 당연히 소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력과 생명력만 충분하다면 히페리온과 닉스는 반드시 데려올 수 있다. 어쩌면 오케아노스도 오필리아에게 부탁해 연락이 닿는다면 흔쾌히 와 줄지도 모른다.

문제는 아스레인이 내가 마물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한 번 시간을 내 보도록 하마.”

어쩌지. 말을 할까? 아니, 할까가 아니라 해야 한다. 앞으로 함께 뿔을 찾아다닐 때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능력을 밝혀야 했다.

“교수님!”

어떻게 소환할 수 있는 거냐고 묻거든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면 된다. 그럼 아스레인은 믿어 줄 것이다. …아마도.

“실은 저한테 방법이 있는데….”

“방법?”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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