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 (128/305)

#128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온 다음 날, 기숙사로 서신이 날아왔다. 하얀 봉투 위에 찍힌 독수리 문장을 보자마자 결심을 내렸다. 질질 끌어 봤자 좋을 거 없다고.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나?”

“그럼요. 게다가 교수님은 오늘 하루 종일 수업이시잖아요.”

“그런 건 다음으로 미루면….”

“안 돼요! 그 학생들은 며칠째 교수님 수업을 기다렸을 거라고요.”

혼자 태자궁으로 향하겠다고 하니, 아스레인은 걱정을 한시도 내려놓지 못했다. 교수회관에 있는 아스레인의 방으로 오기까지 설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궁으로 이어지는 마법진 앞에 서자 아스레인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차라리 내가 한가할 때 같이 가는 건 어떤가.”

“정말 괜찮아요. 괜히 보고를 미뤘다간 전하께서 이쪽으로 직접 오실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온이라면 전처럼 연구실로 들이닥치고도 남았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스레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네는 잘 하리라 믿네. 하지만….”

“전하께서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러신 거잖아요.”

“그래. 태자는 오랫동안 봐 온 나조차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네.”

“너무 걱정 마세요. 무엇보다….”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내려온 귀걸이를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

“전부 듣고 계실 거잖아요.”

그나마 실시간으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는 데에 안심한 걸까. 계속 만류하던 아스레인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오게.”

“네. 금방 돌아올게요.”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배웅을 받으며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공간이 뒤틀리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의 후유증인지, 온몸을 휘감은 긴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윽고 싸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천천히 눈을 뜨니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촛불이 보였다. 촛대를 든 채로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은 태자의 보좌관인 세핀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세핀 님. …전하께서는요?”

“태오 님이 오시면, 바로 접견실로 안내하라 명하셨습니다.”

딱딱한 목소리가 냉랭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심지어 주변이 워낙 어두운 탓에 촛불 하나로는 발치만 겨우 밝혔다. 무의식중에 눈을 찡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다.

함부로 봐서는 안 됐지. 급하게 손으로 눈을 가리자 세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네?”

“전하께서 ‘태오에겐 안대를 씌울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신뢰받는 건가? 아니면, 시험당하고 있는 건가. 닉스만큼이나 속내를 알 수 없는 칼리온이기에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결국 호기심보다 안전을 택했다. 세핀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오직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었다.

한참 계단을 오르니 주변이 서서히 환해졌다. 마침내 세핀이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샹들리에 아래 둥그런 테이블과 의자를 보곤 안심했다. 생각보다 평범한 접견실의 모습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능숙하게 차를 내어 준 세핀은 조용히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접견실은 찻잔에서 풍기는 달콤한 라즈베리 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각진 의자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되었고, 창문이 아예 없는 탓에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아름답게 꾸며진 취조실 같았다. 세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귀걸이에 마력을 주입하던 그때였다.

“기다렸어?”

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칼리온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는 그런 인사 필요 없대도.”

가벼운 손짓을 따라 일어나니 그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언제 봐도 이상하게 꺼림칙한 사람이다. 내게 자리를 권하며 의자에 앉은 칼리온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세핀에게 들었어.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바닥만 보고 얌전히 걸었다면서?”

맞은편에 자리 잡자마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어깨를 눌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비교 대상이 타르타로스에서 마주친 레톤 신이라서 그런가.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칼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글쎄? 네가 어떤 아이인지 차차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줘.”

칼리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네.”

“그런가요?”

“응. 전에는 털끝까지도 나를 경계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관찰당하는 기분이야. 벌써 몇 번 봤다고 내게 익숙해진 건가?”

역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사람이다. 예리한 육감은 필시 황궁에서 본능적으로 만들어진 거겠지. 벌써부터 페이스에 말려들 순 없으니 미소엔 미소로 응수했다.

“저도 태자 전하께서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서요.”

“하하! 그런 거라면, 마음껏 살펴보렴.”

한바탕 호탕하게 웃은 칼리온은 이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자가 누구인지.”

부드러운 미소에 숨긴 냉랭한 눈빛- 그게 태자 칼리온이었다. 말없이 시작된 눈싸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건 나뿐이었다. 오히려 칼리온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흥미롭게 나를 관찰하다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래서 별장은 어땠어? 불편한 점은 없었고?”

“전하께서 신경써 주신 덕분에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예상한 대답이랑은 다르네.”

“…예?”

예상한 대답이라니. 애써 유지하던 평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칼리온은 날렵한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며칠 동안 2층에는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면서?”

뭐?

“게다가 아벨이 직접 하인들의 행동반경을 일일이 정해 줬다고 들었어.”

“그…랬군요.”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네?”

별장 2층엔 내가 쓰던 방이 있다. 아무래도 하인 중 누군가 내 모습을 볼까 봐 미리 손을 써 둔 모양이다. 아스레인 덕분에 고치나 신력의 영향으로 바뀐 외형은 들키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결국 칼리온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불편할까 봐 거기 있는 하인들에겐 죽은 듯 행동하라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었나 봐. 누가 함부로 말이라도 걸었니? 기분 나쁘게 쳐다봤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일부러 말끝을 늘인 칼리온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었어?”

진정하자. 아직 칼리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다. 설령 수상한 점을 눈치채도 사람이 고치에 갇혔었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차분하게 넘기면 된다. 차분하게….

“그땐 타르타로스 조사로 바빠서 다들 한껏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교수님께서 그 점을 신경써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

칼리온은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해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대충 지어낸 변명이 들킬지도 몰라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칼리온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뭐, 좋아. 태오도 모르는 눈치니까.”

생각보다 순순히 넘어가 줘서 다행은커녕 오히려 불안했다. 아무튼 불리한 화제에서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자세를 바로잡으며 칼리온이 관심 있을 법한 주제를 꺼냈다.

“사건 보고 말입니다만.”

“아, 대부분 사정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너만이 알고 있는 얘기를 듣고 싶어.”

조용히 불타오르는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기대감이 가득 묻어났다. 닉스와 관련된 사건은 전부 밝히되, 사제가 아스레인의 뿔을 찾고 있다는 사실만은 숨기기로 했다. 아직 칼리온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부디 무사히 보고를 끝내길 바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년 전, 한 사제가 타르타로스로 침입해 닉스에게 신력이 깃든 창을 꽂았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응. 마을에서 봉사도 했다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언에 따르면 그 사제는 푸른색 옷을 입었다더군요.”

“…역시 기록대로 레톤의 사제네.”

“옷만으로 특정할 수 있는 건가요?”

“일단은. 푸른색은 레톤 신의 상징이라 시오 황조 때도 깃발이 파란색이었어.”

음침하기도 하지.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뒷말에서 엷은 적의가 느껴졌다. 이내 칼리온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일부러 레톤의 사제에게 의심을 돌리려고 함정을 판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오는 했겠지.”

에브게니아가 시오를 억누르고 황위에 올라서 그런가. 칼리온의 적의는 시오 황제가 열렬히 따랐던 레톤 신에게도 번졌다. 이 정도라면 칼리온이 황제가 될 때는 레톤 신전이 대륙에서 뿌리 뽑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닉스는?”

“모습을 감췄습니다.”

“벌써?”

“저도 어느 정도 회복기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미 타르타로스를 떠났습니다.”

“아쉽게 됐네. 연구가치가 꽤 높을 텐데….”

“대신 이걸 담아 왔습니다.”

마석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닉스의 본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거대한 거미의 다리에 남겨진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석에 흉터를 담을 때만 해도 칼리온이 조금은 당황하거나 놀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흉터를 훑어보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태오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하고 싶어?”

“…네?”

“선황 폐하께서 성물을 이용해 타르타로스에 마물을 가둬 두었다. 그 때문에 억울하게 산사태에 묻힌 시신까지도 수습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이중적인 면모야. 안 그래?”

“그건….”

설마 칼리온이 먼저 선황을 비난할 줄은 몰랐다. 모두가 예상했듯 태자라면 바로 선대 에브게니아를 감쌀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온은 아주 가볍게 예상을 빗나갔다.

“말뿐인 소문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증거가 있다면 황실을 충분히 압박할 수도 있어.”

심지어 황실을 압박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어떤 연유로 선황을 싫어하는 건가? 흘끔 쳐다보았으나, 반듯하게 그려진 미소가 어떤 의도를 감추고 있는 지 읽어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복잡하게 계산했다간 괜히 휘말리기 쉽다.

그러니 처음 결심한대로 마석을 칼리온에게 건넸다.

“지금… 뭐하는 거야?”

“마석을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왜?”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어쩔 줄 알고? 선황 폐하를 위해 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처리할 수도 있어.”

“물론 그럴 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용 가치가 남아 있는 한, 어떤 말을 해도 칼리온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니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해서라도 칼리온을 시험해 봐야만 했다. 나를 도울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마물을 해할 사람인지.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타르타로스 사건은 양날의 검입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황실의 투명성을 자랑할 순 있어도, 내부에서 반발이 클 겁니다. 결국 선황 폐하의 잘못을 알리는 셈일 테니까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이 점은 알아 주세요. …과오를 인정하는 자에겐 미래를 바꿀 기회가 있고, 과오를 숨기는 자는 끝까지 과거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말이 길어질수록 칼리온의 얼굴에 만연해 있던 미소가 서서히 식어 갔다.

“사건이 세간에 드러난다 한들 전하의 입지가 흔들리진 않을 겁니다. 다만, 예전처럼 사건을 묻어 버린다면… 제국은 결국 기울고 말 겁니다.”

“호오, 제국이 기운다고?”

“산까지도 삼키는 커다란 불은 늘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니까요.”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 마물’의 가호를 받는 카르사 제국도 안심하긴 이르다. 비록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진 확신할 수 없어도, 균형이 깨진 나라는 반드시 병들고 말 것이다. 그게 마물에 의해서든, 인간에 의해서든 정해진 수순이었다.

“전하께선 진정 제국의 번영을 위하시는 분이니, 선조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눈썹 한쪽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게다가 이미 사건을 따로 조사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무슨 근거로?”

“아까 말씀하셨으니까요. …‘기록대로’라고.”

말이 끝나자마자 칼리온은 표정을 얇은 종이처럼 구겼다. 넘어도 되는 선을 잘못 계산했나? 꾹 다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무엄하다는 고함을 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 터진 소리는 제법 유쾌했다.

“푸핫!”

칼리온은 힘겹게 참던 웃음을 한 번에 터뜨렸다. 한바탕 얼굴이 새빨개져라 웃다가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재밌는 얘기를 했나? 멀쩡한 제국이 망한다고 해서 우스웠던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

“아아, 처음이야. 태자인 내 앞에서 제국의 망조를 들먹이는 사람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 진심으로 한 소리겠지. 그래서 꽤나 신선했어. 다들 제 몫 챙기기 바빠서 내게 천세만세를 누리라고 하거든.”

검지로 눈가를 닦은 칼리온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당장 목을 쳤을 텐데, 이상하게 너는 기분 나쁘지 않아. 왜일까?”

“…좋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오랜만에 속 시원한 직언을 들었어.”

아부를 싫어하는 그이기에 직언을 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호쾌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큭큭 웃던 칼리온은 힘겹게 숨을 돌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재밌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무슨 소문이요?”

“캄페 산에 신이 강림했다더구나.”

언덕을 하나 넘으니 곧바로 산이 튀어나온 격이었다.

창에서 레톤 신의 일부가 나타났단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텐데.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순진한 척 되물었다.

“신이요?”

“한 모녀가 봤다던데? 백설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아름다운 신을.”

“무슨….”

“미천한 평민 앞에 현신한 신이기에 소문이 꽤나 좋게 퍼지고 있나 봐. 마물을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마물을 사랑한다고 했다지.”

잠깐만. 이건, 아니. 그러니까 이건….

“혹시 그 신의 이름이 뭔지 들으셨어요?”

“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아니길 빌었으나, 칼리온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맞아. ‘헤메라’라고 했어.”

말도 안 돼. 유품을 돌려주러 갔다가 아이와 여인을 만나긴 했다. 물론 아이가 나를 천사라고 부르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라고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새 헤메라는 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마물을 사랑하는 신이.

“처음 듣는 이름인데. 태오는 아는 거 있어?”

“저, 전혀요….”

“그래? 아무튼 캄페 산 일대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나 봐. 마을 곳곳에 있던 날카로운 송곳니는 사라지고, 헤메라를 상징하는 재스민 꽃이 마을을 뒤덮었다나?”

지금 찻잔을 들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달달 떨리는 손을 보고 분명 의심을 샀을 테니까. 식은땀이 잔뜩 밴 손을 맞잡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고요?”

“응. 재건한 신전은 조만간 헤메라를 모시는 첫 번째 신전이 된다지. 그의 신념을 따라 처음으로 ‘성물이 없는’ 신전이 탄생할 거야.”

“벌써 신전까지….”

“신기하지 않아? 마물과 인간 모두가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신전이라니.”

웃음도 안 나온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날 한 번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 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아무도 그걸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힘든 인생에 기댈 신의 존재가 그만큼 간절했던 건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물었다.

“누군가 봤다는 증언 하나만으로 신의 현신을 믿는 거예요?”

“태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 …알고 있잖니.”

“설마 전하께서도 ‘헤메라’의 존재를 믿으시는 건가요?”

“나는 나 외의 누구도 믿지 않아.”

“그렇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칼리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허황된 소문이라 할지라도 내겐 잘된 일이야.”

“…왜죠?”

“제국 안에 남아 있는 사자의 씨는 완전히 사라져야만 하거든.”

“사자의…씨….”

“그러기 위해선 레톤 신의 대척점에 서있는 헤메라를 이용하는 게 좋겠지.”

마물을 토벌하고 정복 전쟁을 이어 나간 시오 황제와 그들이 따르던 전쟁의 신 레톤.

확실히 마물을 사랑하는 신이라 소문이 퍼진 헤메라는 그와 정반대의 존재였다. 그래서 칼리온은 캄페 산을 시작으로 퍼진 헤메라 설화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게다가 네가 말한 대로 지나간 과오를 인정하기 위해서도 헤메라를 써먹는 게 좋겠어. 타르타로스에서 조사하다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죄를 뉘우쳤다고. 어때?”

“어떠냐니….”

“앞으로 제국 안에서 헤메라는 더 많은 신도를 거느리게 될 거야. 그러는 게 마물을 연구 대상으로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겠지.”

차가운 안광을 빛내는 칼리온을 보니, 문득 시스템의 말이 떠올랐다.

‘현세의 신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입니다. 진정 순위를 매기자면, 분노한 신보다 그걸 이용하는 인간이 더 위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체 어찌 되려는 걸까.

한순간에 신이 되어 버린 인간으로선 도무지 훗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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