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 (127/305)

#127

그야말로 모순으로 점철된 하루였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과 신에게 대척되는 마물이 처음으로 신전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치 사제에게 죄를 고하듯 아스레인은 비로소 진실한 모습을 보였고, 나는 고작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의 아픔을 보듬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아스레인은 영영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렴 괜찮다. 무모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한정된 시간을 사는 자의 특권이니까.

“이만 돌아갈까요? 다들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러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신전을 나서는데 아스레인이 제자리에 멈췄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은 무언가 말하기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곧 머뭇거리던 입술이 열렸다.

“나에 관한 사실은… 부디 자네만 알고 있었으면 하네.”

“그럼요. 입은 무거우니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대답하다 말고 가까이 다가가 아스레인을 불쑥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딱 마주치니 길고 가는 눈썹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 살짝 올라갔다. 별것 아닌 행동에도 왠지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헤헤 웃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나.”

“그냥… 좋아서요.”

정확한 이유 같은 건 없다. 단순히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어서 좋고, 서로를 의심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 내게 맞춰 좁아진 보폭도, 살며시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도, 봄볕처럼 따스한 빛을 띠는 눈동자도 전부 소중하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자꾸 쳐다봐서….”

“자네가 좋다면야.”

가끔 이런 말을 아무 예고도 없이 하는 건 조금 참아 줬으면 하지만…. 아무튼 아스레인과 관련된 거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마주 웃어 주는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어요.”

“음? 누구한테.”

“닉스 님이요.”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아스레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놈…. 아니, 그자에게 뭐가 고맙다고.”

“갑자기 기억을 돌려주셔서 당황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계기를 만들었잖아요?”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들어도 씰그러진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찌하든 자네의 자유이지만, 닉스는 진즉 타르타로스를 떠났네.”

“네?”

나도 모르게 멍청한 반응이 튀어 나갔다. 닉스가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났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니 아스레인은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내가 찾으러 갔을 땐 이미 거미줄 한 가닥도 남기지 않았더군.”

“그럴 리가요. 저한테는 회복할 시간을 갖겠다고 했는데요?”

“어지간히 변덕스러워야지.”

조용히 타르타로스로 향하는 입구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닉스가 이곳에 없다니 왠지 시원섭섭했다. 제멋대로에다가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 없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내게 애정을 쏟아부어 준 마물에게 꽤나 정이 든 모양이다.

언제든 소환하면 선뜻 나타나 주겠지. 느긋하게 미식을 찾아다닐 닉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아쉬운 걸음을 돌리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닉스 님을 찾아가신 거예요?”

“…….”

“…교수님?”

“그냥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네.”

표정은 ‘그냥’이 아니라는데요? 싸늘하게 식은 눈빛은 당장이라도 내게 기억을 돌려준 책임자를 찾아내고 싶은 듯 보였다. 묵묵히 후일을 기약하는 아스레인을 보니, 왠지 닉스가 일찍 떠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닉스 님은 늘 본체는 타르타로스에 두고 환영으로 분신을 만들어 다니셨잖아요.”

“그렇다만.”

“혹시 교수님도 환영…은 아니죠?”

지금까지 분신을 보고도 몰랐다면 왠지 힘이 빠질 것 같다. 흘끔 눈치를 살피자 아스레인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런 걱정은 말게.”

“…다행이네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그 마물’이다. 몇 번을 되새겨도 처음 깨달은 것처럼 신기했다. 은근히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가볍게 손뼉을 쳤다.

“헉! 그럼 언제든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요?”

“환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한 번 돌아가면 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 힘들지.”

“그렇군요….”

“스스로를 껍질 안에 가둬 둔 상태이니까.”

“껍질이요?”

은유적 표현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자 아스레인이 뒤이어 설명했다.

“쉽게 말하자면 손바닥만 한 상자 안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걸세.”

“아…. 확실히 한 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힘들긴 하겠네요.”

생각해 보면 히페리온도 닉스처럼 나뭇잎으로 분신을 만들어 내 앞에 나타났었다. 아무래도 모습 자체를 바꾸는 건 꽤 귀찮은 일인가 보다. 무엇보다 좁은 상자 안에 스스로를 가둬야 하니 퍽 답답할 것 같았다.

“원래는 뿔이 마력 순환을 도와줬지만, 그 하나를 잃었으니 더 까다로워졌네.”

“그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마력을 빼낸 거군요….”

“그래. 물론 황실은 대대로 우리 가문이 ‘마력 과다증’을 앓는다고 알고 있지.”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자 아스레인이 검지로 주름 진 미간을 꾹 눌렀다.

“자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나.”

상자에 갇힌 채로 육신을 부수는 마력까지 빼내야 한다니. 아스레인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다. 위대한 ‘그 마물’이기에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마물이면서도 계속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니… 많이 힘들겠네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단지 마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닉스는 마물이라 타르타로스에 매장된 것도 모자라 어깨에 성물까지 꽂혔다. 다행히 마물의 피로 신력을 잠재웠으니….

잠깐. 마물의 피가 담긴 병을 떠올리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교수님.”

“무슨 일인가.”

“전에 창에 깃든 신력을 잠재운다고 마물의 피를 가져오셨잖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평온한 그의 얼굴에 한줄기 금이 갔다. 그 탓에 지나친 걱정이길 바란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번져 갔다. 설마, 설마.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겨우 운을 뗐다.

“설마 그거… 교수님 피예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꽉 붙은 입술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없었다.

이젠 안다. 아스레인은 정곡이 찔렸을 때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든단 사실을.

“교수님!”

“급한 사안이 아니었나.”

“하아, 아무리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는 태도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루 만에 마물의 피를 구해 왔기에 그저 대단하다고 넘겼다. 설마 아스레인 자신의 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을 그만큼 빼내려면 얼마나 상처를 깊게 내야 했을까. 물론 고통에도 무감한 아스레인이라면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제 손을 베었겠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는 내가 괴로웠다.

“제가 안 물어봤으면 끝까지 말씀 안 할 작정이었어요?”

“그건….”

이 사람은 정말…. 잿빛이 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스레인.”

“미안하네.”

“네? 아니, 왜 사과하시는 거예요?”

“나 때문에 자네가 화난 것 아닌가?”

“아니에요…!”

아스레인에게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복잡한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자신의 피를 담아 온 아스레인도, 그걸 아무 의심 없이 받은 나도,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사실마저 불편하기만 했다.

“단지… 교수님이 너무 아픔에 익숙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랬어요.”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한 아스레인이기에 이번 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힘든 내색은 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 배웠으니까. 하지만 기댈 곳 하나 없는 삶은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그때 선뜻 피를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교수님 덕분에 하루빨리 창을 없앨 수 있었어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자 아스레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을 잊었다. 왜 그랬냐는 추궁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게 의외였나 보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뭐든 내킨다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아, 물론 강요는 아니에요.”

“…뭐든?”

“이제 웬만한 건 다 아는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끌어안지 않으셔도 돼요. …아! 저한테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사소한 부탁도 들어 드리고 싶어서 곁에 있는 거니까.”

너무 속 보였나. 뚫어 버릴 기세로 달라붙는 시선에 어색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스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무엇이든 상관없나?”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은 곧바로 두 팔을 벌렸다.

뭐…지? 예기치 못한 행동에 바보같이 입을 헤벌린 채로 쳐다보았다. 어쩌라는 거야. 달려가서 안기기라도 하라고? 돌처럼 굳어 버린 내게 아스레인은 급기야 쐐기를 박아 버렸다.

“이리 오게나.”

“…진심이세요?”

“이건 안 되는 건가?”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당연히 나는 좋지만, 이러는 의도가 뭐야? 자각이 있긴 한 거야? 고해소 안에서 내가 먼저 끌어안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건 위로 차원에서 한 거고. 물론 사심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러니까….”

고민하는 사이에도 아스레인은 멀뚱히 팔을 벌린 채로 서 있었다.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이 어째 귀엽게 느껴졌다. 이런 무례한 생각을 들키면 분명 혼나겠지.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부여잡고 슬그머니 아스레인에게로 다가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주춤거리다가 소심하게 품에 안겼다. 단단한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대자 아스레인은 내 등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별장으로 돌아가지.”

그 순간 바람이 우뚝 멈추며 주변 풍경이 뒤틀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신전이 있던 자리에 태자의 별장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드넓은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알아챘다.

가까이 다가오란 말은- 다름 아닌 이동 마법을 쓰겠다는 의미였다.

“교수님….”

“음?”

“마법을 쓰실 거라고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머릿속으로 북 치고 장구 치고 고백하고 귀걸이 선물하고 웨딩 마치 울리고 혼자 다했네. 그냥 껴안고 싶은 줄 알고 신났던 게 민망해져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한껏 상기된 뺨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자 낮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무슨 생각을 한 건가.”

“네에, 제가 오해했어요. 그러니 그만 놔주실래요…?”

민망하니까. 뒷말을 웅얼거리며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의 팔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본의 아니게 가슴에 비비적거리는 꼴이 되었다. 적잖이 당황하던 차에 아스레인은 순순히 팔을 풀어 주며 중얼거렸다.

“뭐, 딱히 오해는 아니지만.”

“…네?!”

화들짝 놀라 반문하자마자 울타리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느끼곤 황급히 아스레인에게 떨어져서 옆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옥신각신하며 걸어오는 아이리스와 진, 그리고 세잔이 보였다.

앞서 걸어오던 진이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역시 오셨네요!”

“역시라뇨?”

“아이리스가 갑자기 정문에서 누군가 마법을 썼다고 했거든요.”

어깨를 으쓱인 진은 이내 친숙한 투로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그래. 말없이 사라져서 미안하군.”

“어휴, 아니에요. 항상 여러 일로 바쁘신 거 알고 있으니까요.”

설마 아스레인이 사과할 줄은 몰랐는지, 자못 놀란 진은 양손을 열심히 내저었다. 그사이 한 걸음 뒤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아이리스가 대뜸 끼어들었다.

“됐으니까 이제 점심 먹자. 너 계속 안 먹고 돌아다녔잖아.”

오늘은 의외의 연속이다. 항상 밥 얘기만 하면 지겹지도 않으냐고 투덜대던 아이리스가 처음으로 끼니를 신경써 줬다. 오오-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쳐다보니 아이리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뭘 그렇게 쳐다봐.”

“신기해서요.”

“뭐가?”

“매번 일 끝나고 레스토랑 가자고 하면 그렇게 싫어했잖아요.”

“누가 싫대? 그냥……열심히 일했으니까 배는 채워야 할 거 아냐.”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어째 절 닮아 가는 것 같네요.”

“그래. 네가 하도 먹는 거 타령하니까 나까지 옮았나 보다. 됐냐?”

장난스러운 웃음을 꾹꾹 누르며 아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메뉴가 뭔데요?”

“주방장이 꽤나 무리했더라. 여기서 고생한 건 아나 봐.”

“그 정도라고요?”

갸웃 고개를 기울이자 세잔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얹었다.

“태자 전하께서 따로 지시를 내리셨는지, 평소보다 꽤 대단했습니다.”

“세잔 경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인가 보네요.”

아무렴 세잔은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진 않으니까 순순히 믿었다. 무려 태자가 신경써 준 오찬은 어떤 느낌이려나. 기대에 찬 얼굴로 별장에 들어가려는데 맥 빠진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뭐냐?”

“뭐가요?”

“왜 내가 말할 때는 안 믿더니, 세잔…경이 말하니까 믿어?”

“어…. 딱히 그러진 않았는데요.”

“웃기시네. 명백히 반응이 다르잖아.”

그랬나? 듣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심각하게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기자 아이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뭘 또 진지하게 생각해.”

“진지하게 하신 말씀 아니에요?”

“진짜 나보다 세잔 경이 믿을 만하다는 거야?”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스레인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젠 별걸로 트집을 잡는군.”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 아이리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스레인과 아이리스의 눈길이 맞닿는 곳에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모르시나 본데 교수님도 만만치 않아요.”

“…자네만 할까.”

“그으래요? 전에 태오가 고치에 잠들어 있을 때, 잔뜩 날카로워지셔서 우리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하신 분이 어디 누구셨더라.”

제 딴에는 대단한 약점을 붙잡았는지, 아이리스는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이 서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자네. 혹시 내가 말 걸길 원했나?”

“…예?! 그게 뭔 소리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가 아니잖아요.”

“내 귀엔 그리 들렸네.”

“그, 거 해석을 너무 이상하게 하시네.”

제법 당황한 듯 아이리스는 말까지 더듬었다. 급기야 궁지에 몰린 아이리스 옆으로 세잔이 다가왔다. 웬일로 도와주나 했더니만 세잔은 차분히 아스레인의 말에 지원사격을 했다.

“제게도 그렇게 들렸습니다만.”

“그쪽은 갑자기 왜 끼는데!”

“그냥 의견을 말한 겁니다.”

어째 바짝 털이 선 길고양이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아이리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동안 이 아옹다옹한 풍경이 그리웠다. 숨죽여 쿡쿡 웃는 내게 조용히 다가온 진이 귓가에 속삭였다.

“태오. 배고프니까 우리끼리 먼저 가요.”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기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요. 얼른 먹고 돌아가죠.”

오늘따라 왠지 안겔루스 대학이 그리웠다. 아스레인이 있는 연구실도, 레스토랑에서 그들과 함께 먹는 점심도, 온실에서 나를 기다릴 마물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니 앞으로 내 사람들과 일상은 반드시 지켜 낼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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