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126/305)

#126

진정한 그를 마주하는 순간을 지금껏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인간의 모습과 마물의 흔적이 뒤섞인 아스레인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신화 속에 등장할 법한 아름다운 자태에 홀려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아스레인은 나를 피하진 않았으나, 그의 눈동자에 얼핏 후회가 서렸다.

“왜… 벌써 왔나.”

냉랭한 말투와 달리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아스레인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한 걸음 앞에 멈춰 서서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릴까 봐요.”

“…그저 편하게 살다 가기도 짧은 인생이거늘.”

“예전부터 고생하는 게 적성이더라고요.”

조심스레 두 손을 뻗으니 아스레인이 꿈에서처럼 머리를 숙여 주었다. 뺨에 돋아난 비늘에 성물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이 반사되어 마치 바다에 떠오른 윤슬처럼 보였다. 따스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자 그에게 남아 있던 마물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졌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외롭지 않았어요?”

“괜찮았네.”

“정말요?”

이윽고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스레인은 내 손바닥에 뺨을 살짝 비볐다. 꼭 그간 느끼지 못한 온기를 갈구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시큰했다. 엄지로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 주니 딱딱한 입매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를 만나기 전까진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역시 아스레인은 그대로다.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보다 더 뻣뻣하게 굳은 나머지 주춤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여느 때처럼 상기된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음?”

“당신은 누구죠?”

어떤 책에서는 마물의 왕이라고 표현했고, 더러는 마물을 지키는 신이라고 일컬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 마물’을 칭송했으나, 진정 실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린단 생각에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빛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위엄 있게 말했다.

“나는 균형을 이루는 자. 인간에겐 신이 있으니, 마물에게도 마땅히 기댈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몇몇 인간의 눈에는 신에게 대적하는 자로 보인 모양이지. …마물을 위해 이 땅에서 인간을 몰아낼 멸망의 상징이라 불리기도 했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였다. 문득 ‘그 마물’을 쌍생으로 만들어 건국 신화를 보기 좋게 포장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스레인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역사는 끊임없이 그를 좋을 대로 해석했다. 정작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지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씁쓸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처음 만났을 때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었으나, 아스레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네.”

“네?”

“물론 거짓말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진심일세.”

아스레인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뿔이 잘리던 순간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졌지. 심지어 내가 어째서 유피테르에게 머리를 내어 주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아.”

힘이 담긴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갈 적,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까지 함께 사라졌다니…. 그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를 보니 순간 숙연해져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내가 잠들었을 때 본 장면은 아스레인이 일부러 흘려 넣은 기억이 아니란 말인가. 수차례 고민하다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저… 봤어요. 당신의 뿔이 잘리던 순간을.”

예기치 못한 말에 아스레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그걸 자네가 어떻게….”

“교수님께서 떠난 후에 꿈꾸듯 환영을 봤어요. …비록 일부에 불과했지만요.”

영역에 발을 들인 유피테르가 무어라 말을 하자 아스레인은 체념하며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게 어떤 내용이었는지 듣지 못한 까닭은 아스레인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데에 있었다. 혹시 그가 마물을 버렸다는 착각에 죄책감을 가질까 봐 황급히 마지막으로 본 모습을 설명했다.

“유피테르가 신력이 깃든 검을 꺼내는 순간까지도 교수님은 어린 마물들을 지키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스레인의 입가에 맺힌 냉소적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글쎄…. 내겐 흐릿한 기억이네. 그러니 그들이 나를 배신자라 불러도 할 말이 없지.”

배신자. 스스로를 희생한 이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꼬리표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아스레인의 사정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좋을 대로 꾸며진 기록만이 역사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팔을 살살 쓸어 주며 물었다.

“…과거는 전부 잊으신 거예요?”

“아름다운 풍경과 나를 따르던 자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던 것 같군.”

과거를 회상하는 아스레인에게 잠시나마 기분 좋은 미소가 머물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오케아노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사에 냉정한 오케아노스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 묘사했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그때를.

“그럼 언제부터 기억이 온전한 거죠?”

“뿔이 잘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신력에 묶여 있더군.”

“…설마 유피테르가 봉인을 해 둔 건가요?”

“아마도. 의식이 돌아오면 날뛸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인상을 와락 찌푸리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별것 아닌 양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웬 인간 하나가 내 앞에 있었네. 그 덕분에 뿔이 잘린 후로 세월이 꽤나 많이 흘렀다는 걸 알아챘지.”

“그 덕분이라뇨?”

“난생 처음 보는 복식이었네. …뭐, 지금이야 그마저도 옛것이지만.”

아, 짧게 탄식을 내뱉고 나그네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당신을 찾아온 그가 대체 누구죠?”

“…자신을 ‘토리코르토 산 에브게니아’라고 소개했지.”

나도 모르게 입이 툭 벌어졌다. 에브게니아 공작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봉인된 아스레인을 찾아왔었다니.

“교수님을 어떻게 찾은 거예요?”

“신탁이 이끌었다고 했네. 그러곤 내게 신력에 묶인 봉인을 풀어 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아스레인이 성물에 있는 신력을 잠재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구나. 물론 봉인을 풀어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무려 황위를 차지한 에브게니아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무 대가도 없이요?”

“설마.”

작게 헛웃음을 흘린 아스레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더군.”

“…네?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애초에 마물인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네.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한 소원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내 아스레인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완고히 거절하니, 그가 마석을 꺼내 여러 형상을 보여 주더군.”

“형상이라면….”

“균형이 무너진 세계는 참담하기 짝이 없었지. 전쟁으로 인해 대지는 황폐해졌고, 마물과 인간의 사체가 산처럼 쌓였지.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피가 강을 이뤘으며, 먹을 것이 사라진 이들은 끝내 동족을 취했네.”

고통스럽게 찡그려진 미간엔 어두운 과거처럼 깊은 주름이 졌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토해낸 아스레인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상황에서 에브게니아가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하는데, 어찌 돕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럼 에브게니아 공작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건….”

“결국 참사를 두고 볼 수 없었으니 계약 하에 신력에서 벗어났네.”

“계약이요?”

그는 건조하게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위대한 에브게니아의 이름 아래 카르사 제국이 영원하기를.”

“……!!”

“그리하여 오직 번영을 위해 황실을 돕는 ‘아스레인’ 가문이 탄생한 걸세.”

이제야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당시 에브게니아 공작은 시오 황조와의 커다란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그때 위대한 마법사가 공작의 편을 자처하며 ‘아주 우연히’ 나타나 대승을 이끌어 냈다. 바로 아스레인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백작의 작위를 하사받고 지금까지도 황실을 돕고 있다.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그럼 황제가 대대로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니.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인간은 에브게니아 1세뿐이네.”

“그럼 계약은요? 1세가 승하한 시점에서 끝난 거 아닌가요?”

“맹약은 에브게니아의 핏줄로 이어지니 결국 내가 죽기까지 끝나지 않네. 그러니 이 우스운 연극도 계속되어야 하지.”

에브게니아는 신탁으로 아스레인을 찾았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계약 하에 그를 봉인에서 풀어 주었다. 하지만 황실을 돕는 계약은 선황이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위대한 에브게니아의 이름 아래 카르사 제국이 영원하기를.’

아스레인의 가호를 받는 한 카르사 제국은 오래도록 번영을 누릴 것이다. 세력 다툼도, 정복 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니 인간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럼 아스레인은? 불멸인 그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로 얽매여 있었다.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신 거예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에 많은 생명이 사라졌잖나.”

“전쟁이 일어난 건 교수님 때문이 아니에요.”

“그 원인이 무엇이든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내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닐세.”

“그래도….”

“태오.”

가볍게 말을 가로챈 아스레인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존보다 더 쉽게 평화를 되찾는 방법이 뭔지 아나. …힘의 차이에 의해 만들어진 휴전일세.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는 한, 마물들은 인간과 싸우고자 할 테지. 그로 인해 억울한 이들까지 전쟁에 쓸려 나가게 할 순 없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얼굴엔 오랜 세월 안고 있었던 고뇌가 드러났다.

“만약 내가 인간 세상에 묶이는 조건으로 더 많은 마물을 살릴 수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그리할 걸세. 무릎을 꿇라 하면 꿇고, 남은 뿔까지 달라 하면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네.”

“…교수님.”

“나는 여태껏 마물이 인간에게 이롭게 ‘쓰일 수 있도록’ 연구해 왔네. 그게 무자비한 학살을 줄이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내 동족, 나의 아이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책을 ‘인간을 위해’ 계속해서 써 나갈 걸세.”

비참하게 비틀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비난하려거든 그리하게.”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최대한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은 아스레인을, 누가 감히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더 많은 마물들이 살아남았잖아요.”

속내를 털어놓은 아스레인은 거친 파도 앞에 으스러진 바위처럼 지쳐 보였다. 도무지 위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히 어깨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질수록 아스레인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아 갔다. 이윽고 평소대로 돌아온 그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닉스가 그 말을 들으면 기함을 토하겠군.”

“…닉스 님이요?”

“그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나라를 팔 바에는 피를 보더라도 끝까지 싸우라고 했지.”

“그분다운 말이네요.”

“그래. …어쩌면 그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네.”

만약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승자가 누구이든 지울 수 없는 피 냄새가 대지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비참함을 알기에 아스레인은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놓았다. 마물뿐만 아니라, 죄 없이 쓸려나갈 인간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더 이상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 따져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유피테르는 뿔을 자른 것도 모자라 아스레인을 신력으로 봉인해 두었다. 그 비열한 황제가 과연 뿔을 어디에 두었을까. 그리고 에브게니아 공작이 아스레인을 찾은 게 정말, 신탁에 의해서일까.

“뿔을 되찾으면 기억이 돌아오는 건가요?”

“글쎄. ‘아스레인’이 된 후로 온 대륙을 돌아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했지. 이미 파괴되었는지도 모르네.”

“아뇨. 파괴되진 않았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지?”

조용히 턱을 어루만지며 예전에 들었던 말을 회상했다.

“닉스가 그랬어요. 어깨에 창을 꽂은 사제가 잘린 뿔을 찾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래도 당신의 뿔이 현세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닉스는 아스레인이 토벌되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스레인이 목이 아닌 뿔이 잘렸다는 사실도, 그 사제가 찾고 있는 물건이 실은 아스레인의 뿔이라는 것도 몰랐다. 배후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제가 아무 근거도 없이 갑자기 뿔을 찾을 리가 없다. 반드시 우리가 모르는 단서를 가진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알리면 아스레인은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별 감흥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찾아서 무엇 하나.”

“빼앗긴 거잖아요. 얼마나 오래 걸리건 되돌려야죠.”

“태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실망하고 싶지 않네.”

전부를 포기해야만 했던 아스레인이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진 알고 있다. 하지만 무너질 듯 위태로운 그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물었다.

“그럼 저한테는요?”

“음?”

“제게는 아직 실망하지 않으셨죠?”

뜬금없는 물음에 아스레인은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갔다.

“그죠?”

“…그게….”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가 이 사람 때문은 아닐까.

“그럼 같이 찾아요.”

비틀어진 순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서.

뿔도, 기억도, 이름도, 과거의 찬란한 나날들도- 남을 위해 전부를 내려놓은 그를 위해서.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줄곧 건조한 황금색 눈동자에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여렸다.

인간인 나는 아스레인의 인생에 불과 수 초만 머물다 갈 것이다. 그럼에도 사시사철 메마른 땅을 아주 잠깐이나마 촉촉하게 적실 봄비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아스레인.”

“…그래.”

두 팔을 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도, 지금도…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오늘따라 유독 그에게서 풍기는 창포 향기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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