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 (125/305)

#125

아스레인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놀라는 기색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얇은 종이에 물감이 스며들 듯 빠르게 감정을 숨겼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얼굴엔 이 순간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닉스가 말한 건가?”

짧은 물음이 기나긴 의문에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아뇨. 단지 제게 잃어버린 기억을 돌려주신 것뿐이에요.”

디아벨 아스레인이 ‘그 마물’이다. 만물에게 추앙받았으나 끝내 유피테르에게 무참히 처형당한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의 처연한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한편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지금껏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네.”

“…교수님.”

“그 교수라는 직위까지도 꾸며진 걸세. 이름도, 가문도, 과거조차도 무엇 하나 진실한 게 없지.”

아스레인은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어떤가. 태오. …이제야 나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나?”

자조적으로 비틀린 입꼬리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이 말을 꺼낸 요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죄송하지만, 틀렸어요. 교수님과 더 가까워지려고 꺼낸 말이에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니 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아스레인은 항상 내가 떠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예전엔 나를 못 믿는 건가 싶었지만, 이젠 그 심경을 안다. 영생을 사는 아스레인에게 나는 한철만 살다 가는 인간이었으니 언젠가 헤어지게 되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이별을 앞당길 필요가 있을까.

“설령 전부 거짓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뭐?”

“제가 지금껏 느낀 당신의 본질은 그대로니까요. 진정으로 마물을 아끼고,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저를 기꺼이 거둬 주셨죠. 그 모습마저 거짓이었나요?”

무언가 말하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짧은 숨만 토해 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시선은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제가 교수님을 따른 건 교수님이 백작이라서가 아니에요. 황실에게 총애받는 가문이라서가 아니라고요.”

모든 게 거짓으로 둘러싸여도,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처음엔 소설에 묘사된 아스레인을 존경했으나 결코 좋아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본 끝에 완벽한 외형 안에 숨겨진 내면을 보았다.

“그냥 당신이었으니까. …곁에서 지켜볼수록 마음이 갔으니까요.”

어딘가 쓸쓸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내면을 가진 그를 연모하게 됐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겐 교수님의 안위가 제일 중요해요.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제 욕심보다도 더요. 제 이기적인 마음이 교수님을 해친다면 기꺼이 끊어 내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스레인이 위대한 마물이란 사실에 두렵기는커녕 긴 세월동안 외롭진 않았을는지 걱정하는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교수님. …정말 제게 전부 말해 주실 순 없는 건가요?”

애원하듯 말하니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여태 완벽하던 요새가 지금이라면 툭 건드려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꽉 잡고 있던 팔을 천천히 놓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제가 이 비밀을 알아서 교수님께서 곤란해지는 거라면… 지금 제 기억을 지워 주세요.”

“…태오.”

“의심에서 확신으로 번져 나간 이 불씨를, 완전히 꺼트려 주세요.”

더 이상 아스레인을 마주하기 힘겨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싸늘한 손끝이 이마에 닿았다. 곧 기억이 사라지겠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던 그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고 말하려고 했네. 하지만 자네를 보면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

조심스레 눈을 뜨자 메마른 땅처럼 건조한 표정에 허무함이 드러났다.

“내 정체를 안다고 자네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 생각한 건 아니네. 단지… 이 세상의 이면을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세.”

“이 세상의 이면이요?”

“제국은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나는 그들을 도우려 대대로 마물 연구에 힘쓰고 있네.”

“…거짓말.”

“하지만 그리 포장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은가.”

아스레인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클라우스 저택에서 보았던 유리 온실을 기억하나.”

“…잊을 수가 없죠.”

“이 제국 또한 거대한 온실이네. 가꿔진 꽃, 시들지 않는 나무. …하지만 풀이 사철 내내 푸를 수 있는 건 굳게 잠긴 지하실 덕분이지.”

지하실이란 말에 참혹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카르사 제국이 있기까지 무수한 피가 흘러내린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그보다 더 깊은 사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희생으로 만들어진 번영을 누리는 인간들 사이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사실을 왜 혼자 끌어안고 계신 거예요?”

“이 세상에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아스레인은 삭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든 인간들이 지하실의 존재를 알게 되어도 끝내 자네만은…. 그 눈만은 아름답게 핀 꽃만 담길 바랐지.”

“…왜죠?”

“자네가 그리는 세계를 지켜 주고 싶었으니까.”

진중한 말끝에 난데없는 헛웃음이 따라붙었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지.”

이내 아스레인은 내뱉은 말을 스스로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태오. 내겐 이상(理想)을 논하는 존재가 필요했네.”

“이상…이요?”

“진즉 이 세계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으나, 자네는 달랐지. 나는 그 빛나는 눈이 꿈꾸는 세계를 엿보고 있었네. 하루아침에 사라질 백일몽인 걸 알면서도….”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지. …자네 곁에 있으면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네. 완벽하게 만들어진 모형 정원 속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어.”

“…….”

“그래서 자네에게 현실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네.”

불현듯 아스레인이 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이뤄내지 못한 일을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땐 아스레인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면 당연히 나도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이젠 알겠다.

나는 그의 이상향이자, 돌아오지 않을 낙원이었으며, 잃어버린 과거였다.

지겨운 현실에 지친 아스레인은 이상을 꿈꾸는 나를 도피처로 삼았다. 그래서 공생이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내게 현실을 보여 주지 않았다. 완벽한 온실 속 화초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다시 고민해 보게. 아무 걱정 없이 새로운 마물을 만나며 연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일 테니.”

“교수님. 저는….”

“하지만 정녕 온실 밖의 세상을 알아야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그래도 이 사실 하나만은 유념해 두게.”

가볍게 말허리를 자른 아스레인은 차가운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며 읊조렸다.

“…온실 밖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고요한 바닷속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떠다니던 그때, 저 멀리서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님!]

까르르, 기분 좋은 웃음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동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늘 혼자 웅크리고 있던 그 마물은 웬일로 어린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꼭 프라민을 닮은 도마뱀이 그 마물의 날개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말했다.

[있잖아요. 오늘 제가 엄-청 큰 열매를 발견했어요.]

[아니에요. 제가 먼저 찾았어요!]

[야! 내가 먼저 …님께 드린다고 말했잖아!]

[아니거든!]

아이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철없는 말다툼을 이어나갔다. 귀가 따가울 만도 한데, 그 마물은 제 발 아래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등허리에서 정신없이 뛰어놀아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넘어져 다칠까 걱정스럽게 지켜볼 뿐이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뒤늦게 알아챘다. 그 마물의 뿔이 양쪽 다 성하다는 사실을.

“…아….”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닌, 아스레인의 기억이었다.

그 후로 행복한 나날들이 단편적으로 이어졌다. 지금 아스레인이 회의적으로 변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울과 함께 불길한 동풍이 불어왔다. 말이 아닌 황소를 탄 나그네가 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신력이 느껴져 어린 마물들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안온한 공간은 순식간에 신력으로 둘러싸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감히 누가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이는가.]

느긋한 휴식을 즐기던 그 마물은 곧장 날개를 펴 어린 마물을 보호했다. 그르릉-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대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나그네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 마물 앞에 서서 얼굴을 드러냈다.

[너는….]

로브 아래로 비 오는 하늘처럼 암울한 회색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 마물은 곧바로 나그네를 알아본 듯 공격 태세를 취하다가 말고 날개를 움츠렸다. 이내 나그네는 길고 긴 연설을 이어 나갔으나 내겐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목소리만 기억에서 억지로 잘려 나간 것 같았다.

“어째서….”

의아함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그네가 품에서 칼을 꺼냈다. 신력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칼날은 정확히 그 마물을 향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야.”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순응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마침내 신력이 깃든 칼이 그의 숨결에 닿았다.

“안 돼!!!!”

서걱. 살벌한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아, 하아….”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겨우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이었다. 분명 꿈이나 상상이 아닌 아스레인의 기억이다. 이걸 내게 보여 준 게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틀림없다.

그 마물 앞에 선 나그네는 유피테르였다. 건국 신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인가. 아무렴 아스레인이 눈앞에서 사라진 지금, 진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만나러 가야 돼.”

더는 그를 혼자 둘 수 없다. 비록 아스레인이 바라는 ‘태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이지만, 나는 황폐한 돌 틈에서 비로소 생기를 찾는 잡초이니까.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니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내가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네.”

신력이 깃들어 성스러운 모습 같은 건 필요 없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에 피곤에 절어 있는 눈이 진정한 나를 뜻했다.

긴 머리카락을 어설프게 묶고 홀로 내려가니 진이 반갑게 인사했다.

“태오!”

“좋은 아침이에요.”

“돌아왔네요?”

“잠을 푹 잔 덕분인가 봐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진의 옆에 앉아 있던 세잔이 다가와 말했다.

“물론 새하얀 것도 예뻤지만, 역시 이쪽이 더 잘 어울립니다.”

“다행이네요.”

싱긋 웃으니 마주 미소 짓던 세잔이 대뜸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어제부터 안 보이셔서요.”

내가 의식을 잃자마자 사라진 건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할 유예 기간을 준 것 같지만, 불필요한 배려였다. 그런 기억을 보여 줘도 처음 내린 선택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가 모시고 올게요. 어디 계신지 알아요.”

“그래요?”

“그 전에…단검을 빌려줄래요? 세잔.”

“…예?”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세잔이 품에 있던 단검을 내밀었다. 가죽으로 된 칼집에서 꺼내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날카롭게 갈려 있는 걸 보니 어설픈 솜씨로도 가능하겠다. 이내 가지런히 묶은 머리카락을 쥐고 단숨에 잘라 냈다.

“무슨…!”

후드득- 예리한 날에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에 소란스러웠던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반면 진과 세잔은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단검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덩그러니 서 있는 그들을 두고 씩씩하게 별장을 나섰다.

물론 아스레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를 찾을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나무 사이에 서서 그림자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검게 피어오른 아지랑이와 함께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달리 의젓하게 앉아있는 아그누스에게 물었다.

“…너는 알고 있지?”

예전부터 아그누스는 시도 때도 없이 아스레인을 찾아갔었다. 그래서 아스레인과 돈독한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도감에 쓰여 있는 아그누스의 특징을 보고도 의문만 가득했다.

‘목마른 나그네처럼 예고 없이 찾아와 은혜를 입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는 비밀로 길을 안내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안내해 줄래?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세상이 묻어 놓은 비밀은, 살아있는 그 마물이었다.

***

아그누스가 이끈 곳은 캄페 산 중턱에 재건축된 신전이었다. 다섯 개의 기둥을 지나 신전 안으로 들어간 아그누스는 문 앞에 얌전히 앉았다. 그곳은 여느 신전에나 있는 고해소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레톤 신전의 보았던 문구가 똑같이 적혀 있었다.

‘그릇된 껍데기를 벗고 진실을 마주하리라.’

생각해보면 그때도 아스레인은 신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릇된 껍데기’가 벗겨질까 두려웠던 것일까.

“안내해 줘서 고마워. 아그누스. …잘 해 볼게.”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아그누스는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신전은 싸늘한 적막으로 둘러싸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문 너머에서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다. 저절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위압감 덕분에 알아챘다.

“저 왔어요.”

고해소 안에 그가 있다.

“그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루 만에 찾아온 탓에 내 진심을 또 의심하면 어떡하지. 괜한 걱정에 한참 동안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내었다.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어딘가에 갇혀 있는 건 제 적성이 아니라는 거.”

멋쩍게 목을 쓸어내리자 손등으로 짧은 머리카락이 스쳤다. 즉흥적으로 잘라 버린 머리카락이 마치 결의의 상징처럼 느껴져 긴장이 풀렸다. 짧게 숨을 들이쉬며 문 너머에 서 있을 그에게 말했다.

“만약 온실 바깥이 물 한 방울 없는 폐허라 하더라도 그곳에 당신이 있는 걸로 족해요. …그러니 더 이상 혼자 있으려고 하지 마세요.”

속내를 전부 털어놓고 고민 끝에 문을 열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고해소 안에 희미한 빛을 내는 성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신도와 신이 만나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오늘만큼은 마물이 서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분명 아스레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금빛 머리카락 위로 돋아난 뿔은 한쪽이 잘려 있었고, 투명한 피부 위로 비늘이 듬성듬성 드러나 있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보였다.

“아스레인. …아니.”

호박석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 모를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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