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124/305)

#124

닉스가 돌려놓은 기억은 클라우스 저택에서 막 나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하실에서 탈출하자마자 기절해 쓰러졌다는 아스레인의 말과 달리, 내 기억은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나를 지하실에 혼자 보낸 걸 후회하는 표정도, 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 말하는 목소리도 다시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거기까지였다.

‘맞다. 이걸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이게 뭐지?’

‘중요한 증거들이에요. 교수님께서 먼저 읽어 보신 후에 조사대에 넘겨 주세요.’

황금 사과. 클라우스가 평생을 바친 연구 결과였다. 마물을 광폭하게 만드는 향에 아스레인이 반응했지만, 아이리스의 말대로 그게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남긴 연구 기록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적은 시간 향에 노출된 인간에겐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물의 경우는 다르다.

[그에 비해 마물은 ‘황금 사과’의 향을 맡을 경우, 30분 내에 마력 코어가 교란된다. 이후 한 시간이 지나면 어지럼증과 과호흡 및 쇠약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물의 힘이 강할수록 더욱 확실하고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알아챘다. 연구 결과가 무서울 정도로 똑같은 증상을 보인 아스레인이-

‘시, 실험이 잘못됐나 봐요.’

마물이라고.

그게 아스레인이 내 기억을 지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는 내 머릿속에 싹튼 의심의 불씨가 모든 걸 태워 버리기 전에 꺼트렸다. 서서히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보이는 아스레인의 얼굴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게 잃어버린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스레인을 향한 감정을 자각했을 때? 내가 서점에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아니면, 더 거슬러 올라가 소설에 등장한 아스레인을 동경한 그때부터? 만약 내가 마지막 권을 읽고 죽었더라면 아스레인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

타르타로스를 떠나 별장 앞에 거의 다다른 길에 멈춰서 말했다.

“…너는 전부 알고 있었어?”

내 기억이 도감처럼 정리되어 있고 그중 낱장 하나만 인공적으로 뜯겨 있다면 시스템은 진즉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말해 주지 않았다. 지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곧 긍정으로 느껴져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내 모험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숨겼어? 아니면, 지금 알아채는 게 올바른 때라서 그래?”

아예 의심하지 못한 건 아니다. 단지 아스레인이 평범한 존재가 아닐 거란 예상만 어렴풋이 갖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 닉스가 돌려준 기억에 의해 퍼즐이 완전히 맞춰졌다.

“…이젠 알아도 되는 거야?”

아스레인의 정체를 암시하는 단서는 꽤나 여럿 있었다. 그중 저택과 심해에서 본 두 그림이 결정적이었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새하얗게 센 에브게니아 공작과 달리 세월을 거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얼굴이 너무도 아스레인을 닮아 있어 의아했다. 그러나 아스레인은 선조라고 딱 잘라 말했고, 난 그걸 그대로 믿었다.

모든 시간 선에 덩그러니 서 있는 그는… 한 사람이었는데.

결코 평범한 마물은 아닐 것이다. 사이누르는 그의 본질을 보지 못했고, 씨앗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불렀다. 심지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마물인 오케아노스나 히페리온, 닉스가 전부 아스레인을 알고 있었다.

전설 속 마물이 특별하게 대하는 존재는 오직-

“그 마물….”

설화 속에서 죽어 버린 그가, 그토록 살아있기를 바란 존재가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사랑하는 대상이었다니.

“…토할 것 같아….”

한꺼번에 밀려오는 충격에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별장 입구에 놓인 철문에 기대어 서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근, 두근. 기분 나쁘게 뛰는 심장을 당장이라도 떼어놓고 싶었다.

그때 멀리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다면…음….”

천천히 고개를 드니 허공에 휘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스레인이다. 그는 며칠간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쓰다듬으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얌전히 손길을 받는 말을 바라보는 눈빛은 만물을 굽어살피는 그의 것이었다.

“아스레인….”

이게 진짜 이름이긴 할까. 애초에 마물인 그가 왜 인간 행세를 하고 이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거짓으로 점철된 아스레인을 여전히 좋아하는 나 자신이었다.

마물이란 이유로 아스레인을 향한 내 감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왜….”

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떨리는 걸까.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것 같은 느낌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대로 스르르 땅에 주저앉으니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이윽고 익숙한 울림이 들렸다.

“…태오?”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물기로 젖은 눈이 마주치자 아스레인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그대로 말의 고삐까지 팽개치고 황급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왜 이런 곳에 있나.”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두려운 건 아스레인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에 뒤바뀔 처지 따위가 아니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하하….”

아스레인이 아무렇지 않게 내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울까 봐 두렵다.

“…무슨 일 있나?”

그럼 이 목소리도 못 알아듣겠지.

“아뇨. 그냥 얼굴을 보니 좋아서요.”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걸까 싶겠지.

“그게 무슨….”

“산책을 하고 싶어서 잠깐 나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었어요. 저… 말을 못 타잖아요.”

“내게 말하지 그랬나.”

“일 때문에 바쁘셨잖아요. 이제 괜찮아요.”

정체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머릿속에서 ‘아스레인’이 완전히 지워질지도 모른다.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음으로 돌아간다. 백작의 시답잖은 심부름을 하고, 서점에서 마물 서적을 사던 그때로.

“안색이 좋지 않으니 쉬는 게 좋겠네.”

“…그럴게요.”

가끔 기시감이 느껴져도 그러려니 넘어가겠지. 마법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또 정신적 충격 때문이라고 말하는 의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이따금씩 느껴지는 텅 빈 기억의 환영을 좇을 것이다.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할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숨이 막혀 왔다.

“자.”

흐릿한 시야로 고운 손이 불쑥 들어왔다.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으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내 기억을 지키려거든 아스레인에게 들켜선 안 된다. 내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단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태오?”

“아, 죄송해요. 제 손에 흙이 묻었거든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스스로 철문을 짚고 일어섰다. 갈 곳 잃은 손을 애써 무시하며 별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이게 옳은 선택이긴 한가? 영겁의 세월 동안 홀로 쓸쓸했을 아스레인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거든 내 기억이 사라질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와 관련된 기억을 단 한 개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진실한 아스레인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윽….”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려 결국 발을 잘못 내디뎠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단단한 팔이 재빨리 허리를 붙잡았다. 옷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열이 있군.”

“피곤하면 종종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그의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얼마 걷지 못해 다시 아스레인에게 붙잡혔다.

“방까지 데려다주겠네.”

“혼자 갈 수 있어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가.”

“…….”

무섭다.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은 온기가, 낮은 목소리와 속삭이듯 부르는 이름까지도 전부 낯설어질까 봐 두렵다. 아스레인과 관련된 거라면 사소한 버릇까지도 잊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껏 버텨 왔을 그의 인생에 대해 알고 싶다.

“태오. 말하지 않으면 모르….”

복잡한 심경이 터져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붉게 상기된 눈가를 마주친 아스레인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쓴웃음을 지으니 살짝 찌푸려진 그의 미간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저… 방으로 데려다 주실래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당장은 아무에게도 내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품에 머리를 묻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창포 향기가 울렁이는 가슴을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옷을 더럽혀서….”

“얼마든지 괜찮네.”

문득 며칠 전 아스레인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체를 먼저 밝히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심각한 심정도 모르고 낯 뜨거운 고백이라 설레발쳤던 게 우스웠다.

왜 갑자기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했을까? 그보다 정체를 밝히고 나서 곤란한 상황이 찾아오면,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또 기억을 지우려고 했을까.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도 내가 알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녕 내가 몰라야 한다면, 그래야 아스레인이 편히 지낼 수 있다면.

내 기억은. 내 기억쯤은….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준 아스레인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대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아스레인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런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그게….”

“물론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네.”

잔뜩 움츠러든 어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그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고개를 푹 숙이자 아스레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쉬는 게 좋겠군.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게.”

필요하면? 단 한순간도 필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외로울 때마다 곁에 다가왔고, 위험할 때는 어디선가 나타나 구해 줬다. 현대에서부터 그는 나의 동경이었으며, 버팀목이었고,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나는 아스레인에게 어떤 존재일까. 부디 그가 나에게 기댔으면 좋겠다고 말해 놓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다. 진정 아스레인을 위한다면 반드시 이 비밀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교수님.”

어깨에서 떨어지는 그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곧바로 시선이 느껴졌으나, 마주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제가 창을 빼내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을 때, 닉스 님이 그러더라고요. …교수님은 여기에 안 오실 거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 교수님의 몸보다 제가 소중하거든, 찾아오실 거라고요.”

두서없이 이야기가 퍽 우스워서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실은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분명 신력이 교수님 몸에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 안 오시길 바랐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끝내 오셨죠. 짙은 신력으로 가득 찬 곳인데도….”

자꾸만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그 틈새로 저를 향해 뻗은 손을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웃기죠? 오지 말라고 속으로 빌어 놓고, 막상 저를 구하러 온 교수님을 보고 철없이 기뻤다는 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자 잔뜩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항상 웃게 해 주고 싶었는데, 매번 나로 인해 그를 힘들게 하고 만다.

“교수님은 늘 저를 지켜 주셨죠.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면서 제게 거짓말하셨지만….”

“태오.”

“전부 이해해요. 그게 최선이었다는 거.”

그날도 그랬다. 기억을 지우면서 아스레인은 나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기억이 지워진 나보다 모든 기억을 안고 홀로 살아갈 그가 훨씬 괴로울 테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스레인이 평생 짊어 온 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 주는 것뿐이다.

“저를 소중하게 여기셔서 그런 거죠?”

“…….”

“그래서 제 기억까지 지운 거잖아요.”

“…그걸…어떻게….”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빠르게 흔들렸다.

“죄송해요. 전부 알아 버렸어요.”

아스레인에 대한 기억이든, 평범한 일상이든… 반드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운명이라면, 이번엔 내 의지로 선택하고 싶다. 후회하지 않게 힘껏 부딪치자. 그가 자신의 비밀을 감추려 세운 벽을 부수고 진실로 향할 때까지.

그리고 끝내 아스레인이 내 기억을 지우려거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교수님이… ‘그 마물’이라는 거.”

그게 나의 외로운 불멸자를 위한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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