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타르타로스에서 들려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신전이 다시 세워졌다고요?”
“예. 잔해를 그대로 남겨 두면 또 언제 사고가 생길지 모른다더군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리고 동굴 안에서 신력을 잃은 성물을 고해소에 보관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스레인에게서 서신을 받은 태자 칼리온의 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타르타로스의 입구를 개방하는 대신 인근에 관리자를 두겠다고 전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마물과 생계를 위해 산을 넘나드는 마을 사람들 간에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타르타로스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 위를 차지한 신전이 문제였다.
“만약 신도들의 기도로 성물에 다시 신력이 깃들면 어쩌죠?”
“저도 그 점이 우려됩니다만…. 일단은 캄페 산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로 운영될 예정인가 봅니다.”
“신전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신전은 성물의 유무로 판단된다. 허름한 오두막이어도 그 안에 성물이 있다면 신전이고, 외관이 아무리 호화스러워도 성물이 없다면 단순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캄페 산 중턱에 재건된 곳은 이름뿐인 신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다가 옆에 있는 진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때요?”
“하나둘씩 기력을 되찾고 있어요. 오전에 잠깐 마을에 갔는데, 아저씨께서 산책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정말요?! 아예 괜찮아지신 거예요?”
“하하, 그건 아직이요.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다행이다.”
신력에 노출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회복이 빠른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이자 테이블 위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주르륵 흘렀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저도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래요.”
“어, 벌써요?”
진은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이며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쓸어 주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아이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 쳤다.
“그게 제일 반가운 소식이네.”
“역시 아이리스 눈에는 이상해요?”
“누가 이상하대? 그냥… 적응이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시무룩한 얼굴로 흘겨보니 아이리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솔직한 반응을 보일 때는 언제고, 이제와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 초조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리스를 마냥 구경하던 진이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아무튼 이번 사건을 전하께 어떤 식으로 보고하실지 모르겠네요. 듣자하니 조사대 지원 때문에 대강 상황만 알리신 것 같더라고요.”
“늘 그렇듯 교수님께서 잘 해 주실 겁니다.”
차분한 세잔의 반응에 애써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왜 그래요? 태오.”
“아뇨. 그냥….”
이번 사건만큼은 아스레인이 아니라 내가 태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만약 조사대장과 말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속에 독사를 품고 있는 칼리온을 마주한단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시작이다 싶어서요.”
“시작이라뇨?”
산사태의 잔해와 함께 동굴에 갇힌 시신과 성물은 회수되었다. 찾아 주는 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한 닉스도 마침내 창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단락지어도 되는 걸까.
“…저희가 할 일은 끝났지만,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잖아요.”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푸른 옷자락을 휘날리며 들어온 사제는 목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타르타로스를 빠져나갔다. 그 사제는 무슨 연유로 잘린 뿔의 행방을 찾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레톤 신의 성물을 손에 넣은 걸까. 수백 년간 묻혀 있던 사건답게 의문만 가득 남았다.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네요. …찾을 수 있긴 할까요?”
“뭘요?”
“닉스의 어깨에 창을 꽂은 사제요. 레톤 신전 측에서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짐작도 안 가요. 웬 놈이 성물을 훔쳐 사제인 척했다고 거짓말해 버리면, 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거니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에 저절로 기운이 빠졌다. 진과 나란히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는데, 아이리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애초에 찾는 시늉만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생각해 봐. 아무리 인간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상대는 마물이야. 제아무리 공정한 황제도 같은 인간의 편을 들려고 하겠지.”
“에브게니아 황실은 대대로 마물 보호에 힘썼어요. 사제라 하더라도 마물을 해쳤다면 중형을 피할 수 없을 거고요.”
“물론 ‘성물로 마물을 공격했다’는 사건만 두고 보면 그렇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닉스를 타르타로스에 묻어 둔 게 누구더라.”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따금씩 아이리스가 지독한 현실을 코앞에 갖다 댈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싶어진다.
“…선황…이죠.”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아이리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앞에서는 공존이니 뭐니 떠들어 대면서 뒤로는 마물을 무자비하게 동굴에 가둬 버렸어. 그런데 이 사건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면, 결국 선대 황제를 욕보이는 꼴이야. 웬만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겠어?”
닉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이 사건을 기록하지 말고 그대로 묻는 게 좋지 않겠냐고. 자존심 강한 황실이 과오를 쉽게 인정할 리 없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성물로 참혹한 짓을 저지른 범인만큼은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마 그대로 묻힐 거야. 아니면, 클라우스 때처럼 꼬리가 잘리든가.”
하지만 아이리스는 단호하게 희망을 끊어냈다.
“그 대단하신 황제께서 진심으로 마물을 아껴서 보호한다고 했겠어? 그냥 ‘우리는 멍청한 시오 황조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
“결국 인간들이 짜고 치는 판에서 마물은 도구에 불과해.”
비록 도구라 하더라도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공존을 설파하는 것보다 이용 가치로 설득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니까. 그러나 그리한다면 마물의 대우가 나아져도 씁쓸한 기분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잔인한 말만 해서 미안한데….”
“아니에요. 아이리스 말이 맞아요.”
두 손을 꽉 맞잡으니 손끝이 창백한 안색처럼 하얗게 질려 갔다.
아스레인이 처음 마물 연구를 시작한 이유도 마물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마침내 가치를 입증받은 마물만이 인간에게 보호받는다. 수호신이라 여겨지는 히페리온은 치료를 받고, 인간을 위협한다고 판단된 닉스는 지하에 갇히듯 급을 나눈다. 그들만의 잣대로.
끝없이 침울해지던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아직 단념하긴 이릅니다.”
번뜩 시선을 들어 올리니 세잔이 안심시키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물을 위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균형을 지켜 주실 겁니다.”
그 마물을 언급하자마자 아이리스가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너무 오랫동안 죽어 있지 않았나요?”
“아이리스. 말조심하십시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설령 살아있다 하더라도 의무를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건데.”
무어라 말을 얹으려던 세잔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현실에 체념한 아이리스의 미소가 너무도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리스는 지도 위에 놓인 체스 기물을 손끝으로 넘어뜨리며 말했다.
“이미 힘의 균형은 무너졌어.”
툭, 데구루루. 하염없이 굴러가던 킹이 책 앞에 걸려 멈췄다.
“…이 제국이 세워진 그때부터.”
힘없이 고꾸라진 킹이 왠지 그 마물처럼 보였다.
그가 이 넓은 대륙을 지키던 시절은 어땠을까. 마물들은 진정 행복했을까.
만물을 아끼는 그 마물이라면 왠지 인간마저도 기꺼이 품어 줬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정복 전쟁으로 피바람이 불던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가 간절했다.
그러니 미련하게도 끝까지 믿을 것이다.
‘그 마물’은 우리 곁에 살아있다고. 그리고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노라고.
***
신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마석을 운용하기란 생각보다 쉬웠다. 아마 칼리온이 준 마석이 최상품급인 덕을 똑똑히 본 것 같다. 허공에 떠올라 차가운 빛을 발하던 마석은 단숨에 주변의 형상을 빨아들이고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마석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자 거대한 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동굴을 가득 채운 닉스의 본모습은 언제 봐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 어때~? 잘 나왔어?
“감사해요. 닉스 님이 허락해 주신 덕분에 기록할 수 있었어요.”
-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이윽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지더니 인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밤의 장막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바닥을 뒤덮었다. 신력으로 인해 흔적이 남아 어쩌나 싶었는데, 매끈한 진회색 피부와 어우러져 거미줄 모양 흉터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는 닉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제 뭘 하실 건가요? 닉스 님.”
- 글쎄~ 갑자기 자유로워지니 느낌이 이상해.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닉스는 뜬금없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곤 싱긋 웃었다.
- 안 그래도 심심한데, 널 따라다닐까?
“저를…요?”
- 후후, 놀라는 것 좀 봐.
그의 뾰족한 손톱이 내 콧잔등을 살짝 건드렸다.
- 일단 느긋하게 회복하면서 생각해 보려고. 시간은 많으니까.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닉스를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미식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밤이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던 닉스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 그 전에 네게서 빼앗아간 걸 돌려줘야겠지.
이내 닉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나타났다. 처음 닉스를 만난 날에 내 머리에서 빠져나온 ‘기억’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빛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대뜸 말했다.
“전에 하신 말씀 있잖아요.”
- 응?
“제 기억에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 아, 그래.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동전을 가지고 놀듯 빛을 어루만지던 닉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늘게 뜬 눈매 사이로 보이는 붉은 홍채가 서서히 불길한 빛을 띠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닉스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알고 있었니? 네 기억이 끊겨 있다는 거.
언제 거기까지 본 거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불그스름한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 알고 있었구나.
“아, 그건… 제가 정신적 충격을 입어서 잊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 누가?
“의원이요.”
클라우스 저택 지하에서 마주한 잔혹한 광경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충격에 따른 기억상실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면 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진지하게 설명했지만, 돌아온 건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 풉, 정신적 충격이라…. 그거 괜찮은 구실이네.
“네? 구실이라뇨?”
삽시간에 표정을 굳히자 닉스는 양팔을 뻗어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 가여운 헤메라.
등을 다독이는 손길과 애처로운 목소리는 의심할 여지없는 동정이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길이 없어 안긴 채로 눈만 굴렸다. 천천히 나를 놓아준 닉스는 안쓰럽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 그 기억은 마법으로 지워진 거야.
“마법…이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입이 툭 벌어졌다. 기억을 잃은 부분이 저택을 빠져나온 후부터라 뭔가 이상하긴 여기긴 했다. 하지만 마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마법을 써 가면서까지 내 기억을 지울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닉스는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 원래는 되돌릴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내가 누구야? 위대한 닉스 님이지. 고생 끝에 무사히 복원했어. 감사의 눈물을 흘려도 좋아. 응.
“대체 누가… 제게 마법을 건거죠?”
가느다란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 애써 부정하는 거니?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니?
일순 단 하나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자 닉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 기억을 엿볼 순 있어도 건드리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야.
“…….”
- 그런데 이걸 숨 쉬듯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네 주변에 달리 누가 있겠니.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몇 번이고 부정했으나, 끝내 머릿속에 들어찬 사람은 그뿐이었다. 의심이 점차 확신이 되어 가는 과정은 마치 가슴에 쐐기가 박히는 듯했다. 닉스는 우두커니 선 채로 굳어 버린 내 주변을 느긋하게 맴돌며 물었다.
-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보자. 줄곧 그의 곁에 있으면서 정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어?
“그건….”
그야 아스레인이니까. 나를 구렁텅이에서 구해 준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의심을 품는 것조차 죄책감이 느껴져서 피했다. 아스레인이 내게 어떤 거짓말을 해도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역시 우리 똑똑한 헤메라가 의심조차 못했을 리가 없지.
왜? 어째서 내 기억을 지웠을까.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려서?
- 그가 의심의 싹을 아예 잘라 버렸구나.
…나를 믿지 못해서?
- 진짜 웃겨. 정신을 건드리라는 말에 그렇게 화를 내놓고, 이미 손을 써 놨네?
저건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모르는 일투성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한 귀로 들어와 그대로 흘러나갔다. 완전히 넋이 나간 나를 가만 바라보던 닉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말이야. 기억을 원래 주인에게로 돌려주는 것뿐이니 괜찮겠지? 암, 그렇고말고.
이윽고 닉스는 환하게 빛나는 구체를 내 이마에 갖다 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는 걸… 그 고지식한 노인네도 알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