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 (122/305)

#122

산자락에 붙어 있는 아담한 자작나무 집. 그곳이 유족이 사는 곳이었다. 미리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여인에게 펜던트를 보여 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옷자락 안에서 목걸이를 꺼낸 여인은 반달 모양으로 쪼개진 두 개의 펜던트를 하나로 합쳤다. 달칵- 맑은 소리와 함께 화려한 목련 그림이 완성되었다.

“예전에 할머니께서 물려주셨는데, 설마 반대쪽이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수척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뒤이어 시신은 조사대에서 모셔다 줄 거란 소식을 전하자 여인은 진심을 다해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있다고 들었네만.”

“아, 그이는 지금 몸살이 나서 누워 있어요. 의원을 부를 형편은 안 돼서….”

애써 괜찮은 척해도 치맛자락을 쥐는 손이 잘게 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상태를 보여 주겠나.”

“…네?”

“간단한 진찰이라면 가능하네.”

“가, 감사합니다…!”

여인은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했다. 아스레인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비좁아 보이는 집이었다. 괜히 진찰에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는 마당에 있을게요.”

그들이 집으로 들어간 후,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틈에 사라진 닉스를 찾으려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때 헌 천으로 만들어진 공이 울타리 바깥을 향해 데구루루 굴러갔다. 서둘러 발로 공을 막자 벽 뒤에 있던 소녀가 냉큼 달려왔다.

“네 거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소녀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숙여 공을 줍고 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

“감사…합니다.”

공을 건네받은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의아하게 시선을 내리니 허리를 숙이면서 로브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 머리카락을 로브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이건….”

“천사님!”

“…어?”

“천사님 맞죠?!”

“하하…. 말은 고맙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은 아니야.”

멋쩍게 웃으니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마물이에요?”

“…뭐?”

“엄마가 그랬어요. 평범하지 않다면, 그건 사람을 홀리는 마물이니 조심하라고요.”

나도 이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어머니께 저런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뺨을 긁적이다가 넌지시 물었다.

“마물을 무서워해?”

“으음, 네.”

“왜 무서울까?”

“그냥… 다들 위험하다고 하니까요.”

험한 산지 마을이니 아이에게 ‘마물은 위험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어른의 심정도 십분 이해됐다. 그래도 마물이 마냥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품에 안고 있던 하얀 꽃다발을 소녀에게 살짝 내밀었다.

“이 꽃이 뭔지 알아?”

“네! 재스민 꽃이잖아요.”

“잘 아는구나.”

“할머니가 약초사였거든요!”

해맑게 웃는 소녀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그럼 혹시 꽃은 무서워해?”

“아뇨! 예뻐서 좋아요.”

“무시무시한 독이 있는 꽃이 있는데도?”

“어….”

소녀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혹시 혼내는 줄 알까 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도 틀린 건 아냐. 물론 위험한 마물도 있지. 하지만 그건 독성이 있는 꽃과 같아.”

“협죽도랑 투구꽃처럼요?”

“응. 꽃처럼 마물은 어디에나 있어.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들도 너를 해치지 않아. 게다가 마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좋아하는 것도, 무서워하는 것도 있지.”

“…몰랐어요.”

순수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점차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쩐지 풀죽은 것 같기도 했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미안한 마음에 소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기념으로 이 꽃을 선물로 줄게.”

“와, 정말요?”

“괜찮으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겠니? 봄이 왔다고.”

“좋아요!”

공을 바닥에 내려놓은 소녀는 얼른 꽃다발을 안았다.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한참동안 꽃을 구경하던 아이는 흘러가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천사님은 마물을 좋아해요?”

“응. 좋아해.”

“그럼 인간이랑 마물이랑 싸우면 누구의 편을 들 거예요?”

퍽 어린아이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어 말꼬리가 길어졌다.

“글쎄….”

불현듯 아스레인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날수록 선택에 망설임이 생기고 현실 감각은 무뎌지며, 점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고. 어쩐지 지금이라면 나를 밀어내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소녀가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아끌었다.

“있잖아요. 저는 가족을 지킬 거예요.”

“와, 정말? 멋있네~”

“그리고 나중에 마물 가족이 생긴다면, 그 아이도 지켜 줄래요.”

“마물… 가족?”

“천사님이 그랬잖아요. 꽃이나 마물이나 똑같다고…. 그럼 언젠가 마물과도 가족이 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가족을 지킨다. 그게 인간이든 마물이든 상관없다. 예전부터 고민해서 힘겹게 내린 결심을,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순수함이 가진 힘이 언젠가 세상을 바꿔 놓을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라며 해맑게 웃는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 그리고 엄마한테 비밀인데요. 실은….”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오래 전부터 마물을 만나 보고 싶었어요.”

정말? 입 모양으로 물어보자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메라~]

“아, 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닉스가 노곤한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어디 가셨었어요?”

[잠깐 이 일대 좀… 근데 이 작은 돌멩이는 뭐야?]

“도, 돌멩이라뇨. 이 집 딸인 것 같아요.”

닉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무서웠는지, 소녀는 슬쩍 내 다리 뒤로 숨었다. 그러자 닉스는 예상 외로 바닥에 쪼그려 앉으며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안녕. 돌멩아.]

“…안녕하세요.”

소심하게 인사한 소녀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분도 천사예요?”

속삭임을 들은 닉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네!”

[나는 마물이야.]

“……!!”

[무섭지?]

바닥에 쪼그려 앉은 닉스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진실을 들은 소녀는 오히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아저씨 진짜 마물이에요?”

[응응. 왜?]

“마물들은 원래 다 이렇게 예뻐요?”

뜻밖의 직구에 닉스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아저씨가 특별한 걸지도 모르지.]

“특별해요?”

[네- 특별해요.]

“우와…!”

이내 닉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죽음을 다스리는 밤의 주인이 그리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지 몰랐다. 쫑알쫑알 마물에 대한 궁금증을 묻는 소녀의 뒤로 여인이 나타났다. 인기척을 느낀 소녀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냉큼 여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엄마!”

능숙하게 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희 아이가 귀찮게 했나요?”

“아니에요. 현명한 자제분을 두셨네요.”

“후후, 감사합니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여인은 흙먼지에 뒤덮인 아이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얌전히 손길을 받던 소녀는 엄마에게 자랑하듯 선물 받은 꽃다발을 보여 주었다.

“엄마! 저 천사님이 꽃 주셨어.”

“어머…. 감사하다고 했니?”

“아, 맞다.”

낑낑거리며 여인의 품에서 내려온 소녀는 씩씩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마웠어.”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장난스럽게 까딱이니 소녀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어째 뒷마당에 들어온 후로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기분이다.

“교수님은요?”

“곧 나오실 거예요. 제게 약 제조법을 알려 주시려 메모하고 계세요.”

“아…. 남편 분은 어떠시데요?”

“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면 충분하대요. 그 덕분에 금방 나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여인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졌다. 캄페 산 일대에서 도는 흉흉한 소문과 몸살에 걸린 남편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자 여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여인은 떨리는 숨을 짧게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껏 아무도 저 동굴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다들 그곳에 가지 말라고만 하셨죠. 이유를 물어보면, 치부라도 들킨 듯 하나같이 시선을 피했어요. …그런데 드디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네요.”

한숨 어린 목소리엔 그간의 고생이 깊게 묻어났다. 물기 젖은 눈동자로 펜던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여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존함을 기억하고 싶어요.”

“교수님이요?”

“아뇨. 당신의 이름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당황한 나머지 입술을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도움을 청하려 옆을 바라보았으나, 닉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그때 소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당히 말했다.

“헤메라 라고 했어!”

“어….”

그 이름이 나와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니 옆에서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몰래 웃는 게 들키지 않으려 닉스는 고개까지 돌린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타들어 가는 속을 모르는 소녀가 재차 물었다.

“맞지? 천사님.”

태오라는 이름이 드러날 바엔 그편이 낫겠지.

“응. 헤메라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우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헤메라… 따스한 이름이네요. 보잘 것 없는 핏줄이지만, 가문 대대로 기억해 두겠습니다.”

“예? 아뇨 그렇게까진….”

“정말 감사합니다. 헤메라 님.”

그땐 미처 몰랐다.

단지 편하게 넘어가기 위한 변명이, 이후 어떤 폭풍을 일으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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