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잘린 뿔의 행방을 물었다고? 뜻밖의 정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뭔가 더 알고 있다면 말해 달라고 했으나, 닉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게 전부야.]
그리 말한 닉스는 망설임 없이 난간 아래로 몸을 던졌다. 곧장 바닥을 내려다보니 그는 이미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 후였다. 어두컴컴한 미로에서 마침내 출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다음 미로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잘린 뿔이라….”
레톤의 사제가 어째서 잘린 뿔을 찾는지, 또 뿔을 손에 넣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모르겠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선황 유피테르의 손에 들린 전리품이었다.
넓은 대륙에 뿌리내린 유피테르는 ‘그 마물’의 목을 베고 뿔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마물의 생사여부뿐만 아니라 뿔의 행방마저도 알 수 없다. 단지 건국 신화에 불과한 줄 알았던 이야기가 점차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무수한 가설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기대했건만-
“으음….”
닉스의 전언 때문일까. 꿈은 또 다시 나를 싱크홀 앞으로 데려다놓았다.
“왜 자꾸 이 꿈을 꾸는 거야….”
세 번씩이나 같은 꿈을 꾸니 단순한 우연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아그누스의 도움 없이 싱크홀 안으로 뛰어드니 익숙한 풀숲이 보였다. 나무 사이에 있는 금빛 마물은 전과 달리 몸을 웅크리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보네요.”
날카로운 비늘이 선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오늘은 왠지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분위기다. 살금살금 다가가 세 걸음 남짓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다. 혹여 신경을 건드릴까 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고갯짓이나 눈짓이라도 보냈으면 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정말 내가 만들어 낸 꿈속 환영에 불과한 걸까. 기왕 마주쳤으니 무언가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윤기 흐르는 비늘과 날렵한 골격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자태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둥 끄트머리만 앙상하게 남은 한쪽 뿔이 눈에 띄었다.
“…인간들이 당신의 뿔을 찾고 있어요.”
[…….]
“뿔이 잘려서 줄곧 이곳을 떠나지 못한 건가요?”
[…….]
걱정 자체가 무례일지도 모를 위대한 절대자다. 하지만 그를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왜일까. 어째서… 한 번도 현실에서 마주친 적 없는 그 마물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것일까.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호박석 같은 눈동자에 홀려 천천히 다가갔다.
“만약…잘린 뿔을 되찾으면 당신은 자유로워지나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니 그가 스스로 머리를 숙여 손길을 허락했다. 이윽고 손바닥에 닿은 비늘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마치 현실과도 같은 생생한 감촉에 내심 놀라던 그때, 자연스럽게 꿈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의식이 느릿하게 돌아온 후에야 눈앞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아침이군.”
“어….”
아스레인이 왜 내 침대에 앉아 있는 거지? 심지어 잠결에 팔을 뻗었는지, 내 손이 아스레인의 뺨에 닿아 있었다. 비늘을 어루만졌을 때 느낀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은 다름 아닌 그의 살결이었다. 화들짝 놀라 서둘러 손을 거두니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름다운 모습에 불현듯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태오?”
나를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꿈속의 그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탓에 해선 안 될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마물이….
“괜찮나?”
“헉, 죄송해요. 잠이 덜 깼나 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지. 잠을 떨쳐 내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며 아스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걱정돼서 방으로 들어왔네. 잠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아…! 아니에요. 너무 깊이 잠들었나 봐요.”
슬쩍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모르겠다. 오래 잔 덕분에 몸이 가뿐하긴 하다만,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꾼 꿈 때문에 괜히 기분이 찜찜했다.
“다들 일어났겠네요.”
“음. 그래서 오전 일찍 타르타로스로 향했네. 조사대의 일처리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했던가.”
“…네?! 조사대가 벌써 왔어요?”
“조사대는 새벽부터 도착해서 시신 수습을 끝냈네. 무사히 성물도 회수했지.”
빠른 일처리에 입이 툭 하고 벌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아스레인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시신은 유가족에게로 돌려보내지나요?”
“신원 파악이 끝나면 그리 되겠지. 하지만 워낙 세월이 오래 지났기에 확인이 쉽지 않네.”
“그렇겠죠….”
“그래도 고치 덕분에 유골이 온전한 형태로 남았지.”
“고치라면, …닉스 님이 동굴에 만들어 둔 그거요?”
“음. 정확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단단한 고치가 낙석을 막아 주었네.”
처음 동굴에서 닉스가 만들어 둔 고치를 보았을 때는, 불길한 느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오직 감정과 기억만을 취하는 닉스가 이미 생기를 잃은 시신을 고치로 만들어 둘 필요 따윈 없었다. 그러니 닉스는 일부러 수고로운 일을 자처해 시신을 안치해 둔 것이었다.
역시 닉스에겐 아직 마음이 바뀔 여지가 있다.
“그럼 교수님도 이제 타르타로스로 가시나요?”
“이미 다녀왔네. 그리고 유일하게 신원을 알아낸 시신이 있어 그 후손을 만나러 가야하네.”
“신원을 어떻게 알아냈어요?”
아스레인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목걸이를 꺼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반달 모양 펜던트에는 푸른 안료로 목련이 그려져 있었다.
“시신이 이걸 차고 있더군.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생긴 걸 마을에 있는 한 여인이 갖고 있다고 들었네.”
“유품을 물려받은 걸까요?”
“자세한 건 직접 가 봐야 알겠지.”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스레인을 붙잡았다.
“저도 함께 갈래요.”
“몸은 괜찮은 건가?”
“네! 금방 씻고 나올게요.”
언제까지고 침대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씩씩하게 대답하고 곧장 욕실로 향해 샤워를 마쳤다. 추모하러 가는 길이니 특별히 메이드에게 부탁해 검은 셔츠와 바지를 받았다. 전부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자 여전히 낯설기만 한 내가 보였다.
온통 새까만 옷을 입어서 그런가. 백설로 덮인 머리카락이 유독 빛나는 느낌이다.
“…이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거 없겠지.”
벽에 걸린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단단히 뒤집어썼다. 빈손으로 가기 뭣하니, 화병에 꽂힌 재스민 꽃을 품에 들었다. 발목까지 덮은 로브에 하얀 꽃다발까지 드니 제법 음침한 차림이 되었다. 방 밖으로 나서며 별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닉스 님이 좋아하겠네….”
[응? 나?]
“우왁!!”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얼굴에 놀라 소리를 빼액 질렀다. 벽에 달라붙어 거친 숨을 내쉬자 닉스는 즐겁다는 듯 싱글싱글 웃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무슨 일….”
비명에 놀라 한달음에 달려온 아스레인이 닉스를 보자마자 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살벌한 살의가 날아오는데도 닉스는 여유롭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좋은 아침~ 영감. 아니, 교수님?]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갑자기라니. 나는 항상 태오 곁에 있었는데.]
“…하아….”
나긋나긋한 말투가 오히려 신경을 긁은 모양이다. 아스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게 닉스가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아스레인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닉스는 내게 착 달라붙어 아스레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거, 저거. 봤어? 무섭게 노려보는 것 좀 봐.]
“하하… 닉스 님….”
[널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옹졸하게 굴긴.]
철옹성 같은 아스레인에게 맞붙을 수 있는 존재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닉스가 적수인 것 같다. 가시가 날아다니는 듯 뾰족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 말머리를 돌렸다.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나도 같이 가도 돼?]
“…네? 마을에요?”
[응. 오랜만에 바람이 쐬고 싶어졌거든~]
닉스가 인간들의 마을에 가고 싶어 한다니, 이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다. 혹시 닉스가 마음을 바꿀 만한 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냉큼 좋다고 말하려는데 조소가 섞인 목소리가 사이를 끼어들었다.
“함께 가겠다고?”
넓은 보폭으로 다가온 아스레인이 닉스의 앞에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냉소적인 반응에 닉스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왜? 안 될 거 없잖아.]
“네가 대낮에 돌아다니다니 지나가던 님프도 웃겠군. 햇빛 따위 질색이라고 하지 않았나.”
[망할 교수님은 조용히 하지~? 난 태오한테 물어본 건데.]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도 난감한 처지였다. 초조하게 양쪽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닉스 님만 괜찮으시다면, 저야 오히려 환영이에요.”
[역시 태오야!]
“하지만… 소란을 일으켜서 교수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당연히 알지. 날 뭘로 보는 거야~]
한껏 신난 닉스가 양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순간 몸이 뒤쪽으로 훅 당겨졌다. 어느새 단단한 팔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탓에 허공을 끌어안은 닉스가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장난해?]
제법 살벌한 눈빛이었으나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저치는 알아서 올 테니, 이만 가지.”
내가 알지 못하는 옛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로 이를 가는 것만 봐선 원수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마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보다, 아스레인과 닉스를 가깝게 하는 편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교수님- 꼭 유병장수해. 알았지?]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