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걱정이 무색해진 쪽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다.
“네가 어떻게….”
단죄의 영역에서 창에 깃든 신을 맞닥뜨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결코 저 날카로운 창에 대적할 수 없으리라고. 그때 시스템이 나타나 집행자인 신 앞에서 선고를 앞둔 ‘죄인’을 보냈다. 아무리 일부라 하더라도 신은 신이다. 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죄인을 도망쳐 보냈으니 무사하지 못할 거라 걱정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지금 버젓이 내 앞에 서있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어떻게 무사한 거야? 빠져나올 틈이 있던 거야?”
- 그건 마치 무사하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 소리가 아니잖아! 나를 먼저 보내는 바람에… 네가 그곳에 갇힌 줄로만 알았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자 시스템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 걱정하셨습니까?
“그럼 안 했겠어?!”
능청스럽게 반응을 떠보는 태도가 얄미워 버럭 신경질을 냈다. 나름 사나워 보이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도 느긋한 웃음은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역시 시스템을 진심으로 걱정한 내가 바보였다.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시스템이 작게 키득거리며 말했다.
- 현세의 신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입니다. 진정 순위를 매기자면, 분노한 신보다 그걸 이용하는 인간이 더 위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형의 존재이기에 신의 권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까. 아무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함께한 시스템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는 시스템이니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시스템은 내 주변을 천천히 맴돌며 말했다.
- 그나저나 대단한 모습이시군요.
“…놀리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둬.”
- 나름대로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 했습니다만?
“네가 하면 다 장난인 것 같아.”
입술을 비죽이며 어깨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 한 움큼을 들었다.
“은근히 불편해. 근데 괜히 잘랐다가 더 이상해질 것 같기도 하고….”
마냥 다른 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볼 땐 살랑살랑해서 기분 좋았다. 아스레인이 갑자기 머리를 자른다고 하면 극구 말릴 정도로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짧은 머리가 그리워졌다.
“넌 안 불편해?”
- 저는 실체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흐음….”
문득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보면 어떨까 싶어 화병을 장식한 리본 끈을 풀었다. 붉은 끈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열심히 모으는데, 왠지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낑낑거리다가 제 풀에 지쳐 리본 끈을 침대 위에 툭 던져 버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아, 실례.
“그렇게 웃지만 말고 도와주지 그래.”
-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뒷말을 흐린 시스템이 내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게 닿기도 전에 그의 손끝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그대로 관통하는 손에선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내 앞에 버젓이 서 있는 존재가,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사람이, 결국엔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자꾸만 잊게 된다.
한동안 말없이 제 손을 들여다보고만 있던 시스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항상 여유에 넘치던 그답지 않게 풀죽은 모습이었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뒤늦게 후회가 들어 시스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사라지지나 마.”
퉁명스러운 투로 얼버무리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줄곧 생각만 하던 말을 꺼내니 민망해져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쯤이면 비웃든 맞받아치든 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시스템이 조용했다. 슬쩍 눈만 들어 쳐다보니 얇은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어째 지금까지의 조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 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윽고 시스템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췄다.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동자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바람에 고개를 휙 틀었다. 그러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이대로 한숨 자려는 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 …당신의 모험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시스템의 말은 꼭 모험이 끝나면 사라질 것처럼 들렸다. 아니, 애초에 이 모험에 끝이 있는 건가? 그리고 그 끝을… 시스템은 알고 있는 건가? 궁금증을 못 참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시스….”
하지만 시스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짙은 어둠이 대신하고 있었다.
[안녕. 태오.]
“…닉스 님.”
과연 어디부터 들은 걸까. 안 그래도 시스템을 단지 친구라 얼버무렸기에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자 홍옥같이 빛나는 눈동자가 호기롭게 반뜩였다.
[너, 역시 내게 안 보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그건….”
선뜻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고운 손가락이 내 입술 위에 툭 닿았다.
[말할 수 없는 거지?]
“…죄송해요.”
[걱정 마. 나는 단 둘만의 비밀 같은 거, 아주 좋아하거든~]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으나, 닉스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타르타로스 인근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방에 혼자 있어도 언행을 조심해야겠다.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닉스는 떡하니 옆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며 화제를 돌렸다.
“아직 타르타로스에 계신 건가요?”
[완전히 회복할 때까진 있으려고 해.]
아스레인이 서신을 보냈으니 조사대가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시신과 성물을 회수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오직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사람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내가 물어오는 정보겠지만.
“그럼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은혜를 갚는 대가로 할까?]
“좋아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뭔데?]
“다름이 아니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날카로운 마석을 꺼내었다. 칼리온은 내게 마석을 전하며 기록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신중하게 써 달라고 했다. 비록 그가 원하는 장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택을 온전히 내게 맡긴 이상 기록할 만한 형상은 이것뿐이었다.
“닉스 님의 어깨에 남은 상처를 이 마석에 담아 가고 싶어요. 이 참사를 제국의 높으신 분께서 보셔야만 해요.”
뜻밖의 부탁에 닉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이런 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낫지 않겠어? 왜 너희 선조들이 타르타로스를 수백 년간 파묻어 놨겠어.]
“아뇨. 과오를 덮는다고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반드시 기록을 남겨서 후세에도 잊지 않게 해야 돼요.”
[네가 말한 ‘제국의 높으신 분’이 상당히 싫어할 텐데?]
“이 기록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따라… 제국의 미래가 정해지겠죠.”
이건 시험이자 실험이다. 태자 칼리온이 닉스의 상처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아야만 했다. 만약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무시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편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나갈 제국은 과거 시오 왕조가 빚어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테니까.
속사정을 모르는 닉스로선 여전히 황당한 부탁일 뿐이었다.
[고작 그거면 돼?]
“네.”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는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더 대단한 걸 부탁할 줄 알았는데.]
“그럼….”
[그럼~?]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닉스 님을 도와준 것 같잖아요.”
솔직한 발언에 닉스의 얼굴이 이상하게 찌푸려졌다. 뒤늦게 웃음을 참는 표정임을 알고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조금도 질척거릴 명분을 안 주는구나. 서운하네~]
“서운…해요?”
[뭐,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불쑥 손을 뻗은 닉스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새하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고혹적으로 휘어진 눈매가 붉게 상기되어 자못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닉스는 짓궂은 미소를 흘리며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점점 헤메라다워지는구나. 태오.]
또 그 호칭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헤메라’가 뭐예요?”
[구름 한 점 없이 햇빛만이 가득한 낮이지.]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니 닉스가 노래하듯 시구를 읊조렸다.
[나는 밤이요, 너는 낮이니. 모든 만물이 너의 품에서 안식을 찾고, 마침내 내게로 와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손에 넣지 못한 것을 가진 너는… 나의 이면이니라.]
결국 ‘헤메라’는 밤을 상징하는 닉스의 극단을 뜻했다. 밤과 낮은 밀접하나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마치 마물인 그와 인간인 나처럼.
의미를 알고 나니 헤메라라는 애칭이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느껴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침울한 생각을 읽은 건지, 닉스는 축 처진 내 어깨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네?”
[언제쯤 나를 보러 올 건데?]
“아, 조사대가 와서 성물과 시신 회수가 끝나면 갈게요.”
[그럼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야겠네~]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 건가요?”
[그건 아닌데, 조사하러온 인간들이 또 나를 보고 괴상한 소문을 내면 어째.]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짓고 있어도 그의 눈빛엔 차분히 가라앉은 분노가 느껴졌다. 민감한 질문이겠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속으로 고민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인간이 밉지 않으세요?”
[미워. 전부 없애 버리고 싶을 만큼.]
“…….”
[설마 좋아해 주길 바란 건 아니지?]
직설적인 질문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충분히 이해해요.”
[…이해해?]
“제가 당신이었어도 마땅히 증오했을 테니까요.”
설령 내가 그를 도와줬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인간임은 변하지 않았다. 닉스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인간에게 상처 입은 마물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밀렵꾼에게 가족을 잃은 사이누르도, 더러운 욕심에 이용당한 프라민도, 인간과 마물 사이의 힘 싸움에 떠밀린 오필리아도…. 전부 과오에 희생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닉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존재가 있었다.
“닉스 님을 보면 제 소중한 친구가 떠올라요. 그도 인간 때문에 몸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거든요.”
[그래서 네가 밉대?]
“아뇨. 그런데도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나 참, 대단한 박애주의자 납셨네~]
“물론 그가 저를 아껴 주긴 하지만, 그 이유는 아니었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봄볕 보다 따스한 눈동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기분을. 새하얀 치자 꽃으로 둘러싸인 숲의 수호자는 ‘어째서 인간을 미워하지 않느냐’는 내 어리석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흉터를 얻고 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대요.”
[…뭐?]
인상을 찌푸린 닉스에게 뇌리에 깊게 박힌 히페리온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느끼는 순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숨만 붙어 있다고 불멸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인간이 남긴 흉터는 치밀하게 살아온 생명의 발악이자,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삶의 증거이다.”
히페리온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똑같은 현상을 겪어도 반응은 전혀 달라요. 물론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죠. 모든 감정은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그러니 저는 닉스 님이 인간을 미워해도… 감히 말은 얹을 권리는 없어요.”
인간에게 해를 입은 마물은 반드시 모든 인간을 싫어하리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사이누르도, 히페리온도, 프라민도 끝내 나를 받아 주었다. 종족을 넘어서 한 개체로서 나를 바라봐 주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아픈 과거를 품에 끌어안았다. 침울하게 일그러져 있던 그들의 얼굴에 마침내 환한 웃음이 번질 때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다. 그러니 바보 같은 이상임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그 증오가 당신을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바뀔 여지가 있다면, 그땐 제게 기회를 주시겠어요?”
[…무슨 기회?]
마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밤과 낮이 함께할 수 있다는 기적을.
“당신을 설득할 기회요.”
말이 이어지는 내내 닉스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덕에 긍정적인 변화를 바랐으나, 오랜 침묵 끝에 튀어나온 말엔 매서운 날이 서 있었다.
[아주 오만한 생각이야.]
“그건….”
[내가 네게 설득될 거란 자신감도, 네게 먼저 손을 내밀 거란 생각도. 전부 오만하고 방자해.]
역효과였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식은땀이 밴 손을 꽉 맞잡았다. 막 사과하려던 그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일순 유해졌다.
[하지만 네가 나를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궁금해졌어.]
“……!!”
긍정적인 반응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닉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답했다.
[이 세상에 밤이 오지 않는 날은 없으나, 해가 지는 걸 늦출 수는 있지.]
“…닉스 님.”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손이 뺨에 닿았다. 그대로 턱선을 따라 내려간 손길은 내 목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예리한 손톱 끝에 자칫 살갗이 베일 뻔했으나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내게 닿은 시선이 평소의 닉스와 달리 인자했기 때문이었다.
[태오.]
숨이 닿을 듯 가깝게 다가온 닉스는 유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빛을 잃어 스스로 밤의 품에 안기는 날까지, …매 순간을 지켜봐 주마.]
이윽고 머릿속에서 익숙한 알림이 울렸다. 마침내 닉스와의 관계가 ‘수호’에 이른 순간이었다.
감격스러운 나머지 내 목을 감싼 손을 맞잡으며 환한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요.”
[아직 고맙다고 하긴 이르지. 내가 변덕스러운 걸 잊었어?]
“하지만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잖아요.”
씨익-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으니 닉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닉스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곤 머리카락 위에 뺨을 마구 비비며 기분 좋은 탄성을 흘렸다.
[아아- 정말 귀엽다니까. 이러니 가만 못 놔두지.]
한참동안 아낌없이 퍼부어 주는 애정을 얌전히 받고만 있었다. 슬슬 숨이 막힐 쯤, 닉스가 아! 하며 품에서 놔주었다.
[참, 약속한 게 있었지.]
“제 기억과 신관이 한 말이었죠.”
[에이~ 잊은 줄 알았는데.]
짙은 애정 공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닉스는 가벼운 투로 말했다.
[실은 그때 빼낸 네 기억은 조금 확인할 게 있어서 아직 못 돌려줘.]
“확인할 거라뇨?”
[비-밀.]
“…네?”
[하지만 이 어깨에 성물을 던진 인간이 뭘 물었는지는 알려줄게.]
닉스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능구렁이처럼 추궁을 빠져나갔다. 그 후 도망치려는 듯 자리를 뜨기에 곧바로 그를 따라 일어났다. 하늘하늘한 걸음걸이로 창가로 다가간 닉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 난간에 올라섰다.
[그 신관은 푸른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와 물었지.]
마치 당시를 재연하듯 두 팔을 벌린 닉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린 뿔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