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 (119/305)

#119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돼서 나 자신을 살필 경황이 없었다. 다들 걱정과 달리 무사했고, 무엇보다 아스레인의 팔이 회복됐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그런데 설마 내게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이런….”

닉스가 말한 ‘부작용’이란 게 이거였나. 등허리를 간질이는 감촉을 단지 옷자락이라고 생각해 아무렇지 않게 넘긴 게 문제였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조심스레 어깨 앞으로 쓸어내렸다. 깨끗한 셔츠만큼이나 하얀 머리칼을 보니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창문에 달라붙을 듯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신력의 영향으로 색이 변한 건 머리카락과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 한 가닥까지 빠짐없이 새하얗게 변했다.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었다. 특징적인 색이 바뀐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질 줄은 몰랐다. 혈색 없는 피부나 눈 아래 드리운 다크 서클이 도드라져 전보다 병약해 보였다.

만약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냐. 돌아온다고 했잖아. …닉스가 그랬으니까….”

초조하게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창가를 이리저리 맴돌았다. 아직 꿈인가 싶다가도, 몸을 반 바퀴 돌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현실감을 일깨웠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혼자 끙끙 앓다가 대뜸 고개를 들었다.

“저기….”

눈이 마주친 그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내 모습이 어색한 모양이다. 아니, 당연히 어색하겠지. 나조차도 다른 사람 몸을 빌린 것 같으니까. 어떻게 그들과 나 사이의 기묘한 거리감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 며칠 만에 깨어난 거예요?”

어려운 질문이었나. 아이리스는 여전히 혼이 빠져 있었고, 세잔마저 아무 말 없이 눈만 끔뻑였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진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이요.”

신의 저주라 하여 최소한 일주일은 걸리리라고 지레 겁먹었는데, 사흘이면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다. 몸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다. …완전히 달라진 겉모습만 빼면.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치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양손을 꽉 모아 쥐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이라 미안해요. …많이 이상하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쳐다보니 아이리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기운이 주욱 빠졌다. 그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세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혀 아닙니다.”

성큼성큼 다가온 세잔을 올려다보자 따뜻한 남해 같은 눈동자가 스르르 휘어졌다.

“…세잔.”

아, 평소의 세잔이다. 한시름 놓으며 마주 웃으니 세잔이 가슴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검을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에 비해 하염없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주 잘 어울려요. 형.”

“정말요?”

“네. 달리 아픈 곳은 없습니까?”

“그럼요. 조금 피곤하긴 한데, 이 정도면 평소랑 똑같아요.”

세잔과 대화하는 사이 곁에 다가온 진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요. 태오. 순간 저도 모르게 굳었어요.”

“아니에요. 저도 제가 어색한걸요.”

“…근데 확실히 느낌이 달라지긴 했어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진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좀 다가가기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으음, 성스럽다고 해야 하나~”

“네에?!”

“하하,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한눈에 딱! 들어오는 느낌이.”

성스럽다니… 신력의 잔재 때문인가? 진이 흥미롭게 내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와중에도 유독 조용한 사람이 있었다. 세잔의 어깨 너머 아이리스는 여전히 어색해 보였다. 지그시 쳐다보았으나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꽤나 불편해 보였다.

그래. 아이리스는 빈말은 못하는 사람이었지. 씁쓸한 미소를 짓자 눈치 빠른 진이 냉큼 말을 얹었다.

“아마 아이리스도 똑같이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하하, 글쎄요….”

“알잖아요. 원래 쑥스러움이 많은 거.”

장난스럽게 웃은 진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이리스를 억지로 끌고 왔다. 꼼짝없이 팔을 붙잡힌 아이리스는 질색하며 진을 밀어냈다.

“아, 왜 이래.”

“가까이서 봐. 솔직히 예쁘잖아.”

“미, 미쳤어? 사내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에이~ 아예 넋 놓고 봤으면서 이제 와서 아닌 척은.”

“야!!”

아이리스가 아무리 인상을 쓰고 노려봐도 진은 끄떡도 안 했다. 저러다 진짜 싸우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한편, 평소대로 기운찬 모습을 보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옆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세잔이 대뜸 물었다.

“계속 이 상태로 있는 겁니까?”

“아뇨. 주기적으로 신력을 빼낸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신력에 잠식되지 않고 동화되면 이리되는군요.”

“그런가 봐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애초에 신의 저주를 받고도 살아남은 전례는 없었다. 전무후무한 경험을 했으니 이걸 저주라 해야 할지, 축복이라 일컬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에 잠겨 뒷말을 흐리자 아이리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누가 그랬는데?”

“그….”

방금 전까지 닉스가 서 있던 자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닉스 님이요.”

“뭐? 여기 있어?”

“방금까지는 계셨는데, 지금은 사라지셨어요.”

고개를 천천히 저으니 아이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쯧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만나면 할 말 많았는데.”

“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뭐, …동굴에서 고생 좀 했지.”

난데없이 과거 회상에 빠진 아이리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닉스’란 말에 사색이 된 건 그뿐이 아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던 진은 미소를 잃었고, 나를 안심시켜 주던 세잔마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같이 닉스에 대해 안 좋은 반응을 보이니 점차 불안해졌다.

“대체 닉스 님이 여러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희망 고문… 같은 거.”

“그게 무슨….”

“아무튼 네가 무사히 깨어났으니까 됐어.”

자세한 사정을 묻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깔끔하게 말을 잘라 냈다.

“그리고 미안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정작 못 도와줘서.”

“아뇨. 그건 아이리스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애초에 그들이 타르타로스에서 헤매게 된 이유는 내가 닉스에게 미리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아이리스는 나를 혼자 보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선뜻 사실을 말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아이리스는 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씨, 이런 분위기 만들려는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피곤할 테니까 편히 쉬어라.”

“…아이리스.”

“내일 얘기하자. 내일.”

허공에 손을 휘적거린 아이리스는 무거운 걸음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세잔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형.”

“고마워요. 세잔. …잘 자요.”

세잔까지 떠나간 방은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진은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실없이 웃었다.

“지금 상황에 이런 말하면 뭣하지만요.”

“네?”

“태오가 없으면 정말 안 되나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의아하게 되물으니 진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실은 태오가 잠든 내내 저택이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했거든요. 아이리스랑 세잔은 서로 예민해져서 말다툼이 꽤 많이 오고 갔어요. 게다가 교수님은 필요한 사항을 전달할 때 외에는 아예 홀에 얼굴도 안 비치셨고요.”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근데 태오가 오니까 저 둘 사이의 공기부터 달라졌어요. 나참, 제가 아무리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해도 안 됐거든요~”

진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그래도 결국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나였으니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요. 진.”

“엥? 아뇨.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사뭇 당황한 진은 두 손을 세차게 휘저었다. 그럼에도 내가 고개를 들지 않으니 어깨를 턱 붙잡았다.

“그만큼 태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단 얘기였어요.”

“…진.”

“아무튼!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진은 팔을 벌려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서 와요. 태오.”

품에 한가득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저절로 긴장이 풀렸다. 존재만으로도 내게 위로가 되어 주는 고마운 그들에게 나도 보답을 해야만 했다.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다녀왔어요.”

조심스레 손을 올려 마주 끌어안으니 귓가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흔쾌히 나를 놓아준 진은 방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 교수님은 방에서 일하고 계세요. 타르타로스에 있는 성물과 시신을 회수하려면 조사대원 입회하에 처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아마 지금쯤은 서신을 다 보내셨을걸요?”

“네?”

“왠지 태오라면 바로 교수님을 찾을 것 같았거든요. 아니에요?”

“아….”

너무 쉽게 간파당했다. 제대로 정곡이 찔려 입을 꾹 다물자 진이 활짝 웃었다.

“아니에요~?”

“…얼른 자요. 진.”

“아하하, 알겠어요. 태오도 잘 자요.”

자꾸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는 진을 보내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낯선 모습이 유리에 비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아니, 익숙해지긴 하려나.

“…하아….”

무엇보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이 모습으로 아스레인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아스레인을 보고 싶다.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켜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단 어떤 잔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만나고 봐야겠다.

오늘따라 아스레인의 방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지척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마침내 문 앞에 도착했다.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노크를 하니,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후우- 길게 심호흡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진의 말과 달리 아직 일거리가 남은 그의 책상은 서류로 빼곡했다. 심지어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지, 아스레인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닫으며 일하기 바쁜 그를 불렀다.

“…교수님.”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해 있는데, 아스레인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장난치지 말게.”

“예?”

“받아 줄 시간 따위 없으니.”

“그럼… 이따가 다시 올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깃펜이 우뚝 멈췄다. 이윽고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무서운 기세로 내게 날아왔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훑어본 아스레인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눈빛에 날이 서 있어 나도 모르게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오뉴월 서리 녹듯 사르르 풀렸다.

“…태오.”

깃펜을 던지듯 내려놓은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섬세하게 내 얼굴을 살펴보는 눈길은 방금 전의 살벌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언제 깨어난 거지? 분명 예정일은 오늘이 아니었는데.”

“교수님.”

“몸 상태는? 기억은, 전부 멀쩡한가?”

“일단….”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된 건가. 이것도 닉스의 장난인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결국 항복하듯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다급히 말을 잘랐다.

“저, 진정하세요…! 저는 멀쩡해요.”

또다시 무언가를 말하려 벌어졌던 입술이 꾹 닫혔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그간의 마음고생이 절절히 느껴졌다. 내가 말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는 아스레인에게 하나씩 차분하게 대답했다.

“깨어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기억도, 몸도 전부 멀쩡해요. 단지 이렇게 된 건 몸에 남은 신력 때문이래요. 아, 닉스 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아직 할 얘기가 남았는데, 뒷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숙인 아스레인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기 때문이었다. 어깨 위로 닿는 무게감에 뻣뻣하게 목을 세운 채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코끝에 물씬 풍기는 창포 향기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그것도 모자라 아스레인은 내 어깻죽지에 이마를 살짝 비볐다.

“다행이군. 정말….”

쿵, 쿵. 소란스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아스레인에게 들리진 않을까. 이미 정신은 구멍 난 풍선처럼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꼭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그의 등을 톡톡 도닥였다.

“저…야말로 다행이에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걸 느낀 걸까. 내게 기대어 있던 아스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나 했더니, 이번엔 얼굴 위로 내려앉는 다정한 눈빛에 숨이 막힐 듯했다.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그의 팔에 닿았다.

“혹시 팔이 아프거나 하진 않으세요?”

문득 팔이 창에 뜯겨 나가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잉크 냄새가 묻어나는 손길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끌어내렸다.

“아무 문제없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열병이 일어난 것처럼 뜨거워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어깨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스르르 내려와 새빨개진 뺨을 가렸다.

“태오. 머리카락은….”

“그, 어, 이상해요?”

“아니. 충분히 잘 어울린다만.”

지금만큼은 머리가 길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잠시-

“…얼굴이 잘 안 보여서 마음에 안 드는군.”

작게 혀를 찬 아스레인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귓가에 슬쩍 스치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허공에 우뚝 남은 그의 손길이 제법 무안해 보였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뜨거워진 목덜미를 손등으로 식히며 말을 돌렸다.

“이, 일은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닐까 걱정돼서요.”

“거의 다 끝나가니 신경 쓰지 말게.”

이게 아닌데. 금세 끝나 버린 화젯거리에 마음만 초조해졌다. 바짝 타버린 속도 모르고, 아스레인은 불쑥 다가왔다.

“그보다 괜찮은가?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무자각으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가 놓는 게 범죄라면, 아스레인은 이미 유죄다. 이쯤 되니 내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방금 막 일어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다시 쉬러 가지.”

“네? 아니, 저 교수님을 도우러 왔는데요.”

“…나를 도우려거든 일단 쉬게.”

다른 변명이 나오기도 전에 아스레인은 내 어깨를 감싸고 걸음을 옮겼다.

신경이 온통 아스레인에게 쏠려 있어서 그런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방에 도착해 있었다. 아스레인은 친절히 문을 열어 침대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침대에 걸터앉은 후에야 아스레인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줄로 알았건만, 짧은 고민 끝에 아스레인이 말했다.

“태오.”

“네?”

“혹시 닉스에게서 따로 들은 건 없나?”

“아뇨. 딱히 없어요. …왜요?”

전혀 짐작 가는 게 없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그답지 않게 한참 동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네가 괜찮아진다면,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네. …들어주겠나?”

아스레인이 이토록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내 반응을 살피는 눈빛에 덩달아 긴장해 버렸다.

“…기꺼이 기다릴게요.”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이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대로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낌새만 봐서는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설마….

“고… 고… 고….”

고로 시작하는 그 단어가 열심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잘 익은 석류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행복한 망상에 한창 빠져 있는데, 바로 옆에서 산통을 깨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뭘 기대하는진 알겠지만, 아마도 그건 아닐 겁니다.

이 정중하면서도 재수 없는 말투를 쓰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한 명뿐이었다.

“시스템!”

고개를 번쩍 들자 오늘도 어김없이 미소로 무장한 은발의 사내가 나를 반겼다.

- 걱정이 무색하게 기운차군요. 태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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