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는 광채는 어느덧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닉스의 어깨에 꽂힌 창은 그 자리에 뿌리 내린 겨우살이처럼 그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영양분을 빼앗긴 대지는 가뭄으로 갈라져 껍질 속을 훤히 드러냈다.
저 성스러운 마수를 내 손으로 없애야 한다.
[괜찮겠어?]
“…네. 부탁드려요.”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가 거미줄로 계단을 만들어 주었다. 찬란한 빛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마치 세례를 받듯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신성한 계단은 곧 가시밭길이 되었다. 한 계단씩 올라갈수록 신력이 점차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목을 조이고, 발을 잡아당기며,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창이 손에 닿는 거리까지 다다르자 사지에 힘이 주욱 빠졌다.
“하아, 하아….”
그저 근처에 있는 것뿐인데,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제자리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정신을 잃어선 안 된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다. 파르르 떨리는 손길로 품에 넣어둔 병을 꺼내었다. 이제 뚜껑만 열면 되는데, 땀이 잔뜩 배어나 축축해진 손이 자꾸만 헛돌았다.
“…제발….”
결국 뚜껑을 열자마자 병 바깥으로 피가 왈칵 흘러넘쳤다. 뚝, 뚝. 손가락 사이로 진득한 액체가 묻어났다. 가빠진 호흡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새하얀 거미줄은 삽시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득한 정신을 부여잡고 겨우 고개를 드니 영롱한 광휘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누가 신이 자애롭다고 하던가. 그의 광채는 여느 칼보다 예리한 날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선 전능한 그에게 일말의 자비를 구해야 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길….”
한 손으로 팔목을 단단히 잡고 다른 손으로 병을 기울였다. 그러자 얇은 병 입구에서 진홍색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창끝에서부터 대를 따라 타고 내려가는 핏방울은 곧 처참하게 갈라진 균열에 닿았다.
“……!!”
비약한 기도가 그에게 닿은 것일까. 기이한 광채를 내뿜던 창은 서서히 피로 물들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숨통을 틀어막은 신력이 사그라지자마자 창대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뽑았다. 투둑- 상처에 얽혀 있던 거미줄이 실밥처럼 하나씩 뜯겨 나갔다.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닉스를 속박하던 창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된 건가…?”
신력을 잃어 피범벅이 된 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나무로 된 창대에 무어라 글귀가 적혀 있었으나 이미 부식되어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아무렴 무사히 창을 뽑아 내어 기뻐하던 그때였다.
[태오!]
날카롭게 갈라진 닉스의 목소리와 함께 창에 깃들어 있던 신력이 한 번에 폭발했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눈이 멀 듯 환한 빛이 순식간에 주변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이명은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시야도 서서히 돌아왔다. 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동굴이 아닌 완전히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팽창하는 우주처럼 새하얀 공간이 무한으로 뻗어 나가 있었다.
“…닉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어디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독방에 고립된 느낌이었다. 차분하게 주변을 살펴보다가 문득 저만치 앞에 꽂혀 있는 창을 발견했다. 분명 닉스의 어깨를 관통한 창과 같으나, 마물의 피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왠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창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또다시 압도적인 광채가 내뿜어졌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니 창이 있던 자리에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목구비조차 없었으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신력에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고작 인간 주제에 겁도 없구나.
저건 레톤 신의 일부라고.
- 성물을 건드린 각오는 이미 했을 터.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절대자에게 억눌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전쟁의 신 레톤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가치를 잃은 포로를 처형하듯 그는 가차 없이 선고했다.
- 바로 여기서… 네 죄를 처단하겠노라.
그가 손을 아래로 뻗자 빛나는 창이 나타났다. 저 날카로운 창날이 곧 내 몸을 꿰뚫을 걸 알면서도 이미 발이 묶여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몸소 깨달았다. 하늘 높이 올라간 창끝을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휘익- 목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던 창이 일순 멈췄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왠지 표정을 알 것 같았다. 그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목덜미에 드리운 창끝을 치운 그가 말했다.
- 너, 이곳의 인간이 아니로구나.
“……!!”
- 이 세계의 멸망을 막으러 왔느냐. 아니면, …멸망시키러 왔느냐.
의미심장한 물음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던 찰나, 그는 다시 창을 들었다.
- 네 노력은 갸륵하나, 계획을 벗어난 자는 추방당해 마땅하다.
“저는….”
- 돌아가거라. 네가 태어난 곳으로.
무엇을 말하든 정해진 운명이었다. 이번엔 막을 수 없다.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창에 눈을 질끈 감은 그때였다. 칭!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린 달빛처럼 창백한 은발이 보였다.
-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내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다름 아닌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이 레톤의 창을 가볍게 막아냈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에 레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이곳은 단죄의 영역. 신과 죄인 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넌… 누구지?
- 그건 말할 수 없겠군요.
- 감히 날 막겠다는 건가?
쿵. 창끝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하지만 시스템은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신을 대적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다급히 입을 열었다.
“…시스….”
- 쉿.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스템은 제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그러곤 고갯짓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 어서 가십시오. 여긴 당신이 오기엔 아직 이른 곳입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 그야 전 태오 님의 모험을 돕는 존재니까요.
“그게 무슨….”
생긋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레톤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워 힘겹게 일어난 후에도 쉽사리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연신 제자리에서 머뭇거리자 시스템이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
- 어서.
매섭게 빛나는 눈동자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몸을 돌리니 저 멀리 새하얀 벽에 난 균열이 보였다. 저기가 출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갈 틈새로 있는 힘껏 달려갔다. 사형대에서 죄인이 도망치는 걸 목격한 집행자는 크게 분노했다.
- 어딜 감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높이 들어 올린 레톤은 정확히 나를 향해 던졌다. 날카로운 창끝에 쫓기던 그때, 균열 사이로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셔츠 소매에 박힌 푸른 보석의 커프스 단추- 아스레인의 손이었다.
“…헉!!”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균열 밖으로 빠져나왔다. 딱딱한 바위에 무릎이 쓸려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바닥에 양손을 짚고 엎드리니 이상하게도 헛웃음이 나왔다.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엉망진창이 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눈앞에 나타난 손을 보곤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늦어서 미안하군. 괜찮나?”
“…네. 다행히요.”
어떻게 성물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 걱정되면서도, 막상 그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울지 않으려 애써 환한 미소를 지으니 아스레인이 마주 웃었다. 하지만 행복한 재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다가 뒤늦게 코트 자락 위에 튄 핏자국을 발견했다.
“교수님. 어째서 피가….”
그게 누구의 것인지 몰라 의아해하던 차였다. 후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두 발을 땅에 딛고 서는 순간 저 멀리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였다. 바닥에 꽂힌 창과 그 아래, 피로 물들어 푸른빛을 잃은 커프스단추.
“…아니… 아니야….”
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다정한 손이 싸늘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시선을 내려 보니 아스레인의 팔에서부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균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붙잡아준 오른팔이 레톤의 창에 무참히 잘려 나갔다.
“…아니죠?…이거… 꿈이잖아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만 남은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악몽이길 바란 것이 무색하게 감촉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볼품없이 펑펑 울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가능성을 계산했다.
마법으로 재생할 방법은? 아니면, 약초로 상처부터 지혈해야…. 만약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 때문이에요. 내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죄책감에 억눌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앙상하게 잘려 나간 환부를 감싸고 나 자신의 무력감을 책망했다. 신의 저주가 혹시 이런 거였나. 내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게 저주라면, 난 평생 신을 저주하고 말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끊임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자 피범벅이 된 손이 눈을 가렸다.
“…태오. 이건 악몽이네.”
이윽고 머리 위로 내려앉는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내 정신을 아득한 지하로 끌어 내려갔다.
“그러니 꿈에서 깨어나면 전부 끝나 있을 걸세. …전부.”
***
우아한 손짓을 따라 거미줄이 둥그렇게 말렸다. 이내 아스레인은 기절한 태오를 안아 들어 조심스레 요람 위로 눕혔다. 눈물이 맺힌 눈가를 쓸어 주는 손길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아스레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왔네.]
끝이 길게 늘어지는 말투가 아스레인의 신경을 긁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닉스를 노려보는 눈동자엔 불쾌감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그럼에도 닉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박에서 벗어난 걸 즐기려 여유롭게 기지개를 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스레인은 짧게 혀를 차며 비아냥댔다.
“기어이 일을 벌이는구나. …닉스.”
[계속 조용히 있었는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입술을 비죽인 닉스는 가볍게 도약해서 창이 꽂힌 바위로 착지했다. 그러곤 옆에 떨어진 팔을 주워 이리저리 휘둘렀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모습에 아스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만하고 이리 주지.”
[그 나이 먹도록 팔 간수도 똑바로 못해?]
닉스가 순순히 팔을 던져 주자 아스레인은 소프트볼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 냈다. 이윽고 환부에 갖다 대자 황금빛이 일어나며 금세 팔이 붙었다. 오~ 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은 닉스는 바위 위에 느긋하게 앉아 말했다.
[성물은 어떻게 넘어서 왔어?]
“…….”
[역시 ‘그 마물’다워~ 난 신력에 익숙해지기까지 수백 년이나 걸렸는데.]
쫑알거리는 목소리에도 아스레인의 신경은 온통 태오에게 향했다. 분명 마력의 흐름이나 몸 상태는 괜찮은데, 어째 그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초조해진 아스레인은 태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말고 살벌한 눈빛으로 닉스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창을 제거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맞아. 설마 나도 저런 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어.]
금빛 눈동자에 서슬 퍼런 안광이 일자 닉스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진짜야.]
“너 때문에 태오가 죽을 뻔했네.”
[나도 죽을 뻔했는데 걱정 좀 해 줄래? 이 망할 노인네야.]
“기껏 살아 놓고 다시 묻히고 싶나?”
[…성질 머리는 그대로네.]
닉스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가지런히 누워 있는 태오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걱정 마. 이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거대한 거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실이 서서히 태오의 몸을 감쌌다. 점차 둥그런 고치가 되어가는 그의 옆에 쪼그려 앉은 닉스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귀여운 걸 주웠어? 꿈을 꾸는데도 고통에 일그러져선…. 아아-! 그냥 이대로 두고 싶다.]
뾰족한 손톱이 태오의 일그러진 미간을 살짝 건드렸다. 그 순간 닉스의 뒷목에 날카로운 바위 끝이 닿았다. 곤히 잠든 태오를 마구 만지려던 닉스는 날이 선 살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
[아이, 알았어. 근데 이쪽은 너무 젊은 인간 아니야? 솔직히 영감이 노릴….]
뒤로 스르르 물러났던 바위가 그대로 닉스의 목에 꽂혔다. 켁! 헛기침을 내뱉은 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무자비하게 박힌 바위를 빼내는 사이, 아스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제 할 말만 했다.
“신의 저주 때문인가?”
[…….]
“닉스.”
[어! 고치 안에서 스스로 나올 때면, 저주는 깨끗이 사라져 있을 거야.]
신의 저주.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아스레인의 마음이 한차례 무거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태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읊으려던 그때, 눈치 빠른 닉스가 한발 앞서 그를 말렸다.
[대신 받아 내려는 생각은 관둬. 이건 신의 저주….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고생 좀 할걸?]
“상관없네.”
[그래? 그럼 이 인간만 헛짓거리 한 거네.]
“…뭐?”
[모르는구나? 저번에 나랑 만났을 때 뭐라 했는지 알아?]
닉스는 요람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일부러 다른 인간들의 길을 틀어 달라고 부탁했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고. 대단하지 않아?]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평소와 달리 진중했다. 모든 죽음을 끌어안는 진정한 밤의 주인다운 모습이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던 적안이 곧 싸늘하게 굳었다.
[누구랑 너무 다르잖아.]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린 닉스는 아스레인을 노려보았다.
[이 인간이 당신의 실체를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내가 말해야겠어. 우리를 저버리고 인간에게 붙은… 역겨운 배신자라고.]
살갗으로 와 닿는 적대감에 아스레인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후, 배신자라….”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결국 너도 내 권능에서 벗어날 수 없거늘.”
[그럴까? 다른 마물들이라면 몰라도 난 당신의 가호 따위 바라지 않았어.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것도 무시했잖아. 아~ 너무 약해져서 알아채지 못한 건가? 아니면, 걱정할 처지가 안 되는 건가?]
줄곧 여유롭던 아스레인의 얼굴에 한 줄기 금이 갔다. 그 틈을 알아낸 닉스는 목 끝까지 단단히 채워진 단추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어느새 목줄이 채워져선… 나나 당신이나 똑같네? 저 연약한 인간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갇혀 있는 사이 헛소리가 많이 늘었구나.”
[만물에게 추앙받다가 한순간에 과거의 산물로 추락하니 어때?]
아스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차가운 태도에 질려 버린 듯 닉스의 눈동자엔 이로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서렸다.
[신의 불을 빼앗아 인간에게 준 기분이… 어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