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내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추레한 몰골로 홀에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곳에서 세잔이 툭 하고 입을 열었다.
“형….”
황망하게 흔들리는 남색 눈동자가 내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충분히 놀랄 만했다. 헤진 밑창, 이끼로 덮인 앞코, 축축해진 옷자락. 전부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피해자와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으니 대뜸 아이리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충혈이 되도록 부릅뜬 눈이 무섭기보단 안쓰러워 보였다. 내 어깨를 덥석 잡은 아이리스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얼마나 불안했으면, 안부를 묻기보다 기억부터 확인할까.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감싸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아이리스.”
“하아….”
“세잔이랑 진한테도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밤새 쉬지도 못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건넸다. 이윽고 우두커니 서있던 세잔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내쉬는 한숨에 깊은 피로와 안도감이 묻어났다. 덩달아 한숨을 내쉰 진은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차를 내어 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약초와 꽃을 섞은 찻잎에선 향긋한 풀냄새가 풍겼다. 조심스레 차를 홀짝이자 긴장으로 굳은 몸이 스르르 풀렸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운을 뗐다.
“어떻게 알았어요?”
“교수님께서 갑자기 태오가 어디 갔는지 아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당연히 방에 있을 거라고 대답했죠.”
그게 짧은 실종 사건의 시작이었나. 기운 없이 의자에 널브러진 아이리스가 뒤이어 설명했다.
“그래서 내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는데, 침대에 네가 버젓이 누워 있더라고. 하지만 교수님은 네가 아니라고 하더라. …누가 봐도 너였는데.”
“저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환영이라 하기엔 감촉까지 느껴졌으니까요.”
닉스의 능력이 오직 아스레인에게만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잔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그 마법은 뭐죠?”
“마물의 능력이에요.”
“…마물?”
“타르타로스에 1급 위험 마물 ‘닉스’가 있어요.”
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에 여러 시선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아스레인마저 닉스의 이름을 듣자마자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초조한 듯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 없어.”
“기록에서 지워졌거든요. 누구에게도 기억되어선 안 됐으니까….”
산사태가 일어난 그날, 타르타로스의 시간은 멈췄다. 잔해에 파묻힌 마물과 인간, 그리고 죽지 못해 홀로 남은 닉스까지- 모두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수백 년이 흘렀다.
만약 처음으로 닉스를 발견한 조사대가 무사히 성물을 치워 줬더라면 어땠을까. 시신은 무사히 유족에게 돌아가고, 마물은 자연의 품에 안기며, 닉스는 또다시 미식을 찾아 떠났겠지. …최소한 성물이 어깨에 꽂히는 참사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닉스는….”
오래 기다렸을 그들에게 동굴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전했다.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그들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끝내 성물이 곧 닉스의 코어를 침식할 거란 이야기를 마치자 날카로운 헛웃음이 들렸다.
“허…. 방금 창이라고 했어?”
“제가 똑똑히 봤어요. 그 성물은 창이었어요.”
“아니, 이 정도면 의심해 달라고 농성하는 거 아냐?”
“모르겠어요. 정말 레톤의 사제들일지,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려는 함정일지….”
의심은 명백히 레톤의 사제를 향했으나 아직 속단하긴 일렀다. 안 그래도 클라우스 사건에 연루되어 레톤 신전은 어느 때보다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다. 섣불리 떠보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고민하던 세잔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것보다도 닉스를 속박하는 성물을 없애는 게 우선입니다.”
“세잔의 말이 맞아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니 아이리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창을 뽑는 건 그렇다 쳐. 거기 갔던 사람들이 이상해진 이유가 신력 때문이라며.”
“네. 강한 신력에 노출되는 순간 정신마저 잠식된다고 들었어요.”
“근데 성물을 막 만져도 괜찮은 거야?”
“아뇨. 반드시 신력을 억눌러야 해요.”
“억누른다니… 무슨 수로?”
줄곧 침묵을 지키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마물의 피를 성물에 부으면 되네.”
“…예? 마물의 피요?
아스레인은 알고 있었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썩 평범한 방법은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진은 멍하니 눈만 끔뻑였고, 세잔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걸 당장 어디서 구해?”
“인근 마물 보호소에 도움을 청할 수는 없을까요? 조금씩 모은다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뭐라 하면서 달라 하게? 성물에 뿌리는 용도라고 할 거야?”
“그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하던 차, 나직한 목소리가 사이를 끼어들었다.
“피는 내가 알아서 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게.”
단호한 투에 도움이 필요하냐는 말조차 얹을 수 없었다. 그야 내가 발품을 파는 것보다 아스레인이 서신을 쓰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다행히 마물의 피를 구하는 일은 한시름 놓았지만, 이젠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런데 성물에 피를 뿌려도 되는 겁니까?”
“뭔가 불안해요. 물론 제가 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져요.”
눈치 빠른 세잔과 진이 정확히 문제를 꼬집었다. 웬만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들에게도 알 권리는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두 손을 맞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물을 없애는 자는 신의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신의 저주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참다못한 아이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거지.”
“…네?”
“죽는다고.”
또 한 번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당황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이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는 닉스를 돕기로 마음먹었으나, 그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길 바라는 마음에 닉스와의 계약에 대해 전했다.
“창만 제거해 준다면, 닉스가 저주를 대신 받겠다고 약속했어요.”
“뭐라고?”
“그는 죽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불사고 나발이고, 대신 받겠다는 그 말을 믿는 거야?”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인간들을 무작위로 타르타로스에 끌어들인 마물을 어떻게 믿어?”
“…전 믿어요.”
단호하게 입장을 표해도 소용이 없었다. 문득 죽음 앞에서 주저하는 그들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건 누가 사지로 뛰어들지 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저 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다들 걱정 마요. 제가 갈게요.”
“예?”
“처음부터 가려고 했어요. 단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꺼낸 얘기예요.”
닉스의 수중에 내 기억이 들려 있는 한, 사흘 안에 타르타로스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네가 거길 왜 가.”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신경질적인 말에 반박하니 곧바로 아스레인이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그럼 내가 가지.”
“…교수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어떤 조건을 생각해도 제가 가장 부합하니까 그런 거죠. 거기 창 말고도 다른 성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신 거예요?”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네.”
“우리 냉정하게 생각하자고요. 신력은 마력을 밀어내요. 여기서 가장 마력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저잖아요. 굳이 교수님께서 무리할 필요가 뭐가 있죠?”
아스레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네가 갈 거면, 차라리 내가 해.”
“아이리스.”
“마력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 그렇게 따지면 나지. 이미 코어가 완전히 부셔졌으니까.”
벌써 결심을 다진 회색 눈동자는 쉽게 굽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세잔마저 가세했다.
“신력에 익숙한 게 도움이 된다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세잔 경까지 왜 그래요.”
“지금 여기, 형을 혼자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나마 내 주장에 힘을 실어 줄 것 같은 진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이들은 죽음 앞에서 용감해지는 걸까. 어째서 힘든 일을 자처하려는 걸까. 어려운 일은 남에게 미루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니었던가. 이곳에 가장 빠르고 안전한 지름길이 있는데, 왜… 저리도 결의에 찬 얼굴들을 하고 있는 걸까.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누구든 성물을 가까이하고도 멀쩡한 사람이 그 창을 뽑도록 하죠.”
“…그래. 차라리 그게 낫네.”
아이리스는 물론이고 세잔과 진까지 흔쾌히 수긍했다. 그 와중에도 말을 아끼는 아스레인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절충안을 내놓았으니 더 이상의 토론은 필요 없었다.
“그럼 다들 조금이라도 쉬어요. 저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요.”
“태오도 푹 자야 해요. 알았죠?”
“그럼요. …잘자요. 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장 먼저 홀을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쳤다고 하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친 메이드에게 목욕물을 데워 달라고 말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고 새벽 어스름이 걸린 하늘을 바라보는데, 나긋한 목소리가 고요를 방해했다.
- 다들 알게 되면 화를 낼 겁니다.
“뭐를?”
- 처음부터 누가 창을 뽑게 될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요.
“…어차피 모를 거야.”
살며시 눈을 감으니 닉스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반드시 사흘 안에 돌아올게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해.’
‘제가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분명 다른 이들도 함께 있을 거예요. 제가 혼자 간다고 해도 결코 보내주지 않을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 환영으로 그들의 눈을 속여 오직 제게만 길을 열어 주세요.’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건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 다들 고맙게도 남을 위해 주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타르타로스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안전하게 환영 속에 있다가 일이 끝나면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그게 그들을 위한 일이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창가에 앉은 시스템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담긴 감정은 순수한 흥미 같기도, 씁쓸한 연민 같기도 했다.
- 신기하군요. 당신은 자신을 희생하는데 늘 망설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영웅놀이나 희생이 아니야. 피해를 줄이려는 최선의 수라고.”
바로 체크메이트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기물을 손해 볼 필요가 있을까.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시스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냉정한 겁니까. 아니면, 멍청한 겁니까.
“글쎄.”
부디 남이 보기엔 냉정한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설령 멍청하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둘 다 아니니까.
“…이기적인 거지.”
나는 단지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걸 보지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체스판에 내가 남아 있는 한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다. …아무도.
***
아스레인은 단 하루 만에 마물의 피를 구해 왔다. 그러나 어디서 구해 왔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진득한 피는 손바닥만 한 병 세 개로 옮겨졌다. 하나는 내게, 하나는 아이리스의 손에, 마지막 하나는 세잔에게 쥐어졌다. 하지만 결국 병을 비우게 되는 건 나뿐일 것이다.
“저기야?”
산길을 오르던 아이리스가 언덕처럼 쌓인 잔해를 가리켰다. 분명 이틀 전만 해도 깔끔하게 치워져 있던 잔해가 다시 둥그렇게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아스레인과 이곳을 떠난 후, 닉스가 손을 써 둔 모양이다. 그저 사고 현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에 아이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여기 입구가 있다고?”
“네. 잔해를 치우면 문이 있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리스는 망설임 없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작게 속삭이는 기도문을 따라 무거운 잔해가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마석에 익숙해지려 얼마나 힘들게 노력했는지, 마침내 그 결실이 빛을 발했다. 아이리스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입구는 퍽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들 조심하도록 해요. 물론 지금은 대낮이지만, 이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곳이 밤이거든요.”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고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문이 닫히자 동굴은 여느 때와 같이 암흑 속에 갇혔다. 미끄러운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발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다섯 명은 곧 네 명으로 줄었고, 세 명이 되었다가 어느새 두 명만 남았다.
희미한 빛을 내뿜는 향로가 저 멀리 보이자마자 뒤따라오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괜찮나? 태오.”
“네. 교수님은요? 성물 때문에 힘들진 않으세요?”
“아직 버틸 만하군.”
아스레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횃불을 들고 앞서갔다.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다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아스레인이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이 너무도 진짜와 닮아서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장난 그만 쳐요. 닉스 님.”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무심한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에이, 너무 빨리 알아챈다.”
“그림자가 없잖아요.”
후후.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이윽고 닉스는 검은 연기와 함께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부 위를 감싼 새하얀 균열이 어째 전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정작 죽음을 앞둔 닉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능청스럽게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부탁한대로 다른 인간들은 전부 환영을 보내서 길을 틀어 놨어.”
“괜찮은 거죠?”
“물론이지. 나를 얼마나 나쁜 놈으로 보는 거야~”
전혀 거리낌 없이 만져 대는 손길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마음껏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닉스가 대뜸 물었다.
“근데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다른 사람들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가 잘못되면 어떡해요.”
“그러는 너는?”
“…그들이 힘든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보다 제가 힘든 게 나아서요.”
“그으래? 역시 나의 헤메라는 착하기도 하지.”
대체 저 호칭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닉스에게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그쪽이 현명했다. 포기한 채로 가만히 서있으니 닉스는 내게 기대어서 말했다.
“아, 맞다. 그한테는 역시 내 힘이 안 들더라고.”
“…그요?”
“아스레인…이라는 이름이던가?”
“아. 교수님이라면, 어제 환영도 통하지 않았다던데요.”
풉- 입술 새로 웃음이 터져 나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뜬금없는 반응에 옆을 돌아보니 닉스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의아한 눈초리로 흘겨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닉스는 결국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방금 뭐라 그랬어? 교수님~?”
“네. …왜요?”
“아하하! 아니야. 그냥 좀 웃겨서. 그 ‘교수님’은 어차피 동굴 안에 그득한 신력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거야. 곧바로 네가 환영이란 건 알아보지 못하겠지.”
웃음기가 가득 묻어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은 점차 확신이 되었다.
“닉스 님. 역시 아스레인을 알고 있는 거죠?”
“글쎄~ ‘교수님’은 처음 보는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닉스가 허공에 손짓했다. 이내 날카로운 손톱을 따라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한 그림 속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아스레인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게 동굴 안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벌써 널 찾기 시작했어.”
“…괜찮아요. 교수님이 여기 오지 못하게 시간만 벌면 돼요.”
“왜 오면 안 되는데? 아, 성물 때문에?”
“네. 유독 마력이 많은 체질이니까 힘들 거예요.”
“…마력이 많아서 힘들어?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노골적인 조소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윽고 닉스는 그림 속 아스레인의 얼굴을 손톱으로 콕콕 찌르며 말했다.
“걱정 마~ 아마도 여기로 안 올 거야. 정확히는 못 오겠지. 고지식한 작자들은 반드시 안전한 선택만 하니까.”
“그럼 다행이에요.”
“…그 대단하신 육체보다 네가 소중하다면 모르겠지만.”
소중하다…라. 부디 아스레인이 나보다 그 자신을 아끼길 바랐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