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115/305)

이래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 건가. 환부에 감은 거미줄은 신력이 마구잡이로 퍼져나가는 걸 겨우 막고 있었다. 가뭄이 든 땅처럼 갈라진 껍질 사이로 찬란한 빛이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꽤 됐어. 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지. …곧 코어에 닿을 거야.]

같은 공간에 성물이 있는 것과 몸에 성물이 박힌 것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입구에서 봤던 향로와 달리 닉스의 어깨를 관통한 창은 짙은 신력을 내뿜고 있었다. 육안으로만 살펴봐도 확실했다.

저 창은 산사태가 일어날 당시에 함께 흘러 들어온 성물이 아니다. 누군가 입구가 막힌 후에 타르타로스에 침입하여 닉스를 노린 것이다.

“창을 들고 온 인간의 얼굴을 기억해요?”

[아니. 얼굴이고 몸이고 전부 천으로 가리고 있었어. 기억나는 건… 푸른 옷자락뿐이야.]

푸른 옷자락. 이게 단서가 될까?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다가 닉스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날의 일을 전부 말해 줘요.”

[으음,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 평범한 날이었어. 웬일로 한 인간이 신전과 이어진 입구로 타르타로스에 들어왔지. 꽤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이라 반가웠어. 심지어 내 본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라.]

“그 인간이 먼저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응.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아니, 나를 만나려고 온 거야.]

“그걸 어떻게 알죠?”

[이곳에서 나를 마주치자마자 뭔가를 묻더라고.]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난데없이 앞자락을 여민 끈을 잡아당겼다. 얇은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니 셔츠는 마치 가운처럼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쳐졌다. 이윽고 닉스는 왼쪽 어깨를 드러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니, 이런 귀여운 선물을 주고 가더라.]

“…이건….”

옷 안에 숨어 있던 흉터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창이 박힌 어깨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되어 가슴과 목덜미까지 넓게 번져 있었다. 설상가상 신력이 코어에 닿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닉스는 진회색 피부 위를 지나간 새하얀 균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나’는 사라지고 육신만 남겠지. 네가 마을에서 마주친 혼이 빠진 인간들처럼 말이야.]

“신력에 잠식되면 정신은 완전히 부서지는군요.”

[맞아. 불사라고 여겨진 내가 곧 소멸한다니… 재밌지 않아?]

“…재밌을 리가 없잖아요.”

마치 남의 죽음을 방관하듯 초연한 태도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럼 여기에 왔던 마을 사람들이 이상해진 이유가 신력 때문인가요?”

[응. 창에 닿기도 전에 신력에 억눌렸지. 하지만 넌 다를 거야. 지금도 버티고 있잖아.]

다시금 닉스의 어깨에 꽂힌 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왜 하필이면 ‘창’일까. 문득 1년 전에 마을로 찾아온 레톤 신의 사제가 떠올랐다. 단순히 종교를 설파하기 위해 주민들을 도우며 친해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동굴에 있는 닉스를 노린 거라면, 타르타로스의 역사를 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접근했을 수도 있다.

“하나만 물을게요.”

[뭔데?]

“그 인간이 당신에게 뭘 물어본 거죠?”

잠시 망설이던 닉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닉스 님.”

[그냥 말해 줄 순 없지. 네가 이걸 무사히 제거해 준다면 알려 줄게.]

미소를 머금은 입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범인을 찾기 위해서도, 닉스를 구하기 위해서도 창을 빼내야만 했다. 단지 창을 잡아당기는 것쯤은 힘들지도 않다. 하지만 그 악명 높은 닉스마저도 억압할 성물이니, 평범한 방법으로는 창대를 잡는 단순한 일조차 무리일 것이다.

“신력을 무슨 수로 잠재우죠?”

사제라도 불러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닉스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마물의 피. …그걸 성물에 뿌리면 돼. 애석하게도 난 피 같은 건 안 나거든.]

신력을 마력으로 억누른다.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를 없애기 위해선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심지어 상대는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이다.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결코 평범하진 않을 것이다. 불안하게 눈치를 살피자 닉스는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물론 그 속 좁은 놈들이 화를 내겠지. 감히 우리 같은 게 성스러운 물건을 더럽혔으니까.]

“화를 낸다는 건….”

[성물을 없애는 자는 반드시 죽어. 운이 좋으면 숨은 붙어 있겠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의 화를 입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지금껏 위험한 일은 수십 번도 더 겪었으나, 죽음을 눈앞에 둔 적은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라는 건가요?”

날이 선 질문에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는 그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동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닉스가 훗, 하고 웃었다.

[설마. 네가 죽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 …내가 저주를 대신 받으면 되니까.]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말했잖아. 난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아.]

불쑥 다가온 닉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설령 신의 저주를 받을지라도.]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핏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그의 목덜미를 감싼 균열은 조금씩 퍼져 가고 있었다. 쩌적- 껍질이 갈라지는 소리는 마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닉스의 코어가 신력에 잠식되는 순간, 영원을 맹세한 시계는 영영 멈추게 될 것이다.

“제게 시간을 주세요. 함께 온 사람들에게 우선 자세한 사정을 알려야 해요.”

짧은 고민 끝에 말하자 둥근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그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거야?]

“네.”

[그리고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네?”

[살아 돌아간 네가 나를 모르는 척할지… 아니면, 나를 제압하기 위해 사제 놈을 데리고 올지 모르는 거잖아.]

닉스는 내 저의를 의심하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인간에게 공격당해 수백 년을 갇혀있었으니,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을 나 혼자 정할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그의 팔을 붙잡으며 진심을 전했다.

“닉스 님.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을 해치지도 않을 거고요.”

[나도 널 의심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익숙한… 기운이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닉스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귀걸이를 툭 건드렸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 냄새를 잊을 수 없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뇌리에 세게 박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닉스는 귀걸이에 깃든 아스레인의 마력을 알아챈 눈치였다. 하지만 줄곧 동굴에 갇혀 있던 닉스와 아스레인이 서로 만날 기회 따윈 없었다. 그럼 대체 그들의 접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갑작스럽게 혼란스러워하자 닉스는 손뼉을 가볍게 마주치며 이목을 끌었다.

[아무튼 여길 떠나려거든, 네게 가장 소중한 걸 맡기고 가.]

당장 소중한 거라곤 아스레인이 준 귀걸이뿐이었다. 두 손으로 귀걸이를 빼려고 하니 닉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여기 있잖아.]

갑자기 다가온 손이 내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윽고 새까만 손톱을 따라 희미한 빛의 구체가 흘러나왔다. 도깨비불처럼 허공을 둥실 떠오른 빛은 어느새 닉스의 손바닥 위에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숨보다 소중한 기억 말이야.]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져 닉스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기억’은 그의 수중에 들어간 후였다.

“닉스.”

[걱정 마. 당장은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세 번째 해가 뜨고도 오지 않으면 이 기억은 내가 부술게. 이상한 놈들을 데리고 와도, 낌새가 조금만 수상해도… 예외는 없어.]

“…지금까지 계속 이랬었던 거군요.”

[어쩔 수 없잖아? 살아남으려거든 비겁한 수라도 써야지.]

빛의 구체를 삼킨 닉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변명 따위로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치달아 버렸다. 결심을 다지려 새빨간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반드시 사흘 안에 돌아올게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해.]

“제가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뒷말을 작게 속삭이자 닉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정말이야?]

“…네. 부탁드릴게요.”

뜬금없는 부탁에도 닉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려는데, 길쭉한 팔이 대뜸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닉스는 마치 장난감 코너 앞에서 떼를 쓰는 아이처럼 나를 착 붙잡고 늘어졌다.

[아~ 보내기 싫다. 그냥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돼?]

“닉스 님. 약속하셨잖아요.”

[하지만….]

겨우 그의 팔을 떼어 낸 순간이었다. 쿵! 굉음과 함께 지반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닉스는 곧장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입꼬리를 씰룩이는 얼굴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이런, …벌써 들켰네.]

“네?”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새도 없었다. 울퉁불퉁한 바닥 전체가 파도치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규모 마법이었다. 중심을 잡기 힘들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사이, 닉스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때 딱딱한 바위가 송곳처럼 뾰족해지더니 단숨에 닉스의 허리를 꿰뚫었다.

[크윽…!]

피 대신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했다. 바위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바닥에 누운 닉스는 미동도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갔다.

“…니, 닉스…?”

조심스레 불러 보니 닉스가 꿈틀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마법이 멈춘 틈에 얼른 그에게 다가가 상처부터 살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바위로 처참히 뚫렸던 허리엔 검은 연기만이 일렁거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정작 다친 사람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날 걱정하는 거야?]

“안 할 수가 없잖아요! 방금 완전히 허리가….”

뚫렸었는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광경에 뒷말을 삼켰다. 검은 연기로 둘러싸여 있던 상처엔 어느새 새하얀 거미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후로 눈 깜짝할 새에 처참한 관통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닉스는 내 콧잔등을 톡, 하고 건드리며 익살맞게 웃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안 죽는다 했잖아.]

“…놀랐잖아요!”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다?]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닉스를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닉스는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이며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쭉쭉 기지개를 펴는 모습은 결코 허리를 뚫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부터 벌어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레톤의 사제가 다시 온 건가? 삽시간에 심각해진 내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닉스는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꽤 섭섭하겠어. 저쪽은 널 구하러 온 거거든.]

“…네?”

[그나저나 어째 성질이 전보다 더러워진 것 같다? 노망이 났나.]

“그게 무슨….”

쿵!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렸다. 이번에도 닉스가 서 있는 자리로 날카로운 바위가 솟구쳤다. 하지만 닉스는 같은 패턴에 두 번 당하진 않았다. 가볍게 바위를 피한 닉스는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성물이 있어서 들어오질 못하니, 아예 밖에서 마법을 쓰시겠다…?]

천장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실력은 여전하네. 기분 나쁘게.]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걸까. 단단하게 연결되어있던 종유석이 차례대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닉스만을 노리는 공격 마법엔 명백한 살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닉스는 마치 춤을 추듯 여유로운 몸짓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종유석을 피했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즐기는지,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디론가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피난처가 없었다. 정확히는 내 주변 3미터 반경으로는 종유석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계산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단 한 명밖에 없다.

“…아스레인?”

설마…. 아니겠지. 그리 부정하면서도 오묘한 익숙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사이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닉스는 바닥에 꽂힌 바위를 밟고 넘어와 내 옆에 착지했다. 그러곤 잔뜩 움츠려있는 내게 팔짱을 끼며 다른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짠~]

마치 서커스를 하듯 우스꽝스러운 포즈였다. 그런데 정말 마술처럼 닉스가 내게 닿자마자 동굴 안은 고요해졌다.

“닉스 님.”

[내가 이겼어. 태오.]

“예?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법 말인데요.”

[달리 누가 있겠어? 그 영감이지.]

“…영감이요?”

아스레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는 건가? 인상을 찌푸리자 닉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키득거렸다.

[이대로 보내주기 싫은데, 어쩌지?]

고민하듯 입술을 비죽 내민 닉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그것도 모자라 머리 위로 뺨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작된 애정 공세에 맥을 못 추리던 그때, 등 뒤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조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닉스가 사라졌다. 퍼억- 뒤통수로 날아온 바위가 정확히 닉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앞으로 고꾸라진 닉스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숨을 골랐다. 지금껏 여유롭던 모습은 사라지고, 성질이 제대로 뻗친 표정이었다.

[아이, 저 망할 노인네가.]

신경질적으로 이를 가는 닉스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 닉스에게 다가갈 수도, 입구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내 앞에 뜬금없이 무형의 존재가 튀어나왔다.

“어…? 아그누스. 네가 어떻게….”

분명 신력 때문에 마력이 통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아그누스는 평소보다 훨씬 뚜렷한 모습으로 그림자 위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아그누스는 내 바지자락을 물고 입구 쪽으로 살짝 당겼다.

이 틈에 도망치라는 건가. 발소리를 죽여 몰래 전쟁 통을 빠져나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또 다시 마법이 닉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곡예를 하듯 유연하게 마법을 피한 닉스는 이내 바위에 안착했다. 그러곤 뒤늦게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흘겨보았다. 붙잡히면 어쩌나 싶어 뒷걸음질 치는 순간, 무표정하던 얼굴엔 짙은 미소가 번졌다.

[나중에 봐.]

두 손가락을 입술에 댄 닉스는 내게 손 키스를 날리며 말했다.

[나의 헤메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곧바로 내 앞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너머를 볼 수도 없었다. 그대로 아그누스의 등에 올라타 무사히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긴 했는데, 그 앞에 더 큰 산이 남아있었다.

“…교수님.”

뭐라고 말해야하지. 아니,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아스레인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다친 데는 없나?”

“네….”

짧은 한 마디에 지하에서 울리던 굉음이 우뚝 멈췄다. 역시 닉스에게 마법을 퍼붓던 사람은 아스레인이었다. 멀쩡히 저택에 있던 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닉스에게 납치당했다고 오해할 만도 했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우물쭈물하니 아스레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만 돌아가지. 피곤하겠군.”

피곤한 건 내가 아니라, 나 때문에 여기까지 나와 마법을 쓴 아스레인 아닌가. 묵묵히 언덕을 내려가는 아스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음?”

“괜히 힘쓰게 해서요.”

“자네가 원해서 홀린 게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아스레인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닌데도 귀찮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나를 돌아보는 그를 마주할 기운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쓸데없이 교수님을 무리하게 만든 건 사실이잖아요.”

아무리 아스레인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마법은 힘이 들 것이 분명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아스레인이 걸음을 돌려 다가왔다. 저벅저벅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자연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태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

한 걸음 앞에 멈춰선 아스레인은 내 뺨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다정한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니 살짝 찌푸린 미간이 보였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여 걱정하던 그때, 아스레인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를 위한 것 중에 쓸데없는 건 없네. …단 한 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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