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 (114/305)

#114

싸늘한 바람에 횃불이 힘없이 꺼져 사방은 금세 어두워졌다. 성물이 내뿜는 희미한 빛으로는 겨우 한 걸음 앞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캄캄한 동굴에 고립되어 자연스레 다른 감각이 곤두섰다. 뚝, 뚝.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음산한 바람과 함께 노래하는 듯 나른한 미성이 귓등을 스쳤다.

[…아쉽네.]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대신 어둠 속에서 새하얀 실이 반뜻 빛났다. 조심스레 따라가니 그 끝엔 바위만 한 고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의 최후처럼 보여, 저절로 섬뜩한 상상이 떠올랐다.

…이 정도 크기면 고치 안에 사람도 거뜬히 들어가겠다고.

“설마….”

아니겠지. 틈새를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등에 무언가 툭 닿았다. 흡! 숨을 짧게 들이쉬며 뒤를 돌아보니, 길게 찢어진 입매가 나를 반겼다.

“…당신은….”

어둠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바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돌바닥을 뒤덮은 긴 머리카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장막이었다. 핏기 없는 진회색 피부는 밤하늘로 보였고,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꼭 새벽을 수놓은 화성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도 제일 눈에 띄는 건, 셔츠 자락 위로 드러난 흉터였다. 목덜미로 얼핏 보이던 선은 마치 거미줄처럼 피부에 촘촘히 퍼져 나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흉터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때, 새빨간 입술이 툭 벌어졌다.

[나를 아니?]

무거운 침묵을 꿰뚫는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녀이자 그는 생명의 끝자락에서 피어난다. 만약 밤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맞이하라. 그럼 밤께서 기꺼이 꺼져 가는 불씨를 안아 줄 테니. 설령 어둠이 눈앞을 삼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곧 삶의 증명이요, 밤은 아침의 이면이니라.

“…닉스.”

자그맣게 중얼거리자 쌍꺼풀 없이 날렵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나 분위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함부로 부르면 안 됐었던 건가. 이윽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게 손을 뻗었다. 지레 겁먹은 것이 무색하게 단단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아-! 대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야.]

…뭐지? 꼼짝없이 제압당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품에 안겨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멍하니 서 있으니 닉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를 먼저 알아보는 존재는 네가 처음이거든.]

“아…, 네?”

[칭찬해 줄게. 칭찬.]

냉랭한 찬기가 느껴지는 손이 내 등과 팔을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심지어 머리 위로 뺨까지 비비는 바람에 머리카락은 금세 산발이 되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각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닉스는 아랑곳 않고 온기를 담뿍 느끼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넌 지금까지 왔던 인간과는 다른 것 같구나.]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싶던 차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

그 짧은 한마디에 소름이 끼쳤다. 겨우 품에서 빠져나와 숨을 돌리는 척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닉스는 살짝 상기된 뺨을 어루만지며 나를 음미하듯 뜯어 보고 있었다. 곳곳을 훑어보는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서렸다. 어쩐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 기분이었다.

“닉스… 님.”

[편히 말하렴. 태오.]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다들 꿈을 꾸듯 이곳에 오지.]

꿈이라. 잔해의 틈새에서 기이한 기운을 느낀 순간부터 이미 닉스의 권능 안에 들어온 것 같다. 나름 오필리아에게 홀린 후로 조심한다고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걸려 버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닉스는 싱긋 웃으며 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 특별히 너는 더 신경 썼어. 영 기분 나쁜 게 붙어 있어서 말이지.]

“…기분 나쁜 거요?”

의미 모를 말에 되물었으나 닉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넘겨버렸다.

[응. 기분 나쁜 거.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에는 네가 곤히 자는 것처럼 보일 거란다.]

아그누스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오케아노스의 일부를 말하는 건가. 아무렴 의심받지 않도록 내 환영까지 만들어 둔 닉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그 치밀함에 놀라야할지 모르겠다. 불현듯 저택에 있을 그들이 걱정되어 은근히 닉스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냥 보내주실 수는 없겠죠?”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생글 웃는 얼굴은 철의 요새였다. 부디 타르타로스의 바깥에서 아무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기왕 이렇게 잡혀 버렸으니 될 수 있는 한 닉스에게 정보를 캐내는 수밖에 없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어요?”

[네 머릿속을 잠깐 들여다봤어.]

“…예?”

[놀라긴. 그 정돈 내게 별거 아니야.]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이토록 두렵게 느껴질 수는 없었다.

[유년 시절 기억이 아예 없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사정이 있어서요.”

[흐응, 그래?]

현대의 기억까지 읽진 못하는구나. 나지막이 한숨을 쉬니 닉스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그럼 시스템은 누구야?]

“…네?”

[그 기억은 아예 들춰 볼 수도 없더구나.]

“그냥… 친구예요.”

설마 이 세계 존재의 입에서 시스템이란 이름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숨길 길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닉스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괜히 더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여긴 닉스의 손바닥 안이다. 조금만 방심하는 순간 한입에 잡아먹힌다. 괜히 신경을 거슬리게 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었다. 심지어 깊은 동굴 속엔 마물을 소환할 만큼의 생명력을 가진 식물은 조금도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소매를 걷어 보았으나, 히페리온의 팔찌는 겨울을 맞이한 지 오래였다.

당황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자 닉스가 빙긋 웃었다.

[괜히 힘 빼지마. 어차피 안 될 테니까.]

“…성물 때문인가요?”

[그래. 저 구역질 나는 빛이 모든 걸 망쳤지.]

닉스는 제자리에 서서 저 멀리 희미한 빛을 응시했다. 신력이 느껴지는 향로가 바위 사이에 떡하니 끼어 있었다.

[저딴 걸 만들어 내는데도 만물의 적이 아니라 신이라 추앙받다니… 우습지 않아?]

깊게 주름진 미간에선 선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닉스가 온몸으로 내뿜는 살기가 신력보다도 강하게 내 숨통을 틀어막았다. 혹여 성물을 향한 불씨가 내게 튈까 봐 서둘러 화제를 옮겼다.

“닉스 님.”

[응?]

“어째서 저를…. 아니, 인간들을 타르타로스로 유인한 거죠?”

장내를 무겁게 누르던 살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이내 그의 입가에 쓸쓸한 감정이 스쳤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따라오겠니?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닉스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나를 해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아니, 해칠 작정이었다면 진즉에 그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불빛이 더욱 멀어지기 전에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언제부터 여기 계신 거죠?”

[이곳에서 인간과 마물이 무더기로 죽어날 때부터.]

산사태가 일어난 시기라면, 무려 에브게니아 1세 때다. 아득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자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살 수 있었죠?”

[무슨 소리니?]

“여긴 먹을 것도, 햇빛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답을 이미 아는구나. 난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어.]

천천히 고개를 돌린 닉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지.]

“죽지 않는다니….”

[후후, 밤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본 적 있어?]

불사(不死)라니.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했다. 그러고 보니 히페리온도, 오케아노스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적은 없어 보였다. …이건 마치 신 같지 않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닉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래도 여긴 제법 풍족한 곳이었어. 진득한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거든.]

“사체…를 드신 건가요?”

[설마. 이래 봬도 미식가란다.]

이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부터 든다. 가늘게 뜬 눈에서 마음을 읽어 낸 건지, 닉스는 새빨간 입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태오. 과실이 언제 가장 맛있는지 아니? 농염하게 익어 떨어지기 직전이야.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지.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 그들에게 서린 절망에선 아주 탐스러운 향이 난단다.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를 만큼.]

기이한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식’에 대한 찬미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이곳은 화려한 만찬이었지. 곳곳에서 단말마가 난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어. 그래서 정신없이 먹어 치우다가 뒤늦게 알아챈 거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매가 일순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보기 좋게 갇혔다는 걸.]

“신전에서 흘러들어온 성물 때문인가요?”

[그래. 쥐새끼처럼 치즈 냄새에 속아 그 아래 숨겨진 덫을 못 봤어.]

자신의 과거를 자책하는 모습조차도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 후로도 닉스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가벼운 말투로 이어나갔다.

[이따금씩 살아있는 인간이 들어와서 바위에 깔린 사체를 가져가곤 했어. 그래서 은근히 기대했지. 저 인간들이 성물까지 가져가 주진 않을까, 하고. 비록 내겐 더러운 물건이지만… 인간들에겐 꽤 소중할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성물은 그대로네요.”

[맞아.]

“아무도 여기까지 오지 않은 건가요?”

[딱 한 명 왔었어. 기쁜 마음으로 쓰레기를 치워 주길 기다렸는데, 결국 성물 근처에도 오지 못했지.]

“왜죠?”

의아하게 물으니 닉스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나랑 눈이 마주쳤거든.]

“…그 인간이 닉스 님을 봤다고요?”

[응. 무슨 괴물 보듯 기겁하며 도망가더구나. 대체 어떻게 말을 전했을진 모르겠지만, 그 후로 입구는 전부 막혔고 발길도 완전히 끊겼어.]

생각지도 못한 단서였다. 시신과 성물을 수습하러 온 조사대가 타르타로스 안에 있는 닉스를 발견했다. 지레 겁을 먹은 조사대원은 그대로 동굴 밖으로 나가 ‘위험한 마물이 산다.’고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로 인해 닉스는 성물과 함께 지하 동굴에 생매장되었다. …무려 300년이 넘도록.

[그러니 달리 방법이 있겠어?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성물을 지나쳐야 했고, 성물을 지나치기 위해선 반드시 신력에 익숙해져야 했지.]

“…애초에 익숙해질 수 있는 건가요?”

[아니, 전혀. 칼에 수백 번 찔린다고 해서 어느 순간 안 아파지는 건 아니잖아? 인내만 늘어날 뿐, 살점이 갉아 먹히는 고통은 늘 새롭지.]

서서히 산소가 부족해져서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느낌일까. 지금의 나로선 그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일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왠지 나까지도 숨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목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결국 성물을 치워 줄 인간을 찾기 위해 이쪽으로 끌어들인 건가요?”

[아니, 신전과 함께 묻힌 성물은 이미 신력을 많이 상실했어. 그 증거로 동굴 밖에서 능력을 행사하는 것쯤은 무리도 아니지.]

“그럼 왜….”

뒷말을 삼키자 닉스는 싱긋 웃으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바위 뒤로 미처 보지 못한 통로가 드러났다. 닉스가 횃불을 갖다 대니 종유석을 지지대 삼아 사방으로 뻗어나간 거미줄이 보였다.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몸을 숙이고 들어가자 마침내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엔 사람 크기만 한 고치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거대한 마물이 잠들어 있었다.

“…닉스?”

[응. 나야.]

저걸 거미라고 해도 되는 걸까. 둥그런 몸통은 자칫 언덕으로 착각할 정도로 커다랬다. 단단한 바위도 아무렇지 않게 잘라 낼 여덟 개의 다리를 보니 섣불리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그의 모습을 살피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거미줄이 칭칭 둘린 앞다리는 왠지 상처를 붕대로 감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촘촘한 거미줄 사이로 무언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길쭉한 형체를 유심히 지켜보던 찰나, 예리하게 반짝이는 끄트머리를 보자마자 저절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게 왜….”

신력이 깃든 창이 왜, 닉스의 몸에 박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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