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 (113/305)

#113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은 유독 좁고 험했다. 결국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려 산을 타고 올라갔다. 약초사나 보따리상이 오가는 통로가 아니었기에, 길들여지지 않은 길은 온갖 자갈과 나무뿌리로 가득했다. 겨우 산 중턱에 들어서자 저 멀리 정갈하게 깎인 바위 계단이 보였다. 얼마나 인적이 드물면, 계단 틈새로 다홍색 들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힘겹게 올라와 고개를 들어보니 언덕을 깎아 만든 드넓은 평지가 보였다.

“여기구나….”

산사태로 무너진 신전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산자락에 걸쳐 다섯 개의 기둥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볼품없는 돌조각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들판을 뛰노는 천사들의 조각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둥그런 하늘을 떠받치는 여인의 팔은 덩굴의 길잡이가 되었고, 춤을 추듯 발끝을 곱게 뻗은 사내의 머리는 벌레의 쉼터가 되었다.

“들풀이랑 이끼뿐이네요.”

“…아무 풀이나 함부로 만지지 말게. 독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네. 명심할게요.”

세월의 흐름을 따라 신전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일까. 아스레인은 어제 말했던 것처럼 신력 때문에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홀로 폐허가 된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이젠 낡은 신전에 작은 단서라도 남아 있긴 할지가 걱정되었다.

“정말 기둥만 멀쩡하네….”

허탈한 한숨이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세잔이 다가왔다.

“그리 쓸모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어, 뭔데요?”

“카르사 제국을 건국하기 전… 선황 유피테르는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르던 그때, 하늘 높이 떠 있던 다섯 개의 별이 땅으로 떨어졌다더군요. 그걸 신의 계시로 삼아 이 땅에 뿌리 내린 겁니다.”

“설마… 그래서 신전 기둥이 다섯인 거예요?”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만, 제국에 있는 신전은 대부분 다섯 개의 기둥을 씁니다.”

결국 신전을 만들어 내는 건 인간이고, 그 인간을 다스리는 건 황제였다. 선황 유피테르가 국교를 정하지 못하게 선언한 것도 결국엔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를 만들지 않으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전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세잔은 정말 많은 분야를 아네요.”

“기도문이 필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학에 대한 지식도 늘어난 것뿐입니다.”

“그럼….”

신전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려다가 불현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다섯 개의 별. 이 단어가 왠지 익숙했다. 그런데 막상 떠올리려니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어디서 들어 봤더라. 분명 아주 중요한 것이었던 것 같은데….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눈만 끔뻑이자 세잔이 어깨를 톡 두드렸다.

“형?”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신도가 별로 없는 신이라 신전까지 방치된 건가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만약 현 황실이 따르는 메디스의 신전이었다면 곧바로 복구되었을 테니까요.”

“인간에게 버려진 신이라….”

끝내 따르는 자가 없어 망가진 신전을 보니 ‘그 마물’이 떠올랐다. 유피테르의 손에 무참히 토벌된 그는 죽은 후에도 이용당하기만 했다.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가호를 주어야 하는 것도, 어느덧 필요가 없어지니 곧바로 버려지는 점에서도- 신과 그 마물은 닮아 있었다.

비바람으로 깎인 기둥을 위로하듯 천천히 쓰다듬다가 손을 거두었다.

“저는 신전 뒤쪽부터 천천히 둘러볼게요. 세잔은 기둥 근처를 살펴 주세요.”

“알겠습니다.”

듬성듬성 놓인 돌을 밟고 올라가다가 무더기로 쌓인 잔해를 발견했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와 흙더미가 엉겨 붙어 둥그런 언덕을 이루었다. 자칫 손을 댔다간 쏟아질 것만 같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당시 사체와 성물을 꺼내지 못한 이유가 이해가 되는 한편,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마법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힘으로는 성인 몇 명이 달라붙어도 옮기기 힘든 바위였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듯 보였다. 비록 언덕을 전부 들어내기 위해서는 유능한 마법사가 여럿 필요하겠지만, 이곳은 다름 아닌 제국이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충분히 잔해를 치우고도 남을 것이다.

역시 진의 말대로 산지 마을이기에 인력을 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일어난 산사태가 무언가를 덮었고, 그게 황실의 목적과 딱 들어맞았다. 그리 생각하니 이 언덕이 마치 묘비 없는 무덤처럼 보였다.

커다란 바위 옆에 쪼그려 앉아 잔해의 틈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벌레 한 마리 기어 나오지 않았다.

과장된 생각인가 싶어 걸음을 돌리려던 차였다.

“……!!”

일순 뒷덜미에서부터 으스스한 오한이 느껴졌다.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에게 뒤를 밟히는 것처럼 긴장감이 온몸을 삼켰다. 이윽고 뼛속까지 으슬으슬 떨리는 한기에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신전마저 무너져 버린 들판에 마땅히 숨을 곳은 없었다.

대체 뭐지?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둥글게 쌓인 잔해를 응시했다. 방금 전과 똑같은 광경이다. 아주 좁은 틈새로 보이는 건 암흑, 그 자체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뭔가 보일까 봐 천천히 언덕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태오.”

“…헉!”

화들짝 놀라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던 걸, 아스레인이 가까스로 잡아 주었다.

“까, 깜짝이야. 무슨 일이세요?”

“오래도록 아무 말이 없으니 걱정이 돼서 왔네.”

“아….”

“낯빛이 창백한데, 괜찮은 건가?”

뒤늦게 마른세수를 하니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어느덧 그의 눈동자에 진심 어린 걱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안 그래도 바쁜 시기에 괜히 짐이 될 수는 없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팔을 쓸어내리자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못한가 보군. 이만 돌아가서 쉬지.”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돌아가면 아깝잖아요.”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 무리하지 말게. 언제든 다시 와도 되니까.”

“…그럴게요.”

다정한 손길이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내 그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신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스레인의 말대로 오한은 단지 피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만 무서운 착각이 들었다.

…잔해 더미 안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

찬바람이 분다. 살을 에는 추위가 폐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니 고운 흙냄새와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피곤해서 저녁 일찍부터 잠들었던 것 같은데, 바깥 냄새가 생생하게 느껴지니 이상한 일이었다.

쌀쌀한 팔을 쓸어내리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태오!”

눈을 번쩍 떠 보니 몽롱한 시야로 일렁이는 횃불이 들어왔다. 그 뒤로 나를 걱정하는 아스레인의 얼굴이, 그 너머로 낮에 올랐던 산자락이 보였다.

“어…?”

슬쩍 고개를 드니 천장이 아니라 무수한 별이 쏟아질 듯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방 안에서 잠들었는데, 어쩌다 밖으로- 그것도 폐허가 된 신전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떡하니 벌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수님. 여긴 대체….”

“그러게 내가 저택에서 쉬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제가 왜 여기 있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가 먼저 내 방으로 찾아온 걸 벌써 잊은 건가?”

“…제가요?”

“신전에 신경 쓰이던 곳이 있으니 다시 조사하러 가자고 했지.”

“…….”

“아예 처음 듣는 반응이군.”

“아뇨. 그게….”

깊은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아스레인의 말을 듣고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봐도 피곤해서 잠든 시점에서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용히 눈만 끔뻑거리자 보다 못한 아스레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태로는 안 되겠군. 여긴 나 혼자 조사할 테니, 자네는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게.”

“네? 혼자요?”

“자네에겐 아그누스가 있으니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아뇨.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가 가면 교수님은요?”

“…신경 쓰지 말게.”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혼자 조사하다가 신력에 닿기라도 한다면 아스레인은 다른 인간들보다 배로 괴로워질 것이다. 물론 신전까지 온 기억이 없는 게 여전히 마음에 걸리지만, 당장 아스레인이 먼저였다.

“저도 같이 조사할게요.”

“낮부터 상태가 나쁘지 않았나. 무리할 필요 없네.”

“한숨 자고 나니까 괜찮아졌어요. 게다가 전처럼 교수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요.”

클라우스의 저택에서 아픈 아스레인을 두고 갔다가 얼마나 후회했던가. 힘들었던 기억이 뇌리에 남아 쉽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올려다보자 아스레인이 깊은 고민 끝에 백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절대 떨어지지 말게.”

“네!”

앞서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물었다.

“어디를 조사하시게요?”

“마법으로 잔해를 치울 생각이네.”

“…괜찮을까요?”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결계를 쳐 뒀으니,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걸세.”

당당한 발걸음은 곧 둥그렇게 쌓인 잔해 앞에서 멈췄다. 곧 아스레인이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횃불을 든 손을 따라 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바위가 하나씩 옆으로 굴러갈 때마다 산 전체가 진동하는 듯했다.

마침내 흙더미까지 완전히 치워 내자 잔해 아래 묻힌 것이 드러났다.

“…이건….”

문이다.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끼이익- 괴상한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뻗어 나가는 계단이었다.

“지하로 가는 입구인가 봐요.”

“…타르타로스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네.”

그 미지의 타르타로스와 닿은 마지막 입구가 설마 신전에 있을 줄은 몰랐다. 섣불리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 앞에서 주춤거리자 아스레인이 먼저 내려갔다.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으니 주변은 금세 짙은 어둠으로 빠졌다.

“계단이 미끄러우니 발밑을 조심하게.”

아스레인의 말에 슬쩍 시선을 내려 보니 이끼 낀 돌계단이 가득했다. 실수로라도 미끄러졌다가는 살갗이 가차 없이 찢어질 게 확실했다. 하나뿐인 횃불과 듬직한 등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디뎠다.

“처음 신전을 지을 때부터 비밀 통로를 설계한 거겠죠?”

“그렇겠지.”

“대체 왜 다른 입구는 막아 두고, 비밀 문 따윌… 그것도 신전에 만들어 둔 걸까요?”

같은 의문이 들었는지,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얼마쯤 내려왔을까.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깊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산소 부족인가 싶어 차분히 숨을 고르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음?”

“…아, 아니에요.”

슬슬 몸까지 무거워지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끄떡없어 보였다. 왠지 나만 이상해진 것 같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신력에 당한 사람은 어떻게 치료하나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괜찮아지네.”

“그럼 다행이네요.”

“하지만… 마물에겐 치명적이지.”

오늘만큼은 반갑지 않은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마물…이요?”

“짙은 신력에 둘러싸이는 순간, 그 어떤 마물이라 해도 제힘을 다 쓸 수는 없네. 그러니 마물을 붙잡는데 신력만큼 강력한 족쇄는 없지.”

일전에 아스레인은 타르타로스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강한 마물이라면 더더욱 신력을 버틸 수 없으리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꼭 타르타로스 안에 신력으로 붙잡힌 마물이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여기에 누군가 살고 있을까요?”

반신반의하며 묻자 아스레인은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놨다.

“어둠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아무리 빛이 밝다 한들 그림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죽음을 단정 지을 수 있겠나.”

어둠, 그림자, 죽음. 모든 단어가 ‘밤의 주인’이라 불리는 닉스를 연상시켰다. 최악의 경우가 일어나질 않길 바라면서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떠나질 않았다. 나도 모르게 오싹해진 몸을 떨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만약 마물이 여기 살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성물을 회수해야겠네요.”

이번에도 아스레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몇 계단쯤 더 내려간 후에야,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의미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스레인이 난데없이 허공을 가리켰다.

“저 앞에 뭔가 보이는군.”

“네?”

그러곤 예고 없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놓칠 순 없어 무리하게 뒤쫓았으나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저 멀리 바닥에 일렁이는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 않은 저것은 분명- 고해소에 있던 성물이 내뿜던 광채였다.

“교수님!”

더 이상 가까이 가면 안 된다. 다급하게 부르자 아스레인은 다행히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그를 막으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저 앞에 성물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왜?”

“왜라뇨. 분명 교수님께 흐르는 마력과 충돌할 거예요.”

“서둘러 성물을 회수해야 한다고 말한 건 자네 아닌가.”

“그, 그건 맞지만….”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스레인이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그를 따라가다가 그만,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하고 성급히 발을 내디뎠다.

“윽!”

발목이 삐끗하는 바람에 제자리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겨우 벽을 짚고 서자 저만치 멀어져 있던 아스레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드디어 붙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심하던 그때였다.

“유태오. 괜찮나?”

“네. 괜찮….”

“그러게 발밑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일순 머리에 있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목소리도, 얼굴도, 나를 걱정하는 말투까지도 똑같은데-

“다친 곳은 없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스레인이 아닌 것 같다.

“교수님. 방금….”

“왜 그러나.”

“방금 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그게 무슨 소린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무에게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교수님이 제 성을 어떻게 아세요?”

…내 진짜 이름을.

방에서 잠든 내가 신전에서 정신 차린 순간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스레인이라서, 심지어 아그누스에 대해 알고 있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을 혼자 두고 가라기에 조급해진 나머지 일말의 의심을 버리고 따라붙은 게 실수였다.

이제야 왜 아스레인이 지하 계단으로 들어선 후부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는지 알겠다.

“당신, 아스레인이 아니구나.”

잔뜩 날이 선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감정의 동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심한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가더니 끝내 길쭉한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횃불에 비친 황금색 눈동자가 테두리에서부터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런…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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