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112/305)

#112

출발하는 순간부터 마을에 들어설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아스레인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리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 있자 아스레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말에 타서도 멀미를 하는 줄은 몰랐네. …괜찮나?”

“네에, 괜찮아요.”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멀미로 보인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저만치 빠져나갔던 혼이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을을 거니는 내내 승마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갑자기 눈앞으로 손이 튀어나왔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지.”

“아니에요! 어서 가죠. 어느 집이에요?”

황급히 손길을 거부하자 아스레인이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쪽일세.”

그의 시선 끝엔 빨간 지붕이 눈에 띄는 집이 있었다. 아담한 울타리를 지나 마당에 있는 소나무에 말을 묶어 두는 그때 집 문이 열렸다. 갈색 머리를 길게 땋은 소녀가 아스레인을 경계하듯 흘겨보았다.

“누구…세요?”

“서신을 받지 않았나?”

아스레인의 물음에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교수님이시군요!”

“그러는 자네는 누구지?”

“저는 딸이에요. 설마 교수님께서 이렇게 빨리 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정말로 감사해요.”

수심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에 드디어 생기가 돌았다. 기쁘게 맞이하던 소녀는 뒤늦게 곤죽이 된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분은 괜찮으신 건가요? 안색이 너무 창백하신데….”

“아, 하하… 실례지만,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어서 들어오세요.”

소녀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가정집처럼 소박한 집 곳곳에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얌전히 기다리니 소녀가 작은 컵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왔다. 며칠간 사막을 헤맨 사람처럼 벌컥 들이마시자 숨통이 탁 트였다.

“고마워요.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대접할 게 없어서 죄송할 뿐인걸요.”

“아버님께서는 어떠신가요?”

“윗방에 누워 계세요.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지만, 저나 어머니가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어요. …마치 눈을 뜬 채로 주무시는 것처럼 줄곧 멍한 상태예요.”

안타깝게도 편지를 받았을 때보다 병세가 호전되진 않은 모양이다. 조용히 집안을 둘러보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그때 입고 있던 옷은 어디 있나?”

“아, 말씀하신 대로 빨지 않고 그대로 보관해 뒀어요.”

“그럼 상태를 직접 보기 전에 옷부터 확인하지.”

“네! 잠시만요.”

소녀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더니 나무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안에는 축축한 옷가지와 해진 신발이 들어있었다. 특히 신발 밑창엔 입자가 두꺼운 모래가 끼어 있었고, 낡은 앞코에는 메마른 이끼가 붙어 있었다. 여러 편지에 쓰인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떤가요?”

“이것만 봐선 아직 모르겠군. 그를 직접 봐야겠네.”

“그렇군요…. 천장이 낮으니 조심하세요.”

어깨가 축 처진 소녀는 앞서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안내했다. 좁은 방 안엔 침대와 의자, 그리고 옷을 걸어 둘 행거가 전부였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내는 곤히 잠든 채였고, 그 곁에서는 앙상한 사내의 손을 붙잡은 여인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크흠! 소녀가 헛기침을 한 후에야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아, 오셨군요. …미천한 몸으로라도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은 고된 병간호로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바짝 메마른 입술과 야윈 뺨이 안쓰럽기만 했다. 비틀거리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소녀가 다가가 여인을 부축했다.

“이분들은 제가 대접할 테니 잠시 쉬고 계세요. 어제부터 계속 못 주무셨잖아요.”

“미안하구나.”

여인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따님 말대로 어서 쉬세요.”

문득 여인의 손에 들린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얇은 가죽끈에 코끼리 상아같이 뾰족한 장식물이 매달려 있었다. 부인은 그 목걸이를 묵주처럼 소중하게 쥐고 아스레인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 남편을….”

콜록. 쇤 기침 소리가 방 안에 묵직하게 울렸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품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내어 여인에게 건넸다.

“이건….”

“은자나무 뿌리를 달인 약이네. 허한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걸세.”

“어, 어찌 이런 귀한 걸….”

“천천히 마신 후에 잠깐 눈을 붙이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가 여인을 부축해서 내려간 사이, 아스레인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이윽고 소녀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마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목에 있는 상처는 뭐지?”

“어젯밤에 그… 기저귀를 갈아 드리려고 방에 들어왔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목을 벅벅 긁으시더라고요. 다행히 금방 멈췄지만, 얼마나 세게 긁으셨는지… 상처가 남아 버렸어요.”

간밤에 또 다른 이상 증세를 보였다, 라. 이유를 모르는 지금으로선 어떤 판단도 쉽사리 내릴 수 없었다. 방해되지 않게 벽에 딱 붙어 서 있으니 소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소녀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살폈다.

“…괜찮으신 거겠죠?”

“그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녀가 맞잡은 양손을 가슴에 대니 소맷자락이 스르르 내려갔다. 가는 손목에 익숙한 팔찌가 보였다. 방금 전에 나간 부인이 들고 있던 목걸이와 생김새가 똑같았다. 혹시나 하고 침상을 돌아보니, 역시나 환자도 목에 같은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그 팔찌는 뭐예요? 가족들이 비슷한 장식을 차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이거요? 아버지께서는 이 일대에서 꽤나 유명한 조각가셨거든요. 그래서 만들어 주셨어요.”

선뜻 팔찌를 보여 준 덕분에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죽끈에 매달린 장식물은 거친 돌의 표면을 부드럽게 깎아 만든 모형이었다. 그 뾰족한 원뿔에 마을 사람들만 아는 의미가 있나 고민하던 찰나, 소녀가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혹시 몰라서 지니고 다녀요. 그분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분이라면….”

“이 날렵한 창날은 그분의 상징이에요. 사제님께서 악한 것을 물리쳐 주신다고 했어요.”

상아 같기도, 화살촉 같기도 한 장식물은 다름 아닌 창날이었다.

“사제요? 대체 어떤….”

정체를 물어보려는 순간,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상태가 걱정됐던 소녀는 서둘러 아스레인에게 다가갔다.

“어떤가요?”

“용액으로 확인해 봤지만, 확실히 약초 중독은 아닐세.”

“그럼 다른 이유인가요?”

환자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으로 들어간 듯 깊어졌다. 살짝 벌어졌다가 다문 입술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레인이 대답하길 망설이고 있었다. 예상 못한 반응에 서둘러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마물에게 현혹된 흔적도 없고, 마법의 잔재가 느껴지지도 않네.”

“네? 그럼 대체 이유가 뭐죠?”

가지런한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침묵이 길어진 만큼 불안은 물에 불린 솜처럼 무거워져 갔다. 끝내 아스레인은 이마를 짚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르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환자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유를 모르겠군.”

아스레인도 알지 못한다니- 이건 절망이 드리운 선고였다.

***

새벽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름대로 활기차던 분위기는 저녁 어스름과 함께 침울해졌다.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침묵을 깼다.

“두 분이 다녀오셨던 곳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죠?”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리스가 대답했다.

“응. 그쪽은?”

“똑같아요. 교수님께서 직접 보셨으니 확실해요.”

“진짜 이상하네…. 혹시 몰라서 마석도 가까이 대 봤거든? 근데 별 반응이 없었어.”

사이누르의 마력이 담긴 마석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쪽도 마물의 소행일 확률은 극히 적다. 다른 곳에서나마 진전이 있기를 바랐건만, 희망은 무색하게 사라졌다.

마지막 가능성을 걸고 방금 막 들어온 진에게 물었다.

“진은 어땠어요?”

“그래도 상태는 많이 호전됐어요. 조금씩이지만, 스스로 식사도 하세요.”

“…다행이네요. 다른 분들도 시간이 흐르면 차차 나아지는 걸까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전히 기억은 못하세요.”

의식이 회복하고 몸도 평소대로 가누지만… 가장 중요한 기억만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왜? 마법도, 독초도, 마물도 아니라면 어떤 이유가 남아 있단 말인가. 미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방이 벽으로 콱 막힌 기분이었다.

그때 세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리스.”

“왜 불러. …요?”

“받아 온 게 있지 않습니까.”

“아, 맞다. 오늘 갔던 집에서 이걸 가져왔어. 뭔가 도움이 될까 했는데….”

아이리스는 바지 주머니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장식품을 꺼냈다. 예리한 모서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리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목을 붙잡고 가까이서 보니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건…!”

“뭐, 뭐야?”

“제가 본 가족들도 이걸 몸에 지니고 있었어요. 분명 ‘그분’의 상징이라고….”

장식물을 만든 재료는 달라도 모양은 똑같았다. 갑작스러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뾰족한 원뿔을 바라보던 아이리스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거기도 있었다고?”

“혹시 뭔지 아세요?”

“아주 잘 알지. 물론 귀하신 분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돈 없는 평민들은 이런 거라도 만들어서 신의 가호를 받고 싶어 하거든.”

소녀가 말한 ‘그분’은 역시 신이었다. 문득 심각해진 아이리스는 이미 원뿔 모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의 손목을 놓아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신인데요?”

“더러는 창날, 더러는 사자의 송곳니라고 하지.”

“설마….”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어?”

아이리스는 원뿔의 끄트머리를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레톤 신의 창이 그대를 향하지 않기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물의 그림자를 봤다는 소문을 조사하기 위해 레톤 신전으로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카르 신관은 푸른 옷자락을 펄럭이며 우리에게 그리 말했었다. 여느 신의 사제처럼 가호를 빌어 주지 않기에 뇌리에 박혔던 인사말이었다.

“레톤 신이라면… 시오 왕조의 국교 맞죠?”

“뭐,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한데….”

아이리스가 망설이듯 입술을 비죽거리자 세잔이 대신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카르사 제국에 국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 맞다. 그랬었죠.”

건국 왕 유피테르가 국교를 정할 수 없게 선언했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시오 왕조는 전쟁의 신 ‘레톤’을, 에브게니아 왕조는 지혜의 신 ‘메티스’를 따랐는데도 국교는 만들지 못했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이리스가 곧장 반박했다.

“하지만 시오 왕조가 대대로 믿던 신은 맞지. 그리고… 그 망할 놈이 믿었던 신이고.”

갑작스럽게 정보가 들어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산지 마을에, 그것도 사건이 일어난 마을 사이의 새로운 접점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얼마 전까지 클라우스 사건과 연루되었던 레톤 신이었다.

“진. 원래 마을 사람들이 레톤 신을 믿었어요?”

“…아뇨. 저도 저게 신의 상징인지는 처음 알았어요.”

“그럼 단순한 우연인가….”

이내 아이리스가 목걸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진은 모를 만도 해. 얘길 들어 보니 1년 전에 사제 하나가 마을에 와서 의료 봉사를 했대. 그러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제님, 사제님- 하면서 따르는 거지.”

그 말을 듣자마자 소녀가 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이 날렵한 창날은 그분의 상징이에요. 사제님께서 악한 것을 물리쳐 주신다고 했어요.’

아마도 같은 사제겠지. 한 사람이 산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레톤 신을 설파했을 것이다. 거기까진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신을 믿지 않은 내겐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게 쉽게 신을 믿어요?”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한테는 영혼의 구원보다 눈앞의 도움이 절실하니까.”

“아….”

“게다가 궂은 일손까지 도와주니 꽤나 친숙하게 다가왔나 봅니다.”

세잔의 말까지 더해지니 조금씩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 혹시 산사태로 무너진 신전도….”

“아닙니다. 확인해 보니 레톤 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당연히 아니지. 그 신전이 지어진 건 왕조가 바뀌고 나서야. 아무리 국교가 없다지만, 뭐가 좋다고 에브게니아 황실에서 시오 왕조 때 믿던 신의 신전을 지어 주겠어?”

불현듯 거의 무너져 가던 레톤 신전과 그 앞에 서 있던 낡은 사자 석상이 떠올랐다. 황실 근처에 있는 신전마저도 신도가 없어 보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암암리에 배척당하는 신전을 에브게니아 황실에서 손수 지어 줄 리 만무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아이리스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근데 이거 얘기해서 뭐 하냐? 정작 사람들이 왜 그렇게는 됐는지를 모르는데.”

그의 말에 머릿속으로 타임라인을 정리했다.

병사들의 통로로 사용되던 동굴 ‘타르타로스’가 전쟁이 끝나며 쓰임을 다했다. 과거를 청산하고 싶었던 에브게니아 황제는 동굴의 입구를 전부 막아 버리고, 그 위에 신전을 세웠다. 그 후로 폭우가 내려 산사태가 신전을 덮쳤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캄페 산 일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정신 착란을 앓았고, 그 중심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타르타로스’가 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레톤의 사제가 산지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확실히 아직까진 사건과 연결점은 없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다리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때였다.

무거운 침묵 아래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무슨 일이세요?”

아스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폐허가 된 신전 위에 비숍을 올려놓았다.

“어쩌면 신력에 당한 걸지도 모르네.”

“네? 신력에 당한다니, …그게 가능한가요?”

이해하지 못한 나와 달리 세잔과 아이리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냐. 신력에 노출되는 순간, 최악의 경우 기절하기도 해.”

“기절을 한다고요?”

“…비슷한 전설도 있습니다. 과거 신께서 신전으로 현신했을 때, 거기 있는 모두가 미치광이가 되었답니다. 그때 유일하게 신의 광채를 버틴 자가 대사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죠.”

신력. 예전에 레톤 신전의 고해소로 들어가며 성물을 본 적이 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성물이 내뿜는 신력에 억눌리는 듯했다. 그것에 감히 닿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보다 강한 신력이라면….

“하지만 저 신전은 무너진 후로 사제와 신도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신력이 유지되진 않을 텐데요.”

“기도가 아닌, 성물이라면 충분하네.”

“성물이라니….”

“무너진 후로 사체를 수습했다는 기록이 없네. 그 말은 즉, 신전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성물도 회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네.”

산사태로 인해 신전이 무너지면서 성물이 지하의 타르타로스로 흘러갔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 동굴로 간 사람들이 강한 신력에 억눌려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다.

아주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설이 참이 되려면, 반드시 입증되어야 할 전제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스스로 타르타로스로 갔을까요? 아니, 입구가 남아 있는 걸까요?”

“그걸 이제부터 알아내야겠지. 지금으로선 다른 가능성이 없네.”

타르타로스에 성물이 존재한다고 가정한 이상, 입구를 찾아 들어가야만 했다.

“우선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신전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저도 가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잔이 동조하고 일어서자 아이리스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럼 난 다른 마을로 가 볼게. 이제 레톤 신이라면 질색이거든.”

“저도 아이리스를 따라갈게요.”

긴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레인이 여전히 지도 앞에 머물러 있었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차가운 옆얼굴을 보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신력은 마력을 밀어낸다. 그래서 신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모든 마법이 풀려나고, 마물 또한 가까이 가길 꺼린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까지도 삼켜 버리는 신력이다. 다른 이보다 마력이 월등히 많은 아스레인에게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음?”

“신력은 마력과 충돌된다고 들었어요. 그럼 혹시 몸에 무리가….”

“폐허가 된 신전이라면 괜찮을 걸세.”

아스레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른 쉬라고 말하며 돌아가는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신이라….”

또 다시 나타난 레톤 신. 그 뒤에 드리운 사자의 그림자.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오늘따라 날카롭게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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