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심지어 나는 새우도 아니고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미역이 되어 둘 사이에서 흐물거릴 뿐이다. 한쪽은 소중해 마지않는 교수고 한쪽은 무려 태자다. 냉큼 아스레인에게 가면 칼리온이 무안해지고, 섣불리 칼리온을 변호했다가는 아스레인이 곤란해진다.
“아벨.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칼리온이 한껏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옆얼굴로 날아오는 시선에 조만간 뺨이 타 버릴 것 같다. 함부로 눈길을 돌릴 수 없어 잔뜩 긴장한 나머지 바짝 굳어 있기만 했다. 그러자 칼리온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이 보면 내가 이 아이를 괴롭힌 줄 알겠어요.”
“…….”
“아닌가? 괴롭힌 건가?”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걸까. 그냥 아무 일 없었다고 하면 되잖아. 그리고 실제로 별일 없었잖아…! 괜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말에 저절로 입술이 툭 벌어졌다. 이윽고 칼리온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말해 봐. 태오. 누가 널 잡아먹기라도 했니?”
아…. 그냥 즐기고 있는 거구나. 당황해서 멍청해진 내 반응을? 아니면, 아스레인의 무서운 얼굴을? 둘 중 정답이 무엇이든 나는 죽을 맛이다. 반쯤 영혼이 나간 상태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어느새 소파 옆으로 다가온 아스레인이 칼리온의 팔을 턱 붙잡았다.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생기거든, 저를 거치기로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랬나요?”
“…전하.”
“후후, 장난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태오를 만나고 싶다고 말해도, 계속 안 된다고 막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아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 미리 전해 주지 그랬어요?”
이곳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예전에도 술자리에서 교수님끼리 말다툼이 오고 가 식은땀 흘려 가며 겨우 말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몇만 배는 더 숨 막혔다. 이대로 칼리온과 아스레인 사이에 계속 껴 있다가는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질 것만 같았다.
짧은 고민 끝에 미꾸라지처럼 칼리온의 품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응?”
곧바로 날아오는 두 쌍의 시선에 다짜고짜 머리부터 숙였다.
“제가 눈치 없이 계속 있었네요. 밖에서 기다릴 테니 두 분 편히 말씀 나누세요.”
정중히 인사도 끝냈으니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벌컥 열자 앞을 지키고 있던 장정의 기사가 나를 흘겨보았다. 멋쩍게 목례를 하며 거리를 두자 무심한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그 후로 얼마쯤 지났을까. 벌 받는 학생처럼 꼿꼿이 서 있던 와중에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문을 돌아보니 다시금 로브를 뒤집어쓴 칼리온이 나왔다.
“오래 안 기다렸지?”
“전혀요. 벌써 얘기가 끝난 거예요?”
“얘기는 무슨~ 잔소리만 잔뜩 하기에 도망쳤지.”
칼리온은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에 반해 뒤따라 나온 아스레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건지 문득 궁금해져서 은근히 물었다.
“…잔소리요?”
슬쩍 아스레인의 눈치를 살피자 칼리온은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곤 바로 옆에 있는 기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난 아벨이 저렇게 화난 건 처음 봐.”
“어….”
“봐. 또 노려본다.”
장난기가 잔뜩 밴 하늘색 눈동자가 옆을 가리켰다. 굳이 눈짓을 따라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칼리온이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부터 내 뒤통수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칼리온은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아, 이제 가야겠다. 이러다 또 한소리 듣겠어.”
“…아… 하하….”
“잘 있어. 태오. 다음에 만나면, 네가 직접 타 준 차를 마시고 싶어.”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성심성의껏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미련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칼리온은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그가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한없이 위압적이다가도 또 어떨 때 보면 악동 같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태자, 그 자신만 알겠지. 어떻게든 아군을 많이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황실이다. 남이 타 준 차를 마시지 못하는 것도, 늘 웃음을 짓고 있는 것도 치열한 환경이 만들어 낸 습관에 불과하겠지.
눈치를 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건 평민이나 태자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꽤 많은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만나서 그 점을 노린다면, 충분히….
“태오.”
“아, 네! 들어갈게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아스레인을 보곤 냉큼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아스레인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꼼꼼히 나를 살펴보는 시선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그 와중에도 ‘아스레인이 칼리온보다 손이 크구나.’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나도 참….
“아무 일 없었나?”
“하하, 전부 들으셨잖아요.”
씩씩하게 웃자 날카로운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말없이 한숨만 쉬는 걸 보니, 갑자기 연락을 받아 제법 놀란 모양이다. 왠지 미안해져서 어깨를 붙잡은 팔을 가볍게 토닥이며 물었다.
“수업은 잘 끝내고 오신 거예요?”
“…….”
“교수님?”
“잘, 끝내고 왔지.”
“다행이네요. 저는 혹시 교수님께서….”
“비록 시간을 다 안 채우고 수업을 끝냈지만.”
“네?”
잠깐만. 지금 뭐라고? 아스레인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왔다고? 나 때문에?
바로 그때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대앵, 대앵, 대앵- 본관 앞 시계탑에서 울리는 종이 이토록 크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금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지, 진짜예요?”
“…그래.”
“아니, 그게… 죄송해요. 설마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또 한 번의 깊은 한숨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지. 자네는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주는데, 왜 나는….”
아스레인은 뒷말을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쩐지 불안해 보여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초조해지기만 하는 건지.”
귓등을 간질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
캄페 산으로 출발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 아스레인은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 바쁘게 움직였다. 그사이 나는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기록이 더 남아 있을까 봐 도서관을 전전했다.
하지만 마땅한 정보는 찾지 못했다. ‘타르타로스’가 산사태와 함께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혔는지 알 수 있었다. 안에 어떤 생명체가 사는지,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일단… 연구실로 돌아가야겠다.”
도서관에서 읽던 책을 빌려서 연구실로 향했다. 마침 아스레인이 회의를 끝내고 올 시간이었다. 일정을 물어보려고 문을 여는 순간,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마주쳐 화들짝 놀랐다.
“이제 오냐?”
가볍게 손을 흔드는 아이리스부터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진과 세잔까지. 지금쯤 수업이 끝나 쉬고 있어야 할 이들이 보란 듯이 모여 있으니 반가움보다도 의아함이 앞섰다.
“어? 다들 무슨 일이에요?”
“캄페 산 조사 때문에.”
“아….”
얼마 전, 캄페 산 일대의 조사에 함께할지 말지를 정하라고 말미를 주었었다. 바로 오늘이 결정을 마치는 날인가 보다. 깃펜을 탁, 하고 내려놓은 아스레인이 말했다.
“그래서 생각은 해 봤나?”
정적이 맴도는 방 안에서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세잔이었다.
“그날 바로 본가로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반대하실 테니까요.”
“그래서?”
“…그래도 가고 싶습니다. 언제까지고 아버지의 그늘 아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결의에 찬 남색 눈동자는 가문 걱정으로 망설이던 그날과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아스레인은 재차 선택을 거둘 기회를 주었다.
“자네를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걸세.”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제 성장을 위해 동행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모든 위험 부담을 혼자 떠안아야 한대도?”
“예. 학교 측에 피해가 갈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태도에 아스레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준비하마.”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시 깃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던 아스레인이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자네는?”
“덤처럼 얘기하지 말아 주실래요?”
인상을 와락 찌푸린 아이리스는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잃을 게 없거든요.”
“…그리 나올 줄 알았지.”
“게다가 저놈만 보내기엔 또 무리할까 봐 걱정이라서요.”
저놈?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뒤늦게 입 모양으로 ‘저요?’ 하고 물으니 진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윽고 아이리스가 쐐기를 박듯 고갯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진짜 저 말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서 무리하는 놈이 너 말고 또 있냐?”
“아니….”
급히 변명하려던 차에 혀를 차는 소리가 맥을 뚝 끊었다.
“잡담은 이만하게.”
아무리 억울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레인은 둥글게 말린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에 펼쳤다. 지금까지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폐허가 된 신전까지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중 아스레인은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원이 충분하니 세 지점으로 나눠서 조사할 예정이네. 사건이 일어난 지점끼리는 그리 멀지 않으니, 조사가 끝나면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지. 우선 진은….”
“저는 아저씨가 계신 마을로 가고 싶어요. 이미 지리를 아니까 혼자서도 괜찮아요.”
“음. 그럼 진은 고향으로 가고…. 나와 태오는 가장 최근에 사건이 일어난 쪽으로 가겠네.”
아스레인이 가리킨 곳엔 폐허가 된 신전과 꽤나 가까운 마을이 있었다. 먼저 피해자 조사가 끝나면 신전을 직접 가 보는 편이 좋겠다.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는 사이, 아스레인은 빠르게 다음 장소를 지시했다.
“그리고 세잔 경과 아이리스는 산 중턱의 마을로 가게나. 직접 학교로 와서 편지를 준 여인이 사는 곳이네. 아마 조사에 누구보다 친절히 협력해 줄 걸세.”
합당한 이유와 그렇지 못한 조합이었다. 나도 모르게 세잔과 아이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아이리스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고, 세잔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내 아이리스가 엄지로 세잔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저랑 이… 이… 세잔 경이랑 둘이 가라고요?”
“무슨 문제 있나?”
“그… 아닙니다.”
아이리스는 입을 꾹 다물며 애써 할 말을 참았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세잔이 체념한 투로 말했다.
“그럼 날짜가 정해지면 마차를 타고 출발하는 겁니까?”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아스레인이 지도를 길게 가로질러 남동쪽을 가리켰다.
“황성으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