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과연 타르타로스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예상대로 마물일지, 폐허가 된 신전에 묻힌 마법일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약초일지는- 직접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피해자를 발견한 곳으로 가 보는 게 좋겠어요.”
“나도 동감이야. 편지만으로는 너무 부족해.”
아이리스의 말에 세잔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진이 아이리스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괜찮겠어?”
“뭐가?”
“나랑 태오는 그렇다 쳐도, 아이리스는 학생이잖아. 세잔 경도 그렇고.”
“학생인 게 왜.”
“진짜 몰라서 그래? 오랫동안 수업에 결석하면 졸업에 지장 생길지도 몰라.”
“아~”
퍽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아이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교수님께 적당히 아프다고 둘러대지, 뭐.”
꾀병이라니. 참으로 그다운 대답이었다. 가만히 있던 세잔은 사뭇 당황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리스를 흘겨보았다. 그사이 나는 본능적으로 아스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아스레인은 아이리스의 당당한 태도가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말인가?”
아스레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잠시 망설이던 아이리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 지도 교수님은 아니시잖아요.”
“출석 증빙 서류는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네.”
“뭐예요. 그럼 그냥….”
“하지만 자네가 가야 할 필요가 있나?”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러 간 쐐기가 아이리스의 정곡에 박혔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분위기에 숨을 내뱉기도 조심스러워졌다. 아이리스가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는데도, 아스레인은 아랑곳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대답해 보게. 아이리스. 이유가 뭔가.”
“…….”
“흔히 말하는 우정인가? 아니면, 영웅 심리?”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이건 단순한 현지 관찰이 아니네. 위험에 대한 책임은 전부 자네에게 있지. 그러니 확실한 목적의식 없는 자네와 동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아이리스는 할 말을 잃은 듯 주춤했다. 뒤이어 날카로운 눈동자가 세잔을 향했다.
“세잔 경도 마찬가지네. 내가 무슨 말을 할진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다른 학생들보다 많은 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세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피아트 후작가의 유일한 적장자다. 만약 이번 사건 조사에서 큰 사고라도 당한다면, 가문에 어떤 파문이 미칠지 모른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기에 세잔은 신중하게 말을 아꼈다.
더 이상 말이 없자 아스레인은 책상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서류 구비는 일주일도 안 걸릴 테니, 충분히 고민한 후에 나를 찾아오게. 진은 바인하르 교수와 알아서 얘기하고.”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럼 이만 연구실을 비워 주겠나.”
표현이 다소 무심하긴 해도, 아스레인이 진정 그들을 위해 한 말임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금세 고요해진 연구실에서 아스레인은 묵묵히 서류 처리를 시작했다. 테이블에 펼쳐 놓은 지도와 메모를 정리하다 말고 불현듯 뇌리에 스친 생각을 물었다.
“교수님. 혹시… 닉스에 대해 아세요?”
사각사각. 예리한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던 소리가 우뚝 멈췄다.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나.”
“조사하다가 찾았어요. 이번 사건이 닉스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글쎄. 닉스가 나타나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네. 다른 마물처럼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닐세.”
“네? 그럼….”
“시신이 쌓인 곳에 벌레가 꼬이듯 피비린내가 가득한 곳에 닉스가 태어나지. 햇빛도, 일용한 양식도 필요 없네. …오로지 절망을 먹고 사는 마물이니까.”
소름끼치는 표현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군다나 근처에 신전이 있었기에 닉스만 한 마물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네. 설령 동굴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곳을 고집할 이유는 없지.”
“확실히…. 무너진 신전이라 하더라도 신력은 충분히 남아 있겠죠.”
“그래. 하지만…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생각에 잠긴 눈동자는 일순 초점을 잃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아니, 없길 바라네.”
***
지하 동굴, 타르타로스.
본디 ‘지옥’이라 불린 이유는 동굴 안에 살고 있던 무수한 마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효율적인 병력 이동이라는 명목하에 동굴에 살던 마물을 전부 내쫓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시오 왕조의 과거를 청산하듯 모든 동굴 입구를 막고 신전을 세웠다. 하지만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 그곳을 지키던 사제와 신도는 무참히 신의 곁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타르타로스’는 그 이름을 따라 기억 속의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동굴 안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라….”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서적을 어렵게 찾았지만, 겨우 한 문단이 끝이었다.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의 말대로 근처에 사는 마을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동굴이었으니까.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던 그때였다. 연구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아스레인이 수업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인데, 누가 한 발 앞서 도착했다. 아무렴 손님이겠거니, 읽던 책을 덮어 두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
하지만 연구실로 찾아온 사람은 허리춤에 검을 찬 장정이었다.
“…누구시죠?”
금세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니 장정은 말없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거대한 덩치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탓에 정체를 파악할 순 없었으나, 호위를 대동한 걸 보곤 불안한 낌새가 엄습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호선을 그린 입매가 얼핏 스쳤다.
“…당신은….”
“오랜만이야. 들어가도 되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연스레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아하게 로브를 벗으니 가지런히 정리된 회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나를 향한 하늘빛 눈동자를 보자마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공식 석상도 아닌데, 일일이 무릎 꿇을 필요 없어.”
“…….”
“한 번 더 말할까?”
“아닙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 칼리온이 벗어 둔 로브를 들었다. 로브가 구겨지지 않도록 정리하는 내내 머릿속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대체 왜 온 거지? 어제 전령을 보냈으면, 그걸로 끝난 거 아닌가? 아스레인이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동안에 단둘이 있어야 하는 거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최대한 차분한 태도로 응대했다.
“교수님께선 아직 수업 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럼 더 좋고.”
“…예?”
“난 너를 만나러 온 거거든. 태오.”
어렵게 유지한 평정이 단숨에 깨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니 칼리온이 싱긋 웃었다. 저 미소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을 숨기고 왔는지 불안할 뿐이었다. 지금은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숨겨야만 했다.
“차를 내어 드릴까요? 당장 준비된 건 없지만….”
“아니, 괜찮아. 웬만해서 남이 타 준 차는 입에 잘 안대거든.”
“…아.”
“어릴 때 죽을 뻔했던 후로 생긴 버릇이야.”
언제 아스레인이 돌아올지 모른다. 갑자기 태자와 있는 모습을 보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결국 자연스레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척, 귀걸이로 마력을 주입했다. 귓가에 울리는 공명을 확인하곤 다시 칼리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제법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안 놀라네?”
“곧 보자고 하셨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더 일찍 올 걸 그랬어.”
맞은편에 앉아서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너도 소문은 들었겠지. 여긴 제국에서도 마물에 관한 소식이 가장 빠른 곳이니까.”
“…캄페 산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 말씀이십니까?”
“응. 벌써 조사를 시작한 모양이네.”
재빠른 눈동자가 어깨 너머의 책상을 흘겨보았다. 망할.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는 바람에 ‘타르타로스’ 관련 서적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저 정도는 칼리온도 예상한 바였을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할게. 명령이라고 하면 너무 빡빡하잖아?”
“말씀하세요.”
“그 소문에 대해 알아봐 줬으면 해.”
“…이미 연구실로 전령을 보내신 것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아벨이 아니라 네게서 보고를 들을 작정이거든.”
“…예?”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에 반해 칼리온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난 네게 아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단다. 태오.”
“영광입니다만, 저는 전하께서 기대하실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말꼬리를 길게 늘인 칼리온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내 표정을 꼼꼼히 뜯어보는 시선은 속내를 전부 꿰뚫고 있는 듯했다.
“설마 내가 그간의 일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황실 조사단이 실패한 죄인 클라우스의 입을 열게 했잖아? 게다가 그토록 골치 아팠던 오케아노스를 잠재운 것도 너였다지.”
“그건….”
“아벨이 직접 거둔 제자이자, 중대한 사건마다 공을 세우는 너를… 어떻게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
잠깐. 오케아노스와 관련된 일을 어떻게 안 거지? 설마 페르가몬에서 전부 말해 버린 건가. 당최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당장 뭘 하겠다고 온 건 아니야.”
테이블 하나만큼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왠지 그의 손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아직 태자는 내가 마물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제 와서 페이스에 휘둘릴 수는 없다. 긴장감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사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울게.”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바로 잡힐 것이다. 괜히 머리를 썼다가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 사람을 대할 땐 눈치 없는 목각 인형이 되거나….
“…캄페 산으로 갈 수 있는 이동 수단이 필요합니다.”
“좋아. 마차면 충분하니?”
“아뇨.”
아예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다.
“이동 마법진을 제공해 주십시오.”
“…응?”
줄곧 웃고 있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게 쾌조를 알리는 신호일지, 내 목을 스스로 조르는 짓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손을 꽉 맞잡으며 단호한 투로 말을 이었다.
“위치가 고정되어 있으며 마력만 충분하다면, 그 까다로운 이동 마법도 계속해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충분한 마석을 갖고 계시고, 이동 마법의 원리에 대해서도 아시는 전하께서… 설마 드넓은 대륙을 다스리기 위해 힘겹게 마차를 타고 다니시는 건 아니겠지요.”
분명 태자궁엔 아스레인의 저택과 이어진 것 외에도 전국 각지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온 태자가 그 방법을 쓰지 않았을 리 없다.
오랜 정적 끝에 그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벨이 알려 주던?”
“아뇨. 그의 입이 무거운 건, 전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풉,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호탕한 웃음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아~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
오직 나를 파악하기 위해 매섭기만 하던 눈동자가 곧 번뜩하고 빛났다.
“어때? 태오. 대학 생활은 그만두고, 아예 내 수하가 되는 건?”
“만민이 폐하를 따르고, 이제 폐하가 되실 분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듣기 좋네. 하지만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잖아.”
감언이 안 통한다. 제일 다루기 까다로운 유형이다. 어떻게 하면 그쪽에서 먼저 포기하게 만들지 고민하는데, 칼리온이 내게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너도 날 이용하고 싶지 않아?”
“…예?”
“뭘 당황하고 그래. 다들 그러잖아. 충심은 그럴싸한 변명이고, 실은 이해타산을 따져서 나를 따르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칼리온이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신기해. 바로 여기, 신분 상승을 위한 지름길이 있는데… 왜 이곳에 남으려는지 모르겠어. 명예욕이 없는 건가? 아니면, 너무 복잡한 건 싫어해서?”
“전 그저 아스레인 교수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평범한 하인인 저를 거둬 주신 은혜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은혜 때문이야?”
칼리온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내게 다가오는 걸음엔 망설임 따윈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한 뼘을 남겨 두고 옆에 앉는 바람에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이내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손이 내 귀걸이를 어루만졌다.
“아벨이 꽤나 소중하게 대해 주나 봐.”
“…….”
“…나도 내 사람한테는 잘하는데.”
쿵, 쿵. 불안감에 잠식된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설마 귀걸이로 모든 이야기가 새어 나가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바짝 긴장한 채 침만 꿀꺽 삼키니, 칼리온이 키득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난 아버지처럼 원리원칙 주의자는 아니니까.”
“…정말 그래도 됩니까?”
“응.”
간결한 대답에 용기를 얻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니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저는 이용당하고 싶지 않으니 여기 있는 겁니다.”
“…뭐?”
“그리고 감히 전하를 이용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항상 속내를 읽지 못하게 하려는 듯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세상은 적과 아군으로 나뉜다고 하셨죠. 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끝나는 관계는 웃는 얼굴로 등 뒤에 칼을 숨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전하께선 늘 대단하신 분이시지만,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이해타산으로 이어진 관계가 무섭습니다.”
감언으로 둘러싸지도, 듣기 좋은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생각을 드러냈다.
“그러니 전하. 제가 필요하시다면 그저 저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제 미천한 능력 선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그편이 전하께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뒤이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으나, 칼리온은 완전히 웃음을 잃은 상태였다. 감정 없이 메마른 얼굴은 가면을 빼앗겨 불쾌하기까지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태자의 본심이었다.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기만 하던 칼리온은 이내 가면을 되찾았다.
“꽤 흥미로운 이야길 하는구나.”
“전하.”
“그러니까 너는 적은 아니지만, 동시에 순순히 아군이 되어 주진 않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고….”
“그게 좋다면 그리하지. …하지만 태오. 이건 기억해 둬.”
칼리온은 슬며시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힘을 세게 준 것도 아닌데, 어깨를 짓누르는 위세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내게 상체를 기울인 칼리온은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 …나랑 아벨도 마찬가지야.”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각목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시선을 돌리자 초승달처럼 휜 눈매와 마주쳤다.
이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하지만 아스레인을 떠나 이 사람 곁에 있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내가 태자의 편이 되는 게 아니라, 태자가 내 편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그럼….”
조심스레 입을 여는 순간, 연구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칼리온 전하.”
“아아, 왔어요? 아벨.”
고요한 분노를 담은 금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칼리온을 향했다. 그럼에도 칼리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반쯤 끌어안은 채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능청스러운 손길에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쪽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잠깐, 따로 얘기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