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짧은 방학이 끝나자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히 학교로 돌아왔다. 찬바람만 쌩쌩 불던 본관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설렘에 본관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방학에 있었던 일을 떠드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 교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온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가. 유독 발걸음이 가벼웠다.
개인 룸으로 들어가자 둥그런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세잔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형!”
“오랜만이에요! 세잔. 한 달 동안 잘 지냈어요?”
“형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니 그의 눈동자가 온화한 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잔은 자연스레 옆에 있는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는 퍽 고집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세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언제 왔어요?”
“이른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차라리 새벽에 출발해서 마차에서 잠을 청하는 편이 낫겠다 싶더군요.”
“어휴, 안 그래도 피곤한데 오자마자 짐을 푸느라 힘들었겠어요.”
“평소라면 괜찮았겠지만… 새해라고 이것저것 받는 탓에 불필요한 짐만 늘었습니다.”
한숨을 폭 내쉬는 세잔의 얼굴에 피곤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맞다. 새해였죠? 방학 때 정신이 없어서 해가 지났는지도 몰랐어요.”
“그랬군요. 왠지….”
“왠지…?”
“갑자기 답장이 뚝 끊겨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 잠깐 연구실을 비우느라 답장을 못했어요. 방학이 막 끝나갈 무렵에 돌아왔거든요.”
안 그래도 미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레인의 저택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편지가 무려 세 통이나 와 있었다. 보통 중요한 전령을 보낼 때나 쓰는 특급 발송을 안부를 묻는 편지에 써서 더욱이 미안했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자 세잔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군요.”
“네?”
“방학동안 제가 편지를 너무 많이 보내서 부담스러운가… 싶었습니다.”
“에엑, 아니에요! 세잔이 간간히 소식을 보내준 덕에 얼마나 재밌었는데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애초에 제가 보내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지금껏 세잔이 보내준 편지들은 리본으로 묶어서 소중하게 모아 뒀어요.”
그제야 시무룩해졌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남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어째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꺼리는 걸까. 답장하지 못한 편지에서도 세잔은 늘 내 걱정뿐이었다. 어쩌다 내가 고향의 안부를 물으면 세잔은 회피하듯 한 줄 내외로 끝내 버렸다. 하지만 세잔이 내 안위에 대해 궁금한 만큼 나도 그의 주변일이 신경 쓰였다.
“피아트 후작가는 북쪽 국경을 다스린댔죠?”
“아, 예. 맞습니다.”
“그럼 눈이 꽤 많이 왔겠네요. 세잔도 어렸을 때 저택 앞에서 눈사람 만들고 그랬어요?”
“아뇨. …어렸을 적은….”
뒷말을 흐리는 세잔은 불편한 듯 제 손목을 어루만졌다. 학술대회를 준비할 때도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학교에 남아 있던 그였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가문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왠지 가시방석에 억지로 앉힌 것 같아 화제를 돌리려 하던 그때였다.
세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워낙 엄격하셔서,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집안의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달리 해 드릴 말이 없습니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뇨. 그래도 가문이 아니라 저에 대해 물어봐 주는 사람은 형뿐입니다.”
봄비처럼 잔잔한 미소가 그의 입매를 물들였다. 항상 화려한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세잔이 왜 고독하게 보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은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 번 쿵, 두드리고 곧장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심드렁하게 하품을 하며 들어오던 아이리스는 나란히 앉은 나와 세잔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뭐야? 일찍 왔네.”
“세잔 경이 제일 먼저 왔더라고요.”
“세상에. 부지런도 하셔라.”
“그러지 말고 어서 와서 앉아요.”
아이리스는 자연스레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왼쪽에 세잔, 오른쪽에 아이리스. 나야 즐거운 조합이지만, 나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는 그들은 아닌 모양이다. 제법 살벌한 눈길을 쏘아붙이던 아이리스가 먼저 적막을 깼다.
“진은?”
“곧 올 거예요. 아까 연구실로 진의 지도 교수님께서 출근하셨거든요.”
“교수가 출근한 거랑 진이랑 뭔 상관인데?”
“그야 진이 대학원생이니까요….”
대학원생의 인생을 전혀 모르는 아이리스는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달리 설명해 줄 길이 없어 조용히 착잡한 미소만 지어 주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진의 이야기가 막 끝날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으악, 미안해요. 늦었죠!”
“아니에요. 다들 방금 왔어요.”
“하아… 하필이면 첫날부터 일이 있어 가지고.”
“충분히 이해해요. 연구실에서 바로 온 거예요?”
마지막 남은 자리에 털썩 앉은 진은 ‘연구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탁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니, 들어 보세요. 교수님이 저 오자마자 일을 시키는 거 있죠? 바닥 쓸어라, 책 정리해라, 창틀에 있는 먼지 닦아라.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시키더라고요.”
거친 호흡은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대변하듯 꽉 쥔 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이해하는 마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달리,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리스가 대뜸 말했다.
“대학원생이라며?”
“어어, 그런데?”
“내가 클라우스 그 자식 뒤치다꺼리할 때랑 똑같잖아.”
“원래 어른들의 사정이란 그런 거야…. 알겠니? 아이리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에 아이리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내 진은 바짝 타 버린 속을 식히려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식은땀까지 닦으니 푹 파인 뺨이나 퀭한 눈가가 눈에 띄었다. 왠지 방학 전보다 진의 안색이 훨씬 안 좋아진 듯했다.
“진. 혹시 교수님이 방학 때도 일 시키셨어요?”
“에이, 설마요. 당연히 한 달 동안 해방되어 있었죠.”
“그럼 다행이지만요….”
“왜요?”
“낯빛이 너무 안 좋아서요. 방학 때 충분히 쉰 거 맞죠?”
컵을 내려놓던 진의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실은….”
말하기를 망설이는지, 퍼석하게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기만 반복했다.
“썩 가벼운 얘기는 아닌데, …괜찮아요?”
“전 상관없어요. 오히려 진이 괜찮다면 말해 주세요.”
세잔과 아이리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진은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레 사정을 이야기해나갔다.
“예전부터 신세 지던 약초 가게 아저씨가 있거든요. 마을 뒤쪽에 ‘캄페’라는 산이 있는데, 제가 거기서 약초를 캐고 올 때마다 끼니를 챙겨 주셨어요. 그 아저씨는 약초상이면서 웬만한 요리사보다 수프를 잘 만들거든요.”
“그럼 아버지처럼 느껴지겠네요.”
“그렇죠. 진짜 아버지보다도 가까운 사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 마을로 돌아갔을 때도 평소처럼 반겨 주셨어요. 그래서 한 2주 동안은 매일같이 들렀어요. 제가 캔 약초를 드리기도 했고, 시답잖은 농담도 주고받았죠.”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3주째 되는 날부터 아저씨가 안 보이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가게도 문을 닫았죠.”
“…갑자기요?”
“네. 너무 이상했어요. 그 부부는 몇 십년간 가게를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쉬신 적이 없거든요.”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리스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슬슬 힘들어져서 쉬나 보지.”
“나도 한 사흘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다 밤에 아주머니를 만났어.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
“무슨 소리야?”
“아저씨가 사라지셨대.”
“…뭐?”
“그래서 밤낮 할 것 없이 마을 곳곳을 수소문하고, 가까운 마을은 전부 다녀오신 거야. 하지만 아저씨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대. …마치 증발한 것처럼.”
진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었다니…. 단순히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용히 사건의 타임라인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가던 중, 세잔이 진지한 투로 물었다.
“아주머니께서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딥니까?”
“한밤에 같이 자던 와중에 아저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가셨대요. 당연히 화장실에 다녀오는 줄 알았는데, 그대로 아침이 되도록 안 와서 보니까… 부엌에 쪽지가 있었더래요.”
“무슨 쪽지입니까?”
“…혹시 몰라 받아 오긴 했는데….”
잠시 주춤한 진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쪽지를 꺼내었다. 두 번 접힌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보니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강 건너에서 어머니께서 나를 기다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