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저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몰라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아무래도 단박에 믿기는 힘들겠지. 어쩌면 갑자기 웬 헛소리냐고 넘겨짚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스레인은 말이 없었다. 결국 어깨를 짓누르는 적막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창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서서히 납빛으로 변해 갔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아직 내 말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거짓말처럼 들리는 거 알아요.”
“인간이 마물과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없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해도 소용없었다. 아스레인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조건이 충족되기만 하면 확실히 의사소통할 수 있어요.”
“…조건?”
“교감이요. 말 그대로 마물이 제게 마음을 열어야 해요. 물론 마음의 거리를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진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면 전부 가능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르와 히페리온이요.”
말이 끝나자마자 깊은 탄식이 따라붙었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아스레인은 애써 당혹을 감추려는 듯했다. 하지만 연신 허공을 방황하는 시선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믿어 주시는 건가요?”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바로 이해하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교수님께서는 믿어 주셨으면 해요.”
불안한 마음에 단단히 붙잡은 그의 팔을 슬쩍 놓아주었다.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는 동안, 아스레인의 표정은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이윽고 매정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한숨과 함께 닫혔다. 아무래도 한소리하려다가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곤 말을 아끼려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였나.”
“그건….”
빠르게 굴러가던 사고 회로에서 톱니가 툭 빠졌다.
그러니까 실은 이 세계가 소설이고, 저는 소설 밖의 사람이에요. 사고로 인해 소설 속으로 들어왔고 생전에 마물 도감을 정리한 덕분에 ‘시스템’이 생겼죠. 시스템의 기능 중 관계 평가를 활성화하면 마물과 대화 및 소환이 가능해지는데….
“…오케아노스에게 몸을 빌려준 후부터예요.”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세계가 소설이고,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란 사실을 그 누가 믿어 줄까. 그 소릴 듣고 날 미친놈 취급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아무리 아스레인이라 해도 술주정쯤으로 넘겨 버릴 것이다.
오케아노스를 언급하니 아스레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죄송해요. 최대한 빨리 말하려고 했는데….”
“됐네. 나도 자네에게 숨겨 온 게 있으니…피차일반 아닌가.”
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괜히 지금 말을 얹었다간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스레인이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동안 평생 들을 한숨 소리는 다 들은 것 같다.
한참 후, 아스레인은 금세 피곤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나?”
“네?”
“오케아노스에게 몸을 빌려준 후, 달리 이상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나?”
“…괜찮아요. 다만, 다른 마물들이 제게서 오케아노스의 기척을 느끼는 모양이에요.”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역시 그때 자네를 말렸어야 했네.”
“제 선택이었잖아요.”
“애초에 오케아노스 해안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어떻게든 될 운명이었어요.”
아스레인은 착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실을 들으면 놀랄 거라곤 확신했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먼젓번에 이야기했던 아이리스만 해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곧 대단하다며 넘어갔다. 그래서 아스레인도 그럴 줄 알았다.
도리어 앞으로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일을 수월하게 도와줄 수 있으니 기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새벽녘 호수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듯 수심으로 가득 찼다.
“태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왜 이제 와서 이야기했냐고 화내려나. 혼날 각오를 마치고 교무실에 불려온 학생처럼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뚜벅뚜벅 다가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나.”
“…네?”
“마물과 대화할 수 있단 능력을 알고 있는 자가 또 누가 있는지 솔직하게 말하게.”
“그게….”
“어서.”
여린 어깨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이리스만 알아요. 사정이 그렇게 돼서….”
“그뿐인가?”
“네. 그 외엔 아무도 몰라요.”
또 다시 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어깨에서 손을 뗀 아스레인은 이내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눈을 굴렸다.
“차라리 아이리스라 다행이군. 그자라면 자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섣불리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아스레인이 비밀을 얘기하듯 작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유념해 두게.”
미동 없는 금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빛을 띠었다. 주위를 감싼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긴장한 나머지 열심히 머리만 주억거렸다. 그러자 냉정한 목소리가 차디찬 호숫가에 낮게 깔렸다.
“이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네. 세잔 경이나 진에게도 마찬가지일세. 앞으로 누구에게도 자네의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게.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막아야 할 입은 적을수록 좋으니.”
“…명심할게요.”
“능력을 쓸 때도 조심해야 하네. 설령 학교 안이라도…. 아니,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고 생각하게. 혹 의심을 받거든 멍청한 변명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아니라고 하게나. 그 뒤엔 내가 알아서 하겠네.”
다시금 어깨로 올라온 손은 딱딱한 말투와 달리 따스하기만 했다. 나를 믿기로 결심한 아스레인은 내가 능력을 숨겨 화내거나 탓하지 않았다.
“알겠나? 태오. 자네는 반드시 기대보다 무능해야만 해.”
“…….”
“그래야 내가 자네를 곁에 두고 지킬 수 있네.”
그저 나를 걱정하고 위해 줄 뿐이었다.
***
다음 날, 아스레인은 평소처럼 나를 반겼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는 마치 새벽에 있던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덕분에 나도 눈치 보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자네는 반드시 기대보다 무능해야 해.’
비록 그 말이 숨긴 진정한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저택에서 남은 하루를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달콤한 휴식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대로 저택을 비워도 괜찮으신 거예요?”
“어차피 관리는 조각상이 해 줄 걸세.”
낮에 학교로부터 가능한 연구실로 복귀해 달라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 탓에 용건도 모르는 채 방학 마지막 날을 뺏겼다.
연구실에서 챙겨 온 서류를 함께 들고 아스레인을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반나절 간 꼬박 마차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호수는 어떻게 건너세요?”
“건널 필요 없네.”
“네?”
당연히 현관으로 향하는 줄 알았으나, 아스레인은 지하로 내려갔다. 마법으로 숨겨진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엔 조각상을 움직이는 마석과 똑같은 수정이 가득했다.
“이게… 뭐예요?”
“안겔루스 대학과 이어진 마법이네.”
“이동 마법은 까다롭다고 하셨잖아요. 히페리온 때도 그래서….”
“위치가 늘 고정되어 있고, 마력만 충분하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 참고로 저건 태자궁으로 이어졌네.”
“설마 태자 전하께서도 이걸로 다녀가시는 거예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레인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허리가 빠지도록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 줄 알았건만, 저택에 배치된 마법으로 손쉽게 학교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익숙하게 바닥에 깔린 마석으로 다가가는 뒷모습을 보자니 문득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니, 교수님. 제가 아이리스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저택에서 학교까지 가긴 너무 멀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분명….”
잠깐만. 아닌가? 눈을 끔뻑거리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가 생생하게 떠오른 대화 내용에 멍하니 벌어진 입을 꾹 다물었다.
‘소식은 내가 보낼 테니 걱정 말게.’
‘아, 그래도 제가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쪽이 더 빠르지 않겠나.’
그런 말씀 안 하셨구나. 그냥 내가 당연히 마차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 거구나….
“…진즉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그러면 가려고 했겠지.”
“맞아요. 금방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요.”
괜스레 억울한 기분에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보내기 싫었거든. 이러면 됐나?”
“…네?”
감미로운 목소리로 폭탄 같은 발언을 던져 당황하던 그때였다. 곧바로 마법이 시전되어 눈앞에 보이는 벽과 천장이 일그러졌다.
그대로 30초. 저택과 학교까지는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어느새 누군가의 방 안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가 단박에 알아챘다.
“설마 교수회관 개인실에 이동 마법진을 두셨을 줄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지금껏 아스레인이 퇴근 후에 저택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교수회관에서 지내는 줄로만 알았다. 아스레인을 내가 가진 틀 안에서만 생각한 게 문제였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아스레인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먼저 연구실로 가 있게.”
“넵. …다녀오세요.”
터덜터덜 교수회관에서 나와 연구실로 향했다. 고작 며칠을 비웠을 뿐인데, 학교에 도착하니 밀린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일단 지금까지 온 편지가 있나 확인하고… 또….”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일할 거리를 정리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연구실과 본관을 구분하는 아치형 다리까지 다다랐다. 서신이 얼마나 쌓였는지 걱정되어 걸음을 재촉하다가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뭐지?”
연구실 앞에 웬 이상한 사람이 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모습은 어쩐지 힘들어 보였다.
아스레인을 찾아온 학생인가? 아니면, 설마 또 황실에서 찾아왔나? 경계심에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다 고개를 불쑥 들어 올린 괴한의 얼굴을 보곤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어? 아이리스!”
반가운 마음에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자 아이리스가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이윽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회색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 게 기뻤던 나머지, 표정을 제대로 살필 새도 없이 냉큼 다가갔다.
환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으나 돌아온 건 냉담한 반응이었다.
“아이리….”
“너 뭐야.”
“…네?”
“너 뭐냐고.”
가까이서 보니 아이리스의 낯빛이 말이 아니다. 우중충하게 내려온 다크서클하며, 흰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충혈되어 있었다. 어쩐지 며칠 전보다 얼굴이 마른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조심스레 뺨을 쓰다듬자 아이리스가 메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먹구름 낀 하늘 같은 눈동자엔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던 순간, 아이리스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조용히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심각한 일인 것 같아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은 채로 그에게 안겨 있기만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등을 토닥이자 갑자기 귓가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 설마… 우, 울어요?”
“닥쳐.”
“…넵.”
진짜 우나? 왜? 대체 누가 아이리스를 울린 거지? 망할 자작은 이미 사라졌고, 더 이상 아이리스를 심리적으로 압박할 존재는 없다. 그럼 누구지? 어떤 나쁜 자식이 아이리스를 힘들게 했단 말인가. 이유를 알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쓸 텐데….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애써 심각하지 않은 척 반응을 떠보았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인지 말 안 해 줄 거예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리스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팔을 풀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살짝 붉어진 눈가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얌전히 이유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려는데, 아이리스는 말없이 재킷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내었다.
“그건….”
“이제 알겠냐? 네가 보낸 편지잖아.”
“엥? 제가요?”
냉큼 받아들자 새하얀 종이에서 희미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뒷장을 돌려보니 딱딱한 문장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아이리스에게. 저는 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 신경 쓰지 마시고 방학 보내세요. -태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