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분명 서재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방 안이었다. 조각상이 데려다 놓은 건가? 심지어 어제 읽다가 만 원고를 쿠션처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곤 원고의 상태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구겨진 곳 없이 깔끔했다.
“…놀랐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니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푹 잔 게 얼마만이더라. 느긋하게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피는데, 바로 옆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오랜만에 행복한 꿈을 꿨거든.”
푸른 호수를 바라보며 간밤에 꾼 꿈을 회상했다. 지겹도록 시달리던 악몽 속 아스레인은 항상 슬픈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사뭇 달랐다. 웃어 달라니 순순히 웃어 주었고,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 주었다. 이게 예지몽이라면 좋으련만….
손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를 느끼며 행복을 곱씹던 그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벽에 기댄 시스템이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오 님만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뭐야….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에 의미를 물었으나 시스템은 그대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어 괜히 찝찝한 기분만 남았다. 시스템이 서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오늘따라 일찍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나가니 어김없이 조각상이 나를 반겼다.
“좋은 아침이에요. 제가 방금 일어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일어날 때까지 방 앞에서 대기하다가 말소리가 들려서 온 건가. 아니면, 설마 방 안을 지켜볼 수 있는 마법이 있는 건… 아니겠지. 왠지 미심쩍어져서 도끼눈으로 조각상을 흘겨보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아침 루틴을 마치고 습관처럼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리 아스레인이라 한들 이른 새벽이니 아직 침실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선 딱딱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서신은… 답하겠네. 그리고 그건….”
아스레인의 말이 뚝뚝 끊겨 들려도 지금 바쁘단 거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다. 괜히 방해하지 않으려 노크하기 직전에 손을 거두었다. 마땅히 할 게 없어 일자로 길게 이어진 복도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었다.
“책을 마저 읽을까…?”
원고를 접할 기회가 다신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편이 좋겠다. 아스레인의 일이 대강 끝날 때까지 서재에 죽치고 있으려 걸음을 돌렸다. 또 다시 책속에 파묻힐 생각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서재에 가는 동안 문이 열려 있는 방을 흘끔흘끔 구경했다. 워낙 저택이 넓어서 그런지, 몇 걸음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저택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아스레인의 저택은 사치스러운 장식품 없이 딱 필요한 가구만 구비되어 있었다.
“…정말 아스레인답네.”
흥미롭게 저택을 구경하던 차에 청소 도구를 양손에 들고 앞서가는 조각상을 보았다. 문득 조각상은 어떻게 청소할지 순수한 궁금증이 생겨 그의 뒤를 따랐다. 이내 조각상은 삐걱거리는 팔로 새하얗게 칠해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심스레 방을 들여다보는 순간, 뜻밖의 물건과 마주했다.
“…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사이에 커다란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노인과 청년, 두 사람을 그린 작품은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 주듯 화려한 옷차림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 옆에 앉은 청년 또한 풍성한 스카프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채였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완전히 똑같은 그림은 아니었으나, 분명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그때 조각상이 그림 끄트머리를 가린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청년의 의자 뒤에 비스듬히 서 있던 사내가 드러났다. 느슨하게 묶은 금빛 머리카락과 유려한 옆선, 공허를 담은 눈동자- 그 사람이었다.
“…아스레인.”
확실하다. 분명히 비슷한 그림을 봤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그림을 구석구석 살펴보니, 우측 하단에 글귀가 쓰여 있었다.
토리코르토 산 에브게니아 황제 폐하께. 존경을 담아, 체릭 판토니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