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103/305)

#103

가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지금도 그렇다. 내게서 나는 재스민 꽃향기를 맡으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말을,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머물렀다간 반드시 사고를 칠 것 같아서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해, …해가 지니까 슬슬 바람이 차가워지네요.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한여름 뙤약볕 아래 선 사람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할 말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자리를 피하기 위한 변명이었으나, 아스레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급기야 한 수를 더 떴다.

“추우면 말하지 그랬나.”

“네?”

“…진즉 겉옷을 벗어 줄 걸 그랬군.”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져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추운 사람에게 옷을 벗어주는 건 일상적인 매너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아스레인인 게 문제였다. 아무 자각 없는 그를 탓할 수 없으니 내가 자리를 뜨는 쪽이 낫겠다.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가져가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술기운이 도는지 슬슬 졸리네요. 교수님도 오늘은 더 일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힘차게 인사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숫가를 빠져나왔다. 곧장 등으로 따가운 시선이 달라붙는 바람에 혹시 따라잡힐까 봐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결국 와인 잔을 양손에 든 채로 손님방에 후다닥 들어갔다. 문까지 꽉 닫은 후에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후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토닥이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저절로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네한테서 늘 그 향기가 나거든.’

“으악!”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이불 위로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얼굴이 홧홧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불가항력이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소심하게 주먹을 쥐고서 침대 위를 팡팡 두드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재스민꽃이라고?”

원래 자신의 체취는 맡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아스레인이 말하니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슬쩍 손목에 코를 대 보았다. 짧게 숨을 들이쉬었으나 포근하게 몸을 감싼 섬유 냄새만 느껴졌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의아하게 입술을 비죽이던 그때, 귓가에서 풉- 하고 짤막한 비웃음이 들렸다. 지금 산통을 깰 만한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머리 위에 있는 베개를 휙 던졌다. 이내 퍽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불쌍한 나무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작 베개에 맞길 바랐던 존재는 그 옆에 서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 이런, 저도 모르게 그만.

길게 찢어진 선홍빛 입술이 그리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 퉁명스러운 눈길로 흘겨보는데도 시스템은 아랑곳 않고 어깨를 떨며 웃었다. 왠지 치부를 들킨 기분에 이불에 얼굴을 푹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만 웃어 줄래? 난 진지하거든….”

- 노력해 보겠습니다. 잘 안 되겠지만요.

“…됐어.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

- 후후, 이번엔 좋은 꿈꾸시길.

홧김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등을 돌려 누웠다. 잠깐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는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새로운 아침이 밝은 후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방에 찾아온 조각상을 따라 욕실로 향했다.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혼자이지만 아침 식사도 마쳤다. 모든 일이 끝나자 조각상은 집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짧게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마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우와….”

꿈에서나 그리던 넓은 서재가 드러났다. 푹신한 소파와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서적, 그리고 한 면을 채운 벽난로까지 전부 완벽했다. 고딕 양식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서재에 생기를 더했다. 창가에서 책을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문 앞에서 아늑한 서재를 구경하는 사이, 책장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교수님?”

조심스레 말을 걸자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 좋은 아침이군.”

흰 셔츠 차림의 아스레인이 소매를 걷으며 걸어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자태였으나, 오늘은 더더욱 놀라웠다.

“…어…?”

늘 등을 덮고 있던 긴 머리가 웬일로 정갈하게 묶여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래로 늘어뜨려 묶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셔츠 위로 드러난 목선이 더욱 도드라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색다른 모습에 정신이 팔려 넋 놓고 있다가 뒤늦게 인사했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머리를… 묶으셨네요?”

“음. 책을 정리하는데 거추장스러워서 말이네.”

“잘 어울리세요. …엄청 많이요.”

머리가 굳으면 한없이 비루해지는 말주변이 한스러웠다. 딱딱한 말투 탓에 단순한 감언이라 생각했는지, 아스레인은 피식 웃어 넘겼다. 내가 시인이었다면 진즉 시를 한 편 써 냈을 텐데….

애꿎은 입술을 꾹 깨물며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거의 끝나가니 괜히 힘쓰지 말게.”

“그래도….”

책상 위에 쌓인 책을 옮겨 주려다가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왠지 익숙한가 했더니, 전부 아멜리 백작의 서재에서 교과서처럼 읽던 책이었다.

“이것도, 이것도…. 아니, 여기 쌓인 책 전부 다 교수님 책이잖아요!”

“음. 폐하께 직접 보고를 올리기 전에 쓴 것들이네.”

“헉…!”

원고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펼쳐 보았다. 시중에 발간된 그의 책과 달리 삭제된 메모가 속속히 보였다. 알기 쉽게 고치기 전의 문장과 분량 조절을 위해 빼낸 문단도 남아 있었다.

연신 놀라며 입을 틀어막자 뒤를 지나가던 아스레인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네? 얼마나 귀한데요!”

“…그런가?”

“당연하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원고잖아요.”

열심히 이유를 설명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내 아스레인은 책장에서 원고를 몇 권 더 가져다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마음껏 보게나.”

“정말요?”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스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흔치 않은 기회다. 그를 도와 책 정리를 끝내자마자 책을 한가득 끌어안고 창가에 앉았다. 그대로 책에 파묻혀 서서히 바깥 소음이 들리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아스레인이 집무실에 간 것도 모르고 연신 책만 읽어 댔다.

그러다 눈이 침침해 잠깐 낮잠을 잔다는 게 화근이었다.

***

얼마 있다가 금방 집무실로 올 줄 알았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조각상이 먹으라고 준비해 둔 샌드위치는 이미 버석하게 말라 버린 후였다. 묘하게 조용한 게 걱정되어 처리하던 서류를 미뤄 두고 서재로 향했다.

“태오. 아직 여기 있….”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책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잠든 태오였다. 햇볕이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가 깜빡 잠든 모양이다. 색색하는 숨소리가 서재 안을 차분하게 감돌았다.

혹시라도 잠을 깨울까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태오?”

이름을 불러도 살짝 꿈틀거릴 뿐, 깨어나진 않았다.

“많이 피곤했던 건가….”

조심스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 즈음, 방안 가득히 퍼진 포근한 기운에 덩달아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어제 그가 말했던 종이 냄새가 이런 건가. 단 하루 만에 죽어 있던 감각이 깨어난 듯했다. 항상 똑같던 풍경이 그로 인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낯선 감각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벽이 간단히 무너질 줄은 몰랐으니까.

“으음….”

사념에 빠진 사이, 책을 끌어안고 자던 태오가 몸을 뒤척였다. 곤히 잠든 그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으나 어째 딱딱한 바닥이 불편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뻗어 그를 가뿐히 안아들었다. 허공에 붕 뜨는 감각에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손님방으로 들어가 넓은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태오는 침대에 눕자마자 편안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책은 절대 놓지 않는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책을 놓으면 될 것을….”

소중하게 품은 책을 뺏으려다가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문득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한가득이다. 그러나 도무지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이유 모를 웃음이 잦아졌다. 그리고 늘 생각해 보면, 시선의 끝에 그가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현실의 영역을 넘어 이따금씩 꿈에도 그가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 주는 꿈은 멍청한 망상을 투영한 듯했다.

“…우습지도 않군.”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처음 그를 봤을 때도 여전히 꿈속인 줄 알았다. 급기야 무의식이 그 아이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와는 다른 온기를 느끼는 순간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그때 그 혼란스러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태오가 먼 길을 돌아 나를 찾아왔다는 기쁨보다도, 애써 숨겨 둔 진실이 드러난다는 절망이 훨씬 컸다. 그래서 차라리 환상이길 바랐다. 황실과 얽힌 내막 따위 영영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으음….”

한참 이불 위에서 비비적거리던 태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윽고 몽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스레인?”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또 꿈인가 보네.”

얌전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으니, 그는 정말 꿈이라 믿는 눈치였다. 이 정도쯤은 어울려 줘도 상관없으리라 여겨 말을 아꼈다. 그러자 태오는 배시시 웃으며 나른한 투로 말했다.

“꿈이니까…. 응. 그냥 웃어 주면 안 돼요?”

부탁이 제법 소박했다. 별말 없이 미소를 지어 주니 그는 금세 뺨을 꽃잎처럼 붉혔다. 잠결에도 부끄러웠는지,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내 얼굴을 살피기 바빴다.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잘생겼네. 솔직히 교수님도 알고 계시죠?”

“…….”

“맞아…. 모를 리가 없지.”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실없는 웃음으로 뭉그러졌다. 그 후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태오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코앞까지 다가왔던 손이 내 얼굴에 닿기 직전 우뚝 멈췄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 이유를 몰라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러나?”

내가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짐짓 놀란 기색이 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태오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야… 닿으면 사라질 거잖아요.”

“뭐?”

“당신이 나오는 꿈은 늘 그랬어요. 내가 붙잡으려고 할수록 점점 멀어지고 끝내 신기루처럼 사라졌죠.”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 내가 욕심내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죠? 꿈이라도 좋으니까….”

뒷말을 삼킨 태오는 다시금 눈을 스르르 감았다. 고른 숨소리가 정적에 잠긴 방 안을 채웠다. 그가 깊은 잠에 빠진 후, 침대 위에 있는 손을 끌어와 내 뺨에 대었다. 적당한 온기와 은은한 꽃향기가 퍼져 마음을 간지럽혔다. 

태오가 나로 인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충분히 알면서도, 섣불리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진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네.”

인간의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삶은 거짓으로 점철되었다. 아무 감흥 없이 꾸며진 신분을 말했고, 불편하기만 했던 육체에도 익숙해졌다. 어느덧 내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잊고 말았다.

‘디아벨 아스레인.’ 그게 내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었다.

지금껏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고 접근한 인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대대로 황실과 얽힌 가문이기에 세간에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시답잖은 낭설이 돌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존재 자체가 온통 거짓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나타나고부터 모든 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듯 사건은 터졌다.

‘교수님도 많이 놀라셨죠? 설마 클라우스 자작이 부작용을 숨겼을 줄은….’

끝내 태오가 치명적인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늘 그렇듯 진실을 아는 인간은 사고로 위장해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마저도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기억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워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거든 나에 대한 기억을 전부 도려내야만 했다. 인간에겐 불가능한 마법도 내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순전히 내 욕심 때문이었다. 다시는 나를 향해 빛나는 눈동자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처음으로 마법을 쓰는 게 두려워졌다. 결국 내 정체에 대한 의심만 도려냈다. …멍청하게도.

언젠가 그날을 반드시 후회하고 마리라고 확신했다. 아니, 지금도 후회한다.

더 이상 태오가 진실에 다가가게 둬선 안 된다. 이대로라면 그가 모든 진상을 알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제국의 비밀을 아는 순간, 태오는 반드시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될 것이다.

나만 포기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존재에 대한 기억을 지워 내면, 태오는 금세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것이다. 그 후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도록 완벽한 온실 속에 그를 가둬 지키는 것쯤은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했다. 언젠가 큰 폭풍이 불어닥칠 걸 알면서도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리도 이성적이지 못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이기적인 나를 용서하지 말게….”

지금껏 풀지 못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내 생애- 영겁에 가까운 생을 살아온 내게 처음으로 난제가 나타났다.

…영영 풀리지 않았으면 하는 난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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