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외딴섬. 고요한 호수. 발길이 끊긴 저택. 이곳에 아스레인과 단둘이 머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어쩌면 연구실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괜한 망상도 해 봤다.
하지만 그가 무엇보다 일을 중시한단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교수님. 이 서신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오늘 안으로 답을 보내야 하니 여기 두게.”
“페르가몬 백작님으로부터 온 감사장은요?”
“이미 인사는 끝냈으니 따로 빼 두는 게 좋겠군.”
일. 일. 일. 하나를 끝내면 곧장 새로운 일거리가 나타났다.
어째 방학 동안 연구실로 오는 서신이 줄었다 했더니, 이미 다들 아스레인이 어디 있는지 귀신같이 알고서 저택으로 보냈다. 게다가 저택에 쌓인 서신이 얼마나 많던지- 연예인이 팬레터를 받듯 아스레인은 온갖 러브콜을 끌어모았다.
연회 초대나 다른 학교에서 강연해 달라는 부탁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짜고짜 연구 주제를 달라는 놈은 뭐고, 마을에 떠도는 소문의 진상을 조사해 달라는 놈은 또 뭔가. 마음 같아서는 예의 없는 서신을 모아다가 싹 반송처리 해 버리고 싶었다.
“이 많은 걸 하나도 빠짐없이 답장해야 돼요?”
“설령 거절이라도 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군말 없이 움직이는 손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학기 중엔 서류 처리에 수업까지 합쳐져 더 바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틈틈이 수업을 가거나 교수 회의를 참석하는 게 서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일이 없는 저택 생활은 그야말로 서류와의 진득한 싸움이었다.
고작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정리뿐이었다.
“교수님. 말씀하신 대로 나눠뒀어요.”
“고맙군. 이만 가서 쉬게.”
아스레인은 왼손으로 글을 쓰며 오른손으로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러곤 깃펜을 잉크통에 잠시 꽂아 둔 사이, 왼손으로 서신을 넘기며 오른손으로 도장을 찍었다. 어느 손에 구애받지 않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아스레인. 아니, 불쌍한 서류 처리 기계는 제자리에서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던 조각상에게 부탁해 간단히 먹을 만한 음식을 가져왔다.
“식사하세요.”
“…….”
“교수님?”
“아, 거기 두게.”
눈짓으로 책상 끄트머리를 가리키기에 얌전히 접시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스레인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샌드위치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결국 싱그러운 양상추와 토마토가 곁들여진 샌드위치는 뒷전이 됐다.
“하아….”
대놓고 한숨을 쉬어도 소용없었다. 아예 의자를 책상 옆에 끌어다 놓고 내 몫의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먹었다. 뚫어져라 구경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었다.
참다못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목을 끌었다.
“교수님. 언제 쉬실 거예요?”
“음….”
“벌써 5시간째예요.”
“으음.”
“교수님.”
“…….”
이젠 대답도 안 한다. 애초에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걸까? 반신반의하며 슬쩍 물었다.
“…아스레인.”
“음?”
“저 오늘부터 반말해도 돼요?”
“그래.”
…전혀 안 듣고 있구나.
이대로 가다간 일만 하다가 방학이 끝나 버릴 것이다. 어떻게든 아스레인을 일로부터 떼어놓아야 했다. 그렇다고 서신을 어디 갖다가 숨겨 둘 수도 없고, 아스레인을 억지로 끌고 나갈 배짱도 없다.
조용히 잔머리를 굴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침 청소하는 조각상을 붙잡았다.
“혹시 여기 술 있어요?”
이럴 땐 술이 제격이다. 완벽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그는 아마도 술기운이 조금만 돌면 일을 쉴 것이다. 일단 계획대로 되려면 아스레인이 내 술을 거절하지 않아야 할 텐데….
용케 내 말을 알아들은 조각상은 묵묵히 지하로 향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오크 나무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와인셀러가 드러났다. 벌집처럼 촘촘한 나무 통 안에 와인 병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우와, 이게 다 와인이야?”
아스레인에게 와인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나. 그러고 보니 아스레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뭘 좋아하는지, 취미는 뭔지, 일 안 할 땐 어떻게 쉬는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나 무지할 수가 있나.
“…이번에 다 물어보면 되지.”
굳은 결심 끝에 와인 잔 두 개를 준비하며 조각상에게 말했다.
“교수님께 제가 호수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꼭 오셔야 한다고.”
“…….”
“안 오시면 저 오늘 호숫가에서 자겠다고 하세요. 알겠죠?”
이번에도 알아들은 걸까? 조각상은 어떤 반응도 없이 걸음을 돌렸다. 부디 내 말이 제대로 전해졌길 바라며 와인을 둘러보았다.
기왕이면 도수가 강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달콤한 와인을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맨날 소주에 맥주만 말아먹던 나로선 와인이라곤 레드와 화이트밖에 몰랐다. 고심 끝에 어느 정도 마신 흔적이 남아 있는 레드 와인을 잔에 채우고 밖으로 나섰다.
해 질 녘 호숫가는 불그스름한 노을이 잔잔한 수면에 비쳐 절경을 이뤘다. 그런데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설마….”
안 나온 건가? 조각상이 말을 전하지 못한 건지, 내가 호숫가에서 자도 신경 안 쓴다는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호숫가를 거닐던 그때였다. 저 멀리 덩그러니 놓인 고동색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온통 붉게 물든 하늘을 따라 그의 머리카락도 오묘한 주홍빛을 띠었다.
잠시나마 그림 같은 풍경을 지켜보다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나오셨네요? 혹시 아직도 일하고 계시면 어쩌나 했는데.”
“자네가 부르지 않았나.”
일을 방해해 미안하면서도, 수많은 서류를 뒤로 미뤄 둔 채 나를 만나러 나왔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실실 웃기만 하니 아스레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방학인데 일만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딱 한 잔만 해요. 네?”
대뜸 옆에 앉아 와인 잔을 내밀자 가지런한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아스레인은 한동안 잔을 받아 주지는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기만 했다. 이대로 아스레인을 어떻게든 쉬게 하려는 계획이 무산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슬쩍 눈치를 살피니 아스레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일을 하다말고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자자, 건배!”
괜히 딴말하지 못하게 후다닥 잔을 부딪쳤다. 챙- 유리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걱정이 담긴 한숨을 억눌렀다. 버릇처럼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마시려다가 문득 든 생각을 말했다.
“아참. 아무 와인이나 따랐는데 괜찮죠?”
“상관없네. 그보다 이제와 묻기는 늦다고 생각하지 않나?”
“헤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와인을 홀짝 마셨다. 곧 입 안에 진한 포도의 향기가 가득 감돌았다. 생각했던 달콤한 맛은 아니지만, 목 넘김이 부드러워 두세 잔도 거뜬할 것 같았다. 와인에 대해선 잘 모르는 내게도 깊은 풍미가 느껴지니 분명 고급 와인일 테다.
한 모금마다 감탄하는 나와 달리 묵묵히 와인을 마시는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와인 종류가 엄청 많던데, 와인 모으는 취미가 있는지 몰랐어요.”
“취미가 아니라 전부 선물받은 걸세.”
“그럼 와인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어요?”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네.”
“으음….”
퍽 시원찮은 대답이다. 웬만하게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이상 커다란 셀러를 가지고 있진 않다. 아니, 아스레인이라면 단지 선물 받은 와인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불현듯 그의 취향이 궁금해졌다.
“그럼 좋아하는 게 뭐예요?”
“…뭐?”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지금껏 교수님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전혀 모르고 지냈거든요.”
“몰라도 괜찮지 않나.”
“네? …그래도 알면 좋잖아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네.”
생각해 본 적이 없다니. 어려운 질문이었나? 아무리 그래도 음식이나 물건이나 장소나- 아무튼 무엇 하나쯤은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린 채 호수만 응시했다.
너무 뭉뚱그려 물어본 것 같아 건너편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나무는요? 같은 종류가 줄지어 있는 걸 보면 누가 따로 심은 것 같은데.”
“내가 지시했네.”
“역시! 그럼 좋아하는….”
“이곳에 서식하는 새가 천적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서 마련했지.”
아. 저절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리리오페 호수는요?”
“외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어 저택을 관리하기 편하네.”
“그런 거 말고요. 좀 더 감성적으로다가….”
“나르키소스가 지내기에 충분히 넓어 다행이지.”
그제야 깨달았다. 아스레인에게 ‘그냥’은 없었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그의 세상은 전부 소용 가치로 나뉘었다.
조각상을 만들 때도 저택 관리에는 머리가 필요 없다며 전부 없애 버린 그였다. 감정을 읽지 못해 불편한 건 나뿐이었다. 그 말은 즉, 아스레인에게 감정은 필요 없는 쪽으로 분류됐단 소리다.
“그럼 쉴 때는 보통 뭐 하세요?”
“쉴 때?”
“서류 처리가 끝나면요.”
“새로 집필할 책을 준비하네.”
“그건 쉬는 게 아니잖아요.”
차분한 눈동자에 얼핏 불편한 기색이 서렸다.
“…대체 뭘 말하는 건가.”
“취미 생활 말이에요.”
“그게 왜 필요하지?”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늘 아무도 가지지 못한 본연의 색으로 빛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의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칙칙한 무채색이었다. 대체 누가 그의 색을 뺏었을까.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고립되게 만들었을까.
물론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한다. 하지만 아스레인이 힘든 와중에도 쉬는 방법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고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교수님께서 좋아하는 걸 찾아보죠.”
“음?”
불쑥 허리를 굽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 중 유독 둥글고 새하얀 것을 집었다.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스레인에게 선뜻 자갈을 내밀었다.
“이 자갈은 어때요? 유독 둥글둥글한 게 귀엽지 않아요? 취미로 돌을 모으는 사람도 있거든요.”
“…진심인가?”
“그럼요! 어떤 취미든 상관없어요. 일하는 것도 좋지만, 뭐든지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요. 충분히 쉬어야 다시 일할 힘이 나는 거잖아요.”
처음엔 헛웃음을 흘리던 아스레인이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얌전히 돌을 받아든 그는 달걀처럼 부드러운 표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길 즈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자네는 뭘 좋아하나.”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으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종이 냄새를 좋아해요.”
“종이 냄새?”
“그, 있잖아요. 한낮에 스며드는 햇빛이 책에 닿으면 나는 포근한 냄새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스레인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호숫가를 향한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흐려지는 걸 보니, 지금쯤 머릿속으로 따스한 햇볕과 책을 상상하는 모양이다.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리는 아스레인에게 또 다른 소재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수면을 보고 있는 것도 좋아해요.”
“아무 이유 없이 물을 본다는 건가?”
“네! 저기 보세요.”
와인 잔으로 잔잔히 일렁이는 수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처럼 해 질 녘에는 시시각각 하늘 색깔이 달라져서 수면에 비치는 경치도 바뀌거든요. 예쁘지 않아요?”
“지금껏 눈여겨서 본 적 없네.”
아스레인은 와인을 홀짝이며 수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호수에 이는 옅은 파동이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도 번졌다.
“…하지만 듣고 보니 왠지 달리 느껴지는군.”
“그죠?”
설령 내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감각을 일깨우는 건 뜻깊은 일이었다.
호숫가는 곧 기분 좋은 적막에 휩싸였다.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에 흘러가는 물소리, 그리고 온화하게 가라앉은 그의 숨소리가 자연스럽게 얽혔다. 좋아하는 사람과 조용한 곳에서 나란히 앉아 와인을 마시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발끝을 까딱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 아스레인이 좋아할 만한 걸 떠올렸다.
“아, 호수에 사는 마물들은 어때요? 선대 때부터 살았다고 하니 정들었을 것 같아서요.”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호수의 마물들은 전부 보호소에서 데려온 걸세.”
“네?”
“선대… 때부터 하나둘씩 거두기 시작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럼 나르키소스도요?”
“그래.”
원래 호수에 살던 마물이 아니었다니…. 호숫가에서 만난 중년은 아스레인 가문을 마치 호숫가의 괴물을 제압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아스레인 가문이 갈 곳 없는 마물을 하나둘씩 리리오페 호수로 데려온 거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스레인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아이들은 자연에서 구조됐지만, 나르키소스는 유독 특별했지.”
“특별하다뇨?”
“어릴 적 인간에게 사육됐었거든. 결국 크기와 먹이를 감당하지 못한 주인이 1년도 채 안 된 새끼를 바다에 버렸지.”
“바다라면…. 잠깐만요. 나르키소스가 바다에서 살 수 있나요?”
설마하고 물어보니 아스레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탓에 막 보호소에 들어왔을 때 상태가 말이 아니었네. 게다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았었지. 누구든 조금만 다가가면 공격하기에 치료를 포기하자는 말도 나왔네. 그래서 내가 직접 이 호수로 거둔 걸세.”
“…그랬었군요.”
“다행히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적응은 빨랐지만, 혹여 호숫가에 오는 인간을 공격할까 봐 이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곤 했네. ……벌써 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둥그런 와인 잔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과거를 그리는 마음이 묻어났다. 먼발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선은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나르키소스를 좇는 듯 보였다.
“지금도 이 자리에 앉으면 그 시절이 생각나네. 이젠 호수를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 왠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군.”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봄을 알리는 바람처럼 가뿐히 가슴에 밀려 들어왔다.
“이제야 좋아하는 걸 하나 찾았네요.”
“이리 사소한 것도 되나?”
“당연하죠.”
“…그런가.”
맑은 금색 눈동자 위로 반짝거리는 호수가 겹쳐 보였다. 마치 깨달음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속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늘이 오묘한 보랏빛으로 물들어갈 무렵, 아스레인은 금세 사색에 빠졌다. 이제야 일에서 멀어진 그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방해하지 않으려 몰래 흘끔흘끔 쳐다보던 차, 아스레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 또 하나 있네.”
“뭔데요?”
“재스민 꽃.”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곧장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숨이 막힐 듯 다정한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술기운으로 살짝 달아오른 뺨이 빠르게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려 해도 시선은 자꾸만 그에게 머물렀다.
“…왜…요?”
더듬더듬 말을 꺼내자 무심한 입매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자네한테서 늘 그 향기가 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