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100/305)

#100

호숫가를 뒤덮은 적막은 곧 저택으로 번졌다. 불안에 떨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럼에도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쿵쿵 뛰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아스레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당황하겠지. 그동안 털어놓지 않다가 갑자기 폭발했으니 지금쯤 나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발판 위에 선 사형수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기다렸다.

마침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군.”

“…네?”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반응은 다름 아닌 사과였다. 도리어 당황스러워진 나는 번쩍 고개를 들며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아니, 전부 내 잘못이네. 자네가 여기까지 온 건 전부….”

변명하려 해도 아스레인이 가차 없이 말허리를 잘랐다. 심지어 옷자락을 잡은 내 손까지 떼어 내며 말했다.

“자네를 왜 백작가에서 데려왔는지 아나.”

“…연민이었나요?”

“아예 없던 것도 아니지. 하나 반은 순수하게 마물에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고, 반은 변덕이었네. 일률적인 계단을 밟아온 학생들과 달리 출신도 배경도 다른 자네라면 특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문득 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네. 자네는 지금껏 내가 봐 온 어떤 학생보다도 훌륭하네. 자네라면 미지의 마물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 두 종족 간의 공생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확신하지.”

평소라면 기분 좋았을 칭찬이 이토록 불길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역시나 그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서서히 메말라 후회만이 남았다.

“하지만 태오. 거기까지였어야 했네.”

“…네?”

“자넨 너무 깊이 와 버렸어.”

살짝 벌어졌다 닫히길 반복하는 입술은 무거운 비밀을 품고 있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어렵게 진심을 꺼냈다.

“더는 숨겨도 의미 없는 일이지만, 자네가 보다시피 난 황실과 깊게 얽혀 있네. 그 탓에 의도치 않게 자네를 계속 사건에 연루시키고 말았지.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위험하다 여겨지면 자네가 스스로 손을 뗄 거라 생각했네.”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내 유일한 실수였지.”

이내 아스레인은 주먹을 꽉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도… 내가 잠든 사이에 태자 전하와 어떤 식의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자네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던 눈치더군. 이대로라면 태자의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네.”

“태자의 사람이요?”

“아마 자네가 원치 않아도 자연스레 전하께서 분부한 일을 하게 되겠지. 그럼 더 이상의 자유는 없네. 감시는 물론이고, 어쩌면 위험한 사건에 계속해서 휘말릴 수도 있어. 그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게 자네가 처음 원했던 ‘마물 연구’는 아니지 않은가.”

이제야 아스레인이 후회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사건에 휘말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유를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내게 선을 그었더라면, 제국의 번영과 관련된 비밀이나 클라우스와 얽힌 사건을 모르는 채 얌전히 마물 연구만 하고 살 수 있었더라고.

“내 말을 알아듣겠나? 태오. 난 소중한 제자를 더는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나 혼자로 족하네. 그로 인해 자네가 다치게 되면, 그때 또 후회하고 말겠지. …이미 늦었는데도.”

일그러진 얼굴에는 지난날을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윽고 제자리에서 일어난 아스레인은 내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내가 자네에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닐세. 그저 여느 학생처럼 무사히 졸업해서 훌륭한 연구자의 길을 가면 되네. 혼자 두려는 게 아니라 전부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이미 깊이 와 버렸다면서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아뇨. 늦었어요.”

“…뭐?”

처음부터 사건에 휘말린 건 온전히 내 선택에 의해서다. 비브린트 숲에서 살인사건을 접했을 때도, 클라우스의 내막을 캘 때도 아스레인은 항상 나를 말렸다. 그걸 꺾고 고집을 피운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 남겠다고 선택한 것도, 나다.

“제가 무사히 졸업하면, …교수님은요? 말씀하신 대로 전하께서 분부하신 일을 묵묵히 처리하려는 건가요?”

“…그래.”

“그럼 또 혼자가 되는 거잖아요.”

“오히려 그쪽이 편하지 않은가.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날수록 선택에 망설임이 생기고 현실 감각은 무뎌지며, 점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어지지.”

올곧은 눈빛엔 일말의 망설임은 없었다. 예전엔 아스레인이 일을 대하는 태도를 동경했을지 몰라도, 이젠 안쓰러울 뿐이었다.

“어째서 당신 자신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세요?”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아. 혼자가 편해서 그런 걸세.”

“그래요?”

퍽 담담한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왜 제가 떠나갈까 봐 불안하다고 하셨어요?”

“……!”

일순 긴 속눈썹이 파리하게 떨렸다. 정곡을 찌른 걸까. 마침내 평온함으로 무장한 그의 가면에 금이 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그러쥐고 상체를 기울였다.

“실은 외로우신 거잖아요. 누군가 곁에 있길 바라잖아요. 그게 저라면 안 될까요? 제가… 교수님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잠깐의 침묵 끝에 아스레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교수님.”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네만큼은 안 되네.”

“…어째서요? 제가 거슬려서요?”

“글쎄. 모르겠군.”

재차 대답을 회피하는 줄 알고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고 뒤늦게 알아챘다. 아스레인은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모르겠어. 태오. …내가 요즘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네. 어째서 자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되고, 자네가 슬퍼하면 나까지 힘들어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아스레인은 모르는 걸까. 지금 그가 한 말은 고백보다 진하고, 매몰찬 거절보다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아직 감정을 온전히 자각하지 못한 아스레인은 연신 혼란스러워했다.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이 어색하기까지 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솔직하게 말했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듣고도 포기할 멍청이는 이 세상에 없다.

“저도 똑같아요. 교수님이 눈앞에 있는데도 사라질까 불안해요.”

“역시 단단히 잘못되고 있군. 지금이라도 되돌려야만 해.”

“아뇨. 잘못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물론 내가 가진 마음의 무게는 그와 전혀 다를 것이다. 비루한 말로는 표현 못 할 정도로 깊은 감정을 품고 있으니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주 희박하게라도 아스레인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집요하게 달라붙지 못할망정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황실과 연관되면 당연히 위험하겠죠. 사건에 얽힐까 봐 저를 계속 밀어내신 것도… 이젠 이해해요. 하지만 전부 알고 나니 더욱 고집을 부려야겠어요.”

“태오.”

“전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에둘러 말해도 못 알아듣는 건가? 앞으로의 일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네.”

“정말요?”

단단히 붙잡은 팔을 스르르 놓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말 제가 없이도 괜찮으세요?”

“그건….”

뒷말을 삼킨 아스레인은 곤란한 듯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머뭇거리는 입술이 그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낯선 아스레인의 모습을 연달아 보니 더더욱 욕심이 났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내면을 내가 이끌어 내고 싶다고.

“역시 곁에 있을래요.”

“왜 위험한 길을 자처하는 건가. 자네를 위해서라면 함께 일할 연구자와 완벽한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네. 그런데도 왜….”

“교수님이. 아니, 아스레인이 제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서요.”

아스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였다. 이게 고백인 줄은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 덕분에 모든 게 완벽한 줄 알았던 아스레인에게서 서투른 것을 찾았다.

“왜 불안한지 모르다고 하셨죠? 전 알 것 같아요.”

감정. 그중에서도 사랑은 그에게 쥐약이었다.

“하지만 말해 주지 않을래요. 교수님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오래도록 아스레인이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수없이 고민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

그러니 집요하게 버틸 것이다. 아스레인이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을. 

그 언젠가 오늘 있었던 일을 함께 곱씹으며 웃을 날을 기약하며-

“잘 들어요. 아스레인.”

불쑥 앞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언제나 아스레인이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엄지로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

“그러니 조금은… 제게 기대 줄 수 없는 건가요?”

한껏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이 무장 해제되듯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그 후로 아스레인은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동공은 여전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늘 혼자였을 그이기에 애정 어린 손길이 어색하게 느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니 나는 이미 돌아갈 길을 잃었다.

끝내 아스레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힘겨운 길이 될 걸세.”

“알아요.”

“황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네.”

“전 교수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돼요.”

환하게 웃으니 그의 입꼬리도 덩달아 스르르 올라갔다. 이내 아스레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내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손바닥으로 퍼져 가는 열기를 따라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태오. …자네 말이 맞아. 내겐 자네가 필요하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애틋한 애환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 이기적인 부탁이지만, …내 곁에 있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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