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99/305)

#99

오랫동안 눈을 마주쳐도 아스레인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난생 처음 보는 메마른 눈동자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빠져나가려 해도 거센 악력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버렸다.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아스레인이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허락도 없이….”

그러나 아스레인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듯 금색 눈동자에 짙게 깔린 안개가 걷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스레인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손목을 붙잡은 힘을 풀었다.

“…태오?”

일그러진 표정 위로 수많은 감정이 스쳐 갔다. 반가움은 찰나에 지나가고 당혹스러움만이 남았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던 아스레인은 천천히 손을 내려 내 뺨을 감싸 쥐었다.

“환상이… 아니었군.”

환상이 아니야. 아스레인은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부서지기 쉬운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을 쓰다듬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온기에 드디어 닿았다.

살포시 볼에 닿은 손을 감싸자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2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2주가 지났다고?”

“오늘로 16일째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줄곧 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나를 가로막은 팔을 치우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선명한 혼란이 느껴졌다.

“어째서 나를 안 깨운 거지?”

“그건….”

곁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스레인을 바라보던 때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칼리온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새 깨어났네요?”

“…칼리온 전하.”

“몸 상태는 좀 어때요?”

아스레인은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사이 뒤따라 들어온 조각상이 아스레인에게 연결된 장치를 익숙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 빠지자 칼리온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왜 안 깨우신 겁니까?”

“의원이 말하지 않았나요?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요. 예정대로 깨어났다면 금방 또 몸에 무리가 갔을 거예요.”

“저를 깨워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었을 텐데요.”

“난 아벨을 아주 잘 알아요. 어떤 이유를 들어도 순순히 쉬지 않을 거잖아요. 내 말이 틀린가요?”

“아무리 그래도….”

전혀 낄 틈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투는 것 같아도 지금껏 쌓아 둔 유대가 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고작 두어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공간에 분리된 소외감을 느꼈다. 그들만의 세상에 발을 들인 나는 손님에 불과했다.

“태오도 똑같았을 걸요?”

조용히 벽에 달라붙어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튀어나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

“너라면 알 거 아냐.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려고 아벨을 제때 깨우지 않은 마음을.”

“아, 네. 저여도 그랬을 거예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온이 보란 듯이 아스레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봐요. 내 말이 맞죠?”

“하아….”

“그러니 앞으로는 괜히 무리하지 말고 몸부터 챙겨요. 당신을 걱정할 나와 태오를 위해. 그리고….”

칼리온은 침대에 걸터앉은 아스레인을 향해 상체를 숙이며 싱긋 웃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해.”

나직한 속삭임에 바닥을 향한 금안이 순간 흔들렸다.

지금 아스레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머릿속으로 쉼 없이 계산하고 있겠지. 막 깨어나고도 쉬지 못하는 그에게 나까지 짐이 될 순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칼리온은 산뜻한 인사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먼저 장치를 옮기는 조각상을 보내고, 문 앞까지 칼리온을 배웅했다. 더 따라가려고 했으나 우아한 손짓이 거절을 표했다.

“이만하면 됐어. 그보다 아벨을 잘 부탁해. 한 번 마력을 추출해 내고 나면, 종종 몸을 못 가누기도 하니까.”

“네. 제게 맡겨 주세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온이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다음에 또 봐. 태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점차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을 닫으니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적막이 흘렀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아스레인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설마 이틀이나 지났을 줄은 전혀 몰랐군. …전하께서 곤란하게 하진 않으셨나?”

“아뇨. 친절하셨어요.”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평소와 달리 그의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실은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레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고 억지로라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봤는데 저택이 되게 멋지더라고요. 저 조각상들도 전부 교수님의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죠? 역시 대단하세요.”

아스레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식사부터 하실래요? 그러고 보니 요리도 조각상들이 하나요?”

아침이 빨리 오길 바랐으나 무심한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어두웠다. 길고 긴 밤을 지새우려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애써 말을 이었다.

“아, 맞다. 그간 연구실엔 별 문제 없었어요. 혹시 몰라서 서신이 온 걸 대충 훑어봤는데, 모두 여유롭게 처리해도 괜찮을 사안이었어요. 그리고….”

“태오.”

그저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선고라도 받은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속으로 연신 생각했다. 제발…. 제발 그 이야기만은 꺼내지 않기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만큼 위태로운 댐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단단히 쐐기를 박아 버렸다.

“왜 아무것도 안 묻지?”

“…뭐가요?”

“전부 봤지 않은가.”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난 어떻게 해서든 감정을 억누르려는데, 그는 단번에 원점으로 되돌려 버렸다. 눈치 빠른 아스레인이 내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숨을 짧게 들이쉬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당장 물어보면 사실대로 말씀해 주실 건가요?”

돌아온 대답은 침묵이었다. 말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반응을 떠보는 행동 때문에 맥이 탁 풀렸다. 감정이 함부로 비집고 나오지 못하도록 힘겹게 쌓아올린 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묻냐니…. 어차피 말해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요. 어째서 연락이 안 됐고, 왜 저택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전부 알고 싶어 미치겠어요.”

창틀을 짚은 손이 볼품없이 떨려 양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한낱 호기심이나, 언제 돌아올까 전전긍긍하며 밤을 지새운 시간들… 이딴 것보다도 제겐 교수님의 안위가 중요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전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요. 나만 입 다물면, 당신이 편하다는데… 그럼 이 정도쯤은 모르는 척할 수 있어요. 이보다 더한 것도 눈 감을 수 있어요.”

엉망이 된 붕대 위로 투명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혹시나 목소리가 떨릴까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일도 내일이 되면 잊을게요. 아니, 곤란하시다면 지금 당장 기억에서 지울게요.”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러려고 힘들게 저택까지 온 게 아닌데. 방금 막 눈떠서 피곤한 사람을 몰아세우려던 게 아닌데. 괜찮은지 물어보고, 필요한 거 없냐고 도와주려고 온 건데-

“…짜증나….”

화가 났다. 감정을 참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황실과 연관된 사안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마음으로는 서운함을 느끼는 내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아스레인을 ‘가장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칼리온이나, 쓴소리하는 칼리온을 신뢰하는 아스레인보다도- 그 둘의 사이에 치기 어린 질투를 느끼는 내가 미웠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 냈다. 괜히 오래 있다간 아스레인을 피곤하게만 할 것 같다. 부르튼 입술을 꽉 깨물고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나가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침대를 지나치는 순간, 아스레인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옷 위로 붙잡은 아스레인 손의 떨림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등을 돌린 채 서 있으니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 아닐세.”

“알아요.”

“그러니까 나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아스레인은 끝내 말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려던 건데… 이미 늦어 버렸다.

질끈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황실과 관련된 문제잖아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 뇌리에 박혔다.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가 불안한 기색을 담고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떠나지 않을 건가.”

“…떠날 생각 없어요.”

“그런데 왜 금방이라도 자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것만 같지?”

처음이었다. 이토록 나약한 아스레인을 마주한 건.

“태오.”

“…….”

“내가 왜, …왜 이렇게 불안한 건가.”

나를 붙잡은 손이 올가미처럼 점점 얽매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나는 어디 떠나지 않는다고, 당신이 허락하는 한 계속 곁에 머물 것이라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모진 말이 튀어 나갔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쪽은 제가 아니라 교수님이잖아요.”

“그게 무슨….”

“다 들었어요. 전하께서 클라우스 사건으로 원하는 걸 말하라기에 교수님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했어요. 이제 전부 안다고요.”

한껏 커다래진 눈을 보며 체념하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해해요. 제국의 비밀과 얽혀 있으니 제게 숨길 수밖에 없었겠죠.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귀띔은 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어디가 아프다고, 지병이 있다고….”

억지로 다잡은 마음에 다시금 폭풍우가 쳤다. 서서히 차오르는 감정을 막지 못해 끝내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만 쉬면 나아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단순히 과로인 줄 알았죠.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들은 진실은 전혀 달랐어요. 교수님 말을 순순히 믿은 제가 바보였어요. …육체가 부서지기 직전이었을 줄은….”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아스레인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졌다.

“이틀간 연구실에서 온갖 생각을 했어요. 대체 어디쯤 온 걸까. 마차가 눈에 미끄러진 건 아닐까. 저택에서 상태가 악화된 거면 어쩌지. 왜 연락이 없을까.”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아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걸까.”

혹시라도 내가 떠나갈까 불안하다고 했던가. 나는 옷자락을 쥔 지금도 불안하다. 그 짧은 이틀 동안 피가 마르는 기분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시금 깨달았다.

“정말 교수님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저는….”

정말 이 사람 없이는 안 되겠구나.

“…태오.”

지금껏 마음에 담아 둔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버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잠겨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엉망이 된 얼굴로 아스레인을 올려다보며 원망을 토해 냈다.

“왜 자꾸 절 혼자 두려고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날 거뒀잖아요. 그 지옥에서 날 여기까지 이끌어 준 건 당신이잖아요.”

“…….”

“이럴 거면 처음부터 잘해 주지 말지 그랬어요. 웬 놈이 달라붙어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했을 때도 그냥 무시했어야죠. 제가 애처럼 울어도 위로하지 말고, 밤에 먼 길을 돌아 데려다주지도 말고, 다정하게 머리를 만져 주지도 말고, 웃어 주지도 말았어야죠.”

바짝 메마른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갔다.

“그랬으면 이렇게… 이 정도로….”

당신을 향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항상 파도 같았다. 용기 내어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기로 결심하면 다가왔다. 자꾸만 마음을 어질러 놓는 탓에 행복한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점점 익사해 가는 것도 모르고.

“너무해요. 정말… 너무해요. 아스레인.”

왜 사랑에 빠지기는 쉽고, 포기하긴 어려운 걸까.

“그럼에도 당신을 미워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어요.”

이토록 불공평한 게 사랑이라면, 영원히 모르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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