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사방이 캄캄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끼 낀 자갈이 신발 밑창에서 헛돌다 툭, 투둑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이윽고 새하얗고 둥그스름한 돌무더기 사이로 들어간다. 유독 달처럼 빛나는 돌에 홀린 듯 다가가 보니, 그건-
“…흡!”
백골이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자갈밭 사이사이에 뼈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인간인지, 동물인지 알아볼 수 없는 뼈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그중 성한 뼈는 없었다. 단면이 하나같이 억지로 부숴 놓은 듯 울퉁불퉁했다. 꼭 누군가 먹다 뱉어 놓은 것처럼.
자세히 보려고 몸을 낮춘 순간, 저 멀리서 높은 이명이 들렸다.
끼이익- 흡사 돌고래의 초음파 같기도 한 울음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물 온도는 점점 차가워졌고,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온다. 호수의 주인이.
“…….”
잔뜩 긴장한 채로 정면을 응시하자 곧 어둠 속에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 7m에 육박하는 마물은 날렵한 역삼각형 머리에 매끈하고 길쭉한 몸을 가졌다. 아가미 뒤로 달린 가슴지느러미는 물결치듯 하늘하늘 흔들렸고, 머리에서부터 이어진 등지느러미는 흡사 말의 갈기로 보였다. 지그시 감은 두 눈 사이에 박힌 타원형의 비늘은 마치 수경(水鏡)처럼 투명했다.
반짝이는 비늘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의식으로 목소리가 스며들어왔다.
- 새로운 마물 ‘나르키소스’와의 교감을 확인했습니다.
낯익은 이름을 듣자마자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르키소스는 소설 속 인상 깊은 마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의 특징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르키소스의 수경은 상대에게 행복한 기억과 이루지 못한 상상을 비춰 준다. ‘몽상의 거울’이라 불리는 능력 때문에 삶의 의지를 상실한 이들이 제 발로 나르키소스를 찾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고독한 영혼에게 황홀한 죽음을 선사하는 마물이라며 찬양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형과 환상을 보여 주는 능력은 전부 미끼에 불과했다.
- 함부로 수경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시스템의 말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수경에 비친 자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깊은 호수에서 천천히 익사하면, 나르키소스는 사체가 깨끗하게 부패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백골이 된 뼈만을 취한다. 방심했다간 의도치 않게 호수를 떠돌아다니는 백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가만히 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세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일정 거리에서 멈춰 있던 나르키소스가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얇은 베일 같은 지느러미가 스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잠시 후, 나르키소스는 스스로 머리를 숙여 내 손을 툭툭 건드렸다. 만져 달라는 건가 싶어서 손을 뻗으니 유연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엄쳐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내 손을 치고 앞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의아하게 여기는 순간, 시스템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 왠지… 잡으라는 것 같군요?
시스템의 의견을 따라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느러미 대를 붙잡았다. 계속 손길을 피하던 나르키소스가 드디어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거센 물살에 휘말려 나도 모르게 고삐를 쥐듯 지느러미 대를 꽉 잡았다. 그러자 나르키소스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직접 걸어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수를 건너서 섬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죽는 줄 알았네….”
콜록콜록.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을 토해 내며 자갈밭 위에 힘없이 엎드렸다. 여전히 나르키소스에게 올라탄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허공에 손을 휘적거렸다.
“고마워. 나르키소스.”
인사하려고 호수를 돌아봤지만, 이미 나르키소스는 사라진 후였다.
뒤늦게 곤죽이 된 몸을 일으켜 축축해진 옷을 쥐어 짜냈다. 대강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털어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자 형태의 3층 저택은 작은 정원도 울타리도 없었다. 심지어 늦은 시간까지 복도와 방 곳곳이 환했지만,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
-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그래도….”
최소한 저택을 관리하는 시종이나 하인이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택은 고요하다 못해 진공상태로 빠져든 듯했다. 이따금씩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만 음산하게 들려왔다.
“일단 가 보자. 불이 켜진 걸 보면, 교수님은 계시는 것 같아.”
그나마 정문으로 여겨지는 두 개의 기둥을 향해 다가갔다. 기둥엔 각각 랜턴이 걸려 있었으나 주변을 훤히 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 탓에 기둥 옆에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 저게 뭐야?”
처음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머리 없는 조각상이었다. 손에 들린 칼부터 시작해서 몸에 두른 천까지 섬세하게 깎아 놓아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다. 묘하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바람에 선뜻 다가가기가 망설여졌다.
“아스레인의 취향이겠지….”
최대한 가까이 가지 않으려 조각상을 빙 둘러 기둥 사이를 지났다. 그때였다.
후웅-
“우왁!!”
조각상이 나를 향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얼마나 빠른지, 허공을 가르는 칼을 따라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멀리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진즉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반쯤 날아간 정신을 붙잡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조각상이 끼긱, 끼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기둥 사이에 섰다.
“어떻게 조각상이….”
미간을 찌푸리고 자세히 보니 가슴 한가운데 황수정이 꽂혀 있었다. 아스레인의 책상 서랍에서 본 원석이었다. 그렇다면 이 조각상은 아스레인의 마법으로 움직이는 건데….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일대일은 당연히 가망이 없다. 단순히 저 머리 없는 조각상에게 내가 침입자가 아니라 손님이란 사실을 알리면 해결된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이 통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조각상의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얌전히 기다렸다. 아무래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저 기둥을 지나면 공격하도록 명령받은 모양이다. 그래서 더 다가가진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칼을 든 팔을 뒤로 빼며 천천히 몸을 웅크리는 폼은 의심할 여지 없는 공격 태세였다. 이윽고 조각상은 도움닫기도 없이 제자리에서 튀어 올라 내게 달려들었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곧바로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당했다. 그리 확신한 순간이었다.
“……?”
키잉-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조각상이 우뚝 멈췄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핏기 없는 가슴에 박힌 수정과 내 귀걸이가 공명하고 있었다. 똑같은 마력을 확인한 조각상은 곧바로 내게 들이민 칼을 거뒀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정확히는 볼 수도 없는 조각상은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인사했다. 방금 전 칼을 휘두를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찌 되었든 손님으로 인식되었으니 용건부터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 아스레인 교수…. 아니. 백작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조각상은 묵묵히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를 따라가다가 혹시 몰라 기둥 사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앞서 걸어가던 조각상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휙 돌아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어깨를 흠칫 떨며 시스템에게 속삭였다.
“따라가도 되는 거겠지?”
- 그럼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아니. 근데… 갑자기 칼을 휘두를까 봐 좀 무섭네.”
-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신경질적으로 흘겨보니 시스템이 얄밉게 어깨만 으쓱였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조각상은 꼿꼿하게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 표현에 가장 중요한 머리가 없으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빛도, 표정도 없고 오로지 입력된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그래. …설마 죽기야 하겠어.”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은 호수와 같이 적막만 흘렀다. 복도에서 여럿 마주쳤지만, 살아 있는 이는 없었다. 이불을 나르는 하우스 메이드도, 앞치마를 찬 키친 메이드도 전부 머리가 없는 조각상이었다. 악몽에 나올 법한 광경이었으나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모두 아스레인이 무사한 덕분일 테니까.
“백작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
“혹시 지금 백작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 주시는 거예요?”
열심히 질문을 던졌지만 칼을 찬 조각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간 조각상은 2층의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침대와 테이블이 놓인 평범한 손님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조용히 뒤따라온 하인 조각상이 수건과 옷가지를 건넸다.
“이걸로 갈아입으라고요?”
“…….”
“…감사합니다.”
어차피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공손히 인사하며 옷을 받아들었다. 축축해진 겉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다 어둑한 창문에 비친 섬뜩한 모습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어느새 하나가 더 늘어 세 개의 조각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거기 계실 거예요?”
“…….”
“설마 백작님 지시인가요?”
“…….”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묘하게 꺼림칙해서 서둘러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축축한 옷에서 벗어나 기분은 좋았지만,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소매 길이부터 바짓단까지 사이즈가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찝찝한 기분을 어렵게 떨쳐 내고 세 개의 조각상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백작님을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칼을 찬 조각상이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 3층에 도착하니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이내 조각상은 나를 어느 문 앞까지만 안내하고 홀로 걸음을 돌렸다.
“여기인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침대 위에 아스레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여러 장치가 몸에 연결된 채로.
“……!!”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저건 분명 클라우스가 사이누르의 마안에서 마력을 추출할 때 쓰던 장치였다. 예상대로 장치 끝에는 그의 머리칼을 닮은 금빛 수정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대체 누가 아스레인에게서 마력을 추출해 내 마석으로 만들어 낸단 말인가.
우선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곧바로 문 뒤에 숨어서 좁은 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자 차를 홀짝이며 다가온 괴한이 익숙하게 마석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건 조각상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