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분명 2주 뒤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2주하고도 이틀이 지나도록 아스레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움을 만끽하려 하루라도 더 쉬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스레인이다. 휴식이 길어질수록 돌아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질 뿐이라고 단언한 그이기에 이틀간의 공백이 너무도 이상했다.
혹시나 아스레인에게서 온 편지가 있을까 봐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편지함에 보고 싶은 이름은 없었다. 급한 상황에만 쓰라고 준 귀걸이로 수도 없이 연락을 취했지만, 역시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래야 해.”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좀먹었다. 마지막 손길이 닿았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질끈 눈을 감으니 새까만 캔버스 위로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다. 불안하게 떨리는 그의 손을 쥐고 부디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피웠어야 했다. 눈총을 살지언정 아스레인을 혼자 보냈으면 안 됐다.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았을 텐데….
“아스레인….”
기대감으로 가득한 연구실은 순식간에 햇빛 없는 독방이 되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건 고문이었다. 창밖에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여 고개를 번쩍 들면, 나무가 약 올리듯 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 수풀을 흔드는 바람이 발소리로 느껴지니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어.”
두꺼운 겉옷을 챙겨 들자 시스템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 무슨 작정이십니까.
“저택으로 갈 거야.”
- 정말 그분께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연락도 없이 사라질 분이 아니야. 게다가….”
문득 아스레인이 떠나기 전에 만났던 의원이 떠올랐다. 직접 아스레인의 상태를 진찰한 의원은 여러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 주기는 평소보다 너무 길었습니다.’
‘부디 무리는 하지 마시길….’
진찰 결과 못지않게 신경 쓰인 것은 ‘주기’라는 단어였다. 이번 주기가 너무 길었다는 말은 꼭 아스레인이 일정하게 어떤 행동을 반복해 왔고, 그걸 이번엔 지키지 못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지금껏 무엇을 되풀이해 왔을까. 생각을 연결할 단서가 부족해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골머리를 썩이던 그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가 떠올랐다.
내용물을 알지 못하는 판도라의 상자- 그것만이 나를 답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멋대로 뒤져서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 자리에 아스레인이 없는데도 괜히 죄책감이 느껴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자 그때 본 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부러 놓고 간 것인지,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상자를 들어 올리자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양옆으로 흔들어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뭐가 들어있는지 어림짐작하기 어려웠다. 결국 직접 열어서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상자엔 별다른 잠금장치는 없었다. 오직 음각으로 새겨진 독수리가 상자를 지키려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손으로 상자 뚜껑을 위로 당겼다. 역시나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투박한 나무가 아닌 투명한 막을 만지는 것처럼 희미하게 반동이 느껴졌다.
- 마법이군요.
“…교수님의 솜씨겠지.”
다른 건 몰라도 아스레인이 걸어 둔 마법만큼은 알아볼 수 있다. 결코 실력을 과시하진 않으나, 감히 건드릴 의지도 꺼뜨려 버리는 정교함이 느껴졌다. 그러니 나로서는…. 아니,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를 데려와도 이 상자는 열 수 없다.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혀 무력감에 빠진 그때였다.
“응?”
고양이로 현신한 아그누스가 책상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설마 이 상황에 장난을 칠까 봐 걱정했으나, 아그누스는 진지하게 상자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내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긴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다. 잔뜩 찌푸린 인상을 본 아그누스가 상자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러곤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뚜껑을 툭 건드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독수리 문장이 다이얼처럼 한 바퀴 돌더니,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네가 어떻게….”
마치 딱 맞는 열쇠를 넣은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그누스는 상자를 여는 방법을 진즉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이내 머리로 뚜껑을 밀어 올린 아그누스는 제 발로 상자 안에 들어갔다. 그 후 캣닢 위를 뒹구는 고양이처럼 상자 속 물건에 몸을 비비기 바빴다. 그르릉거리는 울음소리가 아스레인에게 애교를 부리던 때와 닮아 있었다.
대체 뭐지? 궁금답답한 마음에 반절 열린 뚜껑을 활짝 올렸다.
“…이건….”
상자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황수정 원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조심스레 원석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귀걸이에 달린 금속 장식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제 짝을 찾아 기쁜 듯이.
***
“젊은이. 정말 여기로 가면 되는 건가?”
“네. 너무 먼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마부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볼 거라곤 호수밖에 없는 곳에 어인 이유로 가는 건가 궁금해서 물어봤우.”
“돈이라면 충분히 드릴게요. 그냥 묻지 말고 가 주세요.”
품에 있던 돈주머니를 건네자 마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숙련된 마부의 기합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작은 창문을 살짝 열어 두고 무릎 위에 지도를 펼쳐 보았다.
볼이 넓은 참소라를 닮은 카르사 제국은 북고남저 지형을 가졌다. 북쪽 대륙을 감싼 산맥 중 가장 높은 산이 바로 ‘그 마물’이 태어난 코카서스 산이다. 타국과 맞닿아 있는 서쪽은 시오 왕조 때 정복전쟁이 활발했기에, 수도는 자연스레 바다를 인접하고 비옥한 강줄기가 흐르는 남동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황성에 가까운 안겔루스 대학에서 조금만 마차를 타고 가면 광활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아스레인의 저택 또한 황성에서 그리 멀진 않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기에 마차는 바다를 등지고 나아갔다.
목적지는 리리오페 호수. 마치 대륙에 구멍이 난 것처럼 파랗게 칠해진 곳이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아스레인 가문은 특이하게도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섬에 저택을 지었다. 말이 좋아 호수지, 이토록 광활한 면적을 가진 호수는 처음 봤다. 게다가 그 주변은 작은 마을이 띄엄띄엄 형성되어 사람을 마주치기도 힘들단다. 결국 아스레인을 만나기 위해선 인적 없는 호수를 건너야 했다.
“이렇게 넓은데 배는 있겠지….”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달려 호숫가에 도착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마차에서 내리니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수평선 위로 보이는 저택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대저택과 푸르다 못해 창백한 호수에 일순 매료되어 숨을 빼앗겼다.
멍하니 저택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부가 넌지시 말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조심하소.”
“…네?”
“이 호수가 사람을 잡아먹는단 소문이 있거든.”
불길한 말을 남긴 마부는 말머리를 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니 호수는 깊은 정적에 빠졌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입김으로 흩어지는 숨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수’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소문이었다.
호수의 깊이가 어떤지 보려고 조심스레 물가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누군가 자갈밭 위를 다급하게 달려왔다.
“거 가까이 가면 못써!”
걸걸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이 다짜고짜 삿대질하며 핏대를 세웠다.
“미쳤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호숫가로 웬 마차가 가기에 불안해서 나와 봤더니만,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먼.”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중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호수엔 괴물들이 득실거려.”
“괴물…이요?”
“그래. 요즘 것들은 마물이라고 부르겠지만.”
호수에 마물이 산다니. 그럼 아까 마부가 말한 소문이 설마 마물에 대한 건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스레인이 호수 마물과 관련된 소문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저 저택에 백작님이 살고 계시지 않나요?”
“뭐야. 그건 알고 있구먼. 바로 그 백작님께서 날뛰는 괴물들을 잠재우셨지.”
“…예?”
“아무리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봐도 사실이야. 우리가 먼저 호수로 들어가지 않는 한, 절대 괴물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 약속하셨어. 그 덕분에 계속 안전했지. 그런데 뭐 하러 들어가나? 괜히 화를 샀다간 자네는 물론이고, 이 호수 근처에 사는 우리까지 뼈도 못 추릴 거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단지 아스레인 가문의 저택이 섬에 있어서 접근이 어려운 줄 알았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가문은 흉흉한 소문이란 울타리로 지켜지고 있었다.
“선대 때부터 우릴 지켜 주시니 참 대단한 가문이지. 물론 얼굴은 딱 한 번밖에 못 뵀지만….”
한껏 감정에 취해 있는 중년에게 미안하지만, 아마 아스레인 가문이 지키고자 한 건 주민이 아니라 호수의 마물일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수와 관련된 소문도 주민들이 함부로 영역에 침범할 수 없도록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소문을 듣고 나니, 넓은 호숫가에 배는 고사하고 뗏목조차 없는 이유가 이해됐다.
“그럼 호수를 건널 만한 배를 구할 수 있을까요?”
“쯧쯧,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듣나?”
“얼마나 위험한진 알겠어요. 하지만 전 반드시 가야만 해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간절하게 말했으나 중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꼭 자네처럼 호수에 들어가고 싶다는 청년이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지. 그때마다 백작님께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어.”
팔짱을 낀 중년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호수는 모든 인간을 반기지 않는다. 설령 목숨이 아깝지 않은 멍청한 자가 찾아오거늘, 호수에 몸뚱이라는 오물을 버리지 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조언해라.”
참으로 아스레인다운 말이었다. 입을 꾹 다무는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의기양양해진 중년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갔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시 호숫가로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돌아갈 순 없어.”
저택이 보이긴 하다만, 수영해서 가기엔 너무 멀다. 설상가상 마차를 타고 오느라 시간을 다 쓴 탓에 슬슬 밤이 찾아왔다. 삽시간에 어둑해진 호수는 늪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발끝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바라보는데, 수면에 달빛이 쏟아지듯 찬란한 은발이 비쳤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발레리노처럼 가볍게 호수 위를 걸어 다니는 시스템이 보였다.
- 무얼 고민하십니까.
“어떻게든 호수를 건너야 해. 근데 배가 없이 어떻게 건너겠어? 게다가 내 사정이 어쨌든, 마물 입장에선 영역을 침범당하는 거니까 분명 공격해 올 거야.”
당장에 호수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하게 손톱 끝을 물어뜯는 나와 달리 시스템은 얄밉게도 살랑살랑 수면 위를 걸어 다녔다. 힘겹게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결국 시스템을 향해 짜증을 냈다.
“제발 정신 사납게 굴지 마.”
- 태오 님.
“…말릴 생각이면 그만두고.”
- 후후, 설마요. 집념으로 가득한 눈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말끔한 구둣발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번쩍 고개를 들자 시스템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여우처럼 호선을 그린 눈매 사이로 새빨간 산호색 눈이 빛났다.
- 저를 보고도 떠오르는 게 없으십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 벌써 잊으셨나 보군요.
시스템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내게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당신에게 일부를 내어 준 자가 누구인지.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을 건져 올렸다.
“설마….”
이 호수는 모든 인간을 반기지 않는다. 살벌한 경고문에 미지를 탐하는 모험가들도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 당신은 ‘모든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닌 자라면 어떨까. 인간과 마물 사이에 선 나는 기꺼이 호수로 발을 들일 수 있다. 게다가 나의 일부가 되어 준 자는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바다의 주인이자, 수십 개의 눈으로 심해를 통찰하는 존재.
“오케아노스.”
이름을 중얼거리자 시스템이 기다렸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에 듣는군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마물을 흡수한 후로 야생의 오파러스는 물론이고, 나를 경계하던 프라민까지 쉽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 마물은 반드시 마물을 알아본다. 그러니 호수에 사는 마물은 내 안에 잠든 오케아노스를 알아볼 것이다.
“…좋아. 어차피 방법은 그뿐이야.”
깊은 물속은 매시간이 밤이고 낮이었으니,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찰박찰박 발목까지 일렁이던 물은 어느새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고요한 호수에 파동이 커져 갔다. 정말 마물이 있거늘, 이미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무모한 자신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후우….”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자 허리까지 차오른 수면은 서서히 가슴으로, 목으로 올라왔다. 입술 아래서 물이 찰랑거리자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참았다. 마침내 머리끝까지 물에 잠기는 순간,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어두운 물속에서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
설마-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