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하늘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 것 같다. 새벽만 해도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은 아침이 되자마자 잠잠해졌다. 곧 눈이 올 것처럼 어둑해진 하늘 아래 비브린트 숲으로 향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제법 험한 숲길을 지나야 했지만, 그 누구도 힘든 소리를 내지 않았다. 편히 눈감지 못한 채 잃어버린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들을 위해서.
이윽고 앞서 걸어가던 기사가 고치처럼 둥그렇게 말린 나무뿌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세잔의 기도문과 아스레인의 마력을 머금은 덕분일까. 그날 진이 뿌리 위에 올려놓은 꽃은 좁은 틈새까지 뻗어 나가 있었다.
“시작하게.”
아스레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두 기사가 오동나무로 짜인 상자를 내렸다. 삽으로 땅을 파고, 상자를 묻는 것까지도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그저 그날을 기억하며 조용히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비브린트 숲을 그리워할 누르에게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숭고한 의식이 끝난 후, 마차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무채색이 된 풍경에 하얀 눈발이 휘날렸다.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랜턴 위에도, 검은 정복을 입은 마부의 어깨에도, 웅장한 위용을 나타내는 독수리 깃발에도- 새하얀 눈은 평등하게 쌓였다.
서서히 바닥을 뒤덮어 가는 눈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사이누르 일가에게도 눈은 쌓여 가겠지. 한 겹의 눈이 나를 대신해 그들을 따스하게 품어 줄 것이다.
조용히 창밖을 구경하다가 저 멀리 지나가는 신전을 보고 문득 떠올랐다.
“오늘 클라우스 일가의 장례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죠?”
“그래. 히아신스와 아폴론을 기억하는 시종장이 주도한다더군.”
비록 성대한 장례식은 치르지 못하더라도 히아신스와 아폴론은 나란히 관에 안치될 것이다. 그러나 초라한 가족묘에 죄인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클라우스는 이름 없는 황야에 버려졌다. 누구도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굶주린 벌레와 마물들의 피와 살이 되어 갈 뿐이다.
고독한 최후- 그보다 그의 생애와 잘 어울리는 결말은 없을 것이다.
***
바쁘게 밀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덧 방학이 다가왔다. 노예…. 아니, 현대 대학원생 시절 방학이란 개념이 없다 보니 아예 잊고 있었다. 학기가 끝나면 방학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애초에 수업을 듣지도 않았고, 잠시나마 돌아갈 본가도 없으니 생활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방학이라고 하니 특별한 활동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졸업 논문을 미리 준비해 둘까? 아니면 다른 보호소에 있는 마물을 보러 갈까?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하려나.
“세잔은 본가로 돌아갈 테고, 진은 계속 취업 준비하겠지? 그럼 교수님은….”
아스레인은 평소처럼 바쁘겠지. 오늘도 연구실에 얼굴도장만 찍고 어디론가 급히 가 버렸다. 옆 연구실에 있는 바인하르 교수는 벌써부터 휴가 계획을 세우던데, 대체 아스레인은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그보다 나는 대체 왜-
“일에 치이는 사람을 좋아해서는….”
물론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좋아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어떻게든 아스레인 얼굴을 보려고 거의 일주일째 연구실에 죽치고 앉아 있다. 그런데 하루에 얼굴을 두 번 보면 많이 마주쳤다는 게 말이 되나?
“하아, 내가 아는 교수들은 항상 나보다 한가했는데….”
신세를 한탄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슬슬 방학이 다가와 찾아오는 이 없는 연구실에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 냉큼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나 문으로 쪼르르 걸어갔다. ‘누구세요?’ 하고 물을 새도 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 있었냐?”
“아이리스! 여긴 웬일이에요?”
손님은 다름 아닌 아이리스였다. 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한 손에 웬 포대 자루를 든 아이리스가 한참 쭈뼛거리다가 말했다.
“혹시 그… 털뭉치.”
“털뭉치요?”
“그, 있잖아. 온실에 있는 시커먼 놈.”
“설마 누르요? 누르는 회색 털인데요.”
“회색이든 검정이든, 아무튼 그놈… 편식하는 거 있냐?”
“신선한 열매라면 뭐든지 좋아해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나도 염치는 있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리스가 멋쩍게 포대 자루를 내밀었다. 살짝 열린 자루 입구에서 새콤한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귀중한 걸 받았으니까 최소한 보답은 해야 될 거 아냐.”
아! 기쁘게 탄성을 내뱉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마석에 대한 보답으로 사이누르에게 나무 열매를 선물하려나 보다. 안 그래도 사이누르와 아이리스의 첫 만남이 썩 좋지 않아 마음이 쓰였었는데, 정말 잘 됐다.
“같이 가 줄 수 있어?”
“당연하죠! 지금 당장….”
냉큼 아이리스를 온실로 데려가려다가 불현듯 심각한 문제가 떠올랐다.
“뭐야. 왜 갑자기 멈춰?”
내가 아이리스를 경계하던 시절, 누르를 통해 간단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 탓에 누르는 여전히 아이리스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아이리스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려면 누르에게 설명부터 해야 한다. 물론 누르와 말이 통하는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야. …태오? 왜 그러는데.”
아이리스는 내가 마물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만약 내가 다짜고짜 누르와 대화한다면 혼잣말하는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리스를 앞에 세워 두고 누르에게 귓속말하는 것도 영… 이상하다.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고민하다가 끝내 진실을 털어놓았다.
“뭐?”
물론 마물 도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아이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깐만. 그러니까 아그누스가 그림자로 들어온 순간부터 마물이랑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네.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려면 많이 친해져야 돼요. 꾸준히 교류도 하고….”
“야! 그건 인간끼리도 그래!”
“으음…. 그러네요.”
“뭐? 으음, 그러네요?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얘기가 아니라니까?”
“진짜 말하려고 했어요. 언젠가 말하려고는 했는데….”
연신 헛웃음을 흘린 아이리스는 이마를 턱 하고 짚었다. 그러곤 허망한 눈동자로 나를 한 번 보았다가 눈을 질끈 감기를 반복했다.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 들어 얌전히 양손을 모으고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몇 번이고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겨우 물었다.
“다 알아?”
“아뇨. 아직은 아이리스밖에 몰라요.”
“웬일이냐? 그렇게나 따르는 교수님한테 먼저 말 안 하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요. 아무튼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알았죠?”
“우리만의….”
“아이리스. 알겠죠?!”
“아오. 알겠어! 일단 알겠는데, …너 진짜 어이없다.”
가느다랗게 뜬 눈초리에 배신감이 한가득 묻어났다. 계속 ‘어떻게 그래?’라는 말만 반복하기에 그의 팔을 장난스럽게 쳤다.
“에이, 아이리스도 어느 정도 가능했잖아요.”
“나는 마법으로 대강 기분을 읽어 내는 정도였어. 너한테 비빌 능력이 아니었다니까?”
“하하… 좋은 게 좋은 거죠….”
아직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리스를 끌고 온실로 향했다. 익숙한 길목을 따라 들어가니 바위 옆에서 느긋하게 발톱을 손질하던 누르가 벌떡 일어났다. 반가운 마음에 바람개비처럼 흔들리던 꼬리는 이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태오! …그리고 웬 조무래기 하나.]
예상대로 누르는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경계했다. 등 털을 바짝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자태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위협적인 마물의 위압감을 풍기는 탓에 아이리스도 덩달아 긴장해 버렸다. 이러다 두 번째 만남도 실패로 돌아갈 것 같아서 급히 사이를 갈라 놓았다.
“싸, 싸우는 거 아냐.”
[그럼 또 실험이야?]
“아니야. 이번엔 친구로서 데려온 거야.”
[뭐? 친구?]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끝난 누르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이 아이리스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 대화하는 거냐? 진짜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손뼉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자, 다시 인사할게. 이쪽은 아이리스 딜런. 그리고 이쪽은 누르. 둘 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모쪼록 나쁜 감정은 없었으면 해. …첫인상을 안 좋게 심어 준 건 내 탓이지만.”
멋쩍은 웃음 뒤로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니 아이리스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쪼만한 털 뭉치가 그새 많이 컸네.”
표현이 서투른 아이리스로선 최선의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누르에겐 퉁명스럽게 들릴 뿐이었다.
[쟤 지금 뭐라고 했어?]
“털이 참 멋지대.”
[흥, 보는 눈은 있네. 완전히 망가진 놈이.]
마찬가지로 낯가리는 누르에겐 나름 친근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르릉대는 울음소리만 들은 아이리스가 이해할 리 만무했다.
“뭐래?”
“만나서 정말 반갑대요.”
“얘들은 반가우면 이빨부터 드러내나 봐? 이러다 조만간 물겠어, 아주.”
이윽고 눈을 마주친 누르와 아이리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괜히 만남을 주선한 걸까? 아냐. 오해가 풀리면 잘 맞을 것이다. 분명히. …아마도.
어떻게 둘 사이를 좁힐까 고민하는데, 누르가 먼저 눈싸움을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얘한테 마석을 줬구나?]
“어떻게 알았어?”
[척 보면 척이지. 자세한 사정은 됐으니까 얌전히 포대 자루나 내놓으라 그래. 안 그럼 물어 버린다고.]
“누르야….”
와앙-하고 입을 크게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속속 드러났다. 오늘따라 송곳니가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눈치 빠른 아이리스는 누르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내게 귓속말했다.
“쟤 방금 내 욕했지.”
“하하, 아니에요. 가져온 선물을 보여 달래요.”
“아니긴 뭘….”
아이리스는 짧게 혀를 차며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띄엄띄엄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 가족 일은 정말 유감이다. 내가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 덕분에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게 됐어.”
어색하지만 진심 어린 마음이 닿은 걸까. 말을 전해 주지 않았는데도 누르는 경계를 늦추고 서서히 다가갔다. 그 사이 아이리스는 포대 자루 안에 손을 넣어 열매 한 뭉텅이를 꺼내었다. 조심스레 열매를 내밀자 누르는 뭉뚝한 코를 움직여 열심히 냄새를 맡다가 하나씩 받아먹었다.
감격스러운 광경에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하지만 오고 가는 대화는 정말 그들다웠다.
“…맛있냐?”
[맛없으면 마석을 다시 받아 내려고 했는데, 꽤 괜찮은 걸 가져왔네.]
“그냥 먹는 걸 봐선 괜찮나 보네. 많이 가져왔으니까 더 먹어라.”
둘은 신기하게도 말이 통했다. 누르가 무서운 속도로 열매를 먹어 치우자 아이리스는 아예 포대 자루를 뜯어서 내밀었다. 갓 수확한 열매가 마음에 들었는지, 누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매를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아이리스가 대뜸 물었다.
“이제 방학인데 얘는 어떡하냐?”
“누르요? 학교는 방학이어도 온실 관리자들은 계속 출근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저는 방학 때도 기숙사에 있을 것 같으니까 틈틈이 보러오면 되죠.”
게다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소환하면 되니 방학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이리스는 방학 때 뭐할 거예요?”
“마석이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훈련해야지. 그래야 졸업하고도 길바닥에 나앉지 않을 거 아냐. 그러는 넌?”
“아직 못 정했어요. 교수님께서도 별말씀 안 하셨거든요. 아마 못 다 한 연구를 계속하지 않을까 싶어요.”
“넌 방학만큼이라도 좀 쉬어라. 방학이란 게 뭐냐? 어?”
“하지만 교수님도 안 쉬시던 걸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아이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끝마다 교수님, 교수님.”
“아, 거슬렸어요? 미안해요.”
“아니, 뭐. 기댈 사람이 있는 건 좋은데. …이런 말하기 좀 뭐하지만, 교수님이 갑자기 어딘가로 날라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설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제게 연락은 남기시겠죠.”
그러고 보니 지금껏 아스레인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아무리 바빠도 학교로 출근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방학이 되면 수업이 없고, 그럼 아스레인은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연구실로 출근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대로 아스레인이 저택과 일만 병행한다면…. 뭐야. 3주나 못 보는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스레인 교수님에 대한 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충격적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아 머리가 띵해졌다. 이리저리 따라다닐 구실도 없고, 얼굴을 보고 싶다는 흑심에 연구실로 출근해 달라고 말할 용기는 더욱 없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에 마른세수하며 말했다.
“실은… 잘 모르겠어요. 남들은 곧 방학이라고 여유로운데, 교수님은 평소처럼 바쁘세요. 근데 저는 왜 바쁘신지도 모르고…. 그냥 연구실 들르실 때 인사하는 게 전부예요.”
“교수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거겠지. 너한테 전부 말할 의무는 없잖아.”
“그건….”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악의 없는 말이 정곡을 찔러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러네요.”
왜 지금껏 아스레인이 나한테 어딜 간다고, 어디가 아프다고 말을 안 하면 서운해했을까. 물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다지만, 아스레인은 아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너무 오랫동안 곁에 머물러 있어서 나도 모르게 착각해 버렸다.
“아이리스가 맞아요. 제가 뭐라고…. 교수님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죠.”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다 정말 방학 내내 연락이 끊기면 어떡하지. 과연 3주 동안 얼굴을 안 보고 버틸 수 있을까? 인생 처음으로 방학이 걱정되기 시작했다.